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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송학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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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강론 스크랩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미카엘라 추천 0 조회 7 15.09.16 16: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중 제24주간 목요일>(2015. 9. 17. 목)(루카 7,36-50)

 

<용서, 사랑, 회개>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7,41-43)."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여기서 '채권자'는 하느님이고, '채무자'는 인간들입니다.
'빚'은 죄를 뜻하고,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용서'를 뜻합니다.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라는 말씀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는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죄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남들보다 죄가 더 큰 사람도 있고, 더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베풀어집니다.
더 큰 용서도 없고 더 작은 용서도 없습니다.
죄가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똑같은 용서를 받게 됩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교리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하고,
교리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는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이 고마워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사실 그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더 많이 탕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이 고마워하게 됩니다.
즉 자기가 큰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이 고마워하게 되고,
더 많이 회개하게 됩니다.
은총을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덜 고마워하고,
그래서 적게 회개하게 됩니다.
(은총을 안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예 고마워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따라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여자는 자기가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크게 고마워하고 있고, 크게 회개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말씀은,
"자기가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고마워하고 적게 회개한다." 라는 뜻입니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은 본질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는,
사실상 같은 죄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 했는데 회개는 하지 않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용서받기를 거부하고 완전히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크게 회개하고(마태 26,75)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모두 똑같이 사랑하셨고,
똑같이 용서하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누구의 죄가 더 큰 죄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유다가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왔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받아주셨을 것이고, 그러면 유다는 '배반자 유다'가 아닌
'사도 유다'로 이름이 남아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왜 자살했을까?"
아마도 분명히 그는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다.
내가 회개해도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예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 무제한이라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회개는 이미 받은 용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집에 돌아간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
그는 자기가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회개했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아버지를, 아버지는, 아버지의"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의 원문을 보면,
"당신을, 당신은, 당신의"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말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또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의 저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큰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집의 '안'에 들어가서 잔치 음식을 먹고 있는데,
큰아들은 집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밖에' 남아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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