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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養齋 이갑규)
자연 즐기며 수양·저술·강학 …'선비들의 知的 공간'
누각이 정자보다 규모 커, 경상도 특히 안동 가장많아
퇴임 사대부·처사가 주역
우리 문화의 대표적 흐름 중 하나인 선비문화는 누정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에 속하는 밀양 영남루. |
연재의 방향
누정은 건립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이나 용도가 다양하다. 규모나 위치에 따라 지명도나 거쳐간 선비들의 수도 다르다. 수많은 누정 중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어느 누정을 다룰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한학자 이갑규씨(대구대 겸임교수)와 누정연구가 오용원씨(동국대 한문학과 강사)의 자문을 받아 경상도 지방의 누정 중 학맥이나 문중을 대표할 수 있는 누정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했다. 해당 누정의 주인공을 비롯해 그 주인공과 관련된 학맥과 문중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을 큰 흐름으로 삼고자 한다. 이런 기준으로 다루지 못한 누정 중 대표적인 것들은 건립 목적이나 용도 등을 기준으로 해서 다룰 계획이다.
누정마다 전문가와 함께 현장을 찾아 누정기나 각종 현판을 채록·해석하고, 누정과 관련된 후손을 인터뷰하면서 해당 누정에 담긴 선비들의 삶과 정신을 되살리고자 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옛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누정(樓亭)이다. 그 중에서도 정자가 제일 많다. 우리의 선조들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나 관직에 나가지 않는 처사(處士)로 지내면서 소박한 정자 한 칸을 마련, 저술과 강학(講學) 활동을 했다. 또한 학덕 높은 스승이 거닐던 곳에 제자나 후학들이 그 학덕을 기리는 정자를 건립, 인격과 학문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기도 했다.
귀족들이 풍광 좋은 곳에 정자를 앉히고 풍류를 즐긴 경우도 있지만, 그런 정자는 그리 많지도 않고 지금까지 보존된 곳도 드물다. 선비들의 정신과 혼이 누정의 핵심이며, 후학들이 본받고자 하는 그런 정신이 누정을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하게 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누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 대구·경북이고 영남이다. 누정 건물 자체보다 거기에 담겨진 선비들의 삶과 정신이 더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 보물들은 아직까지 대부분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영남의 누정을 중심으로 누정에 남겨진 시문이나 누정기 등을 통해 선조들의 소중한 정신과 풍류, 지혜를 조금이나마 더듬어보고자 한다.
◆누정의 개념과 역사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하고, 벽이 없게 지은 집인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누각과 정자를 비롯해 당(堂), 대(臺), 헌(軒) 등을 포함해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또는 흙으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 이층 이상으로 지은 것이 누각이라면, 정자는 벽이 없이 탁 트인 건물로 누각보다 규모가 작고 학문과 저술 활동을 위해 소박한 초당으로 지은 경우가 많다.
누정은 보통 마루로만 되어 있으나 한두 칸 정도의 온돌방이 딸린 경우도 적지 않다. 정자가 개인적 수양공간이라면, 누각은 공적인 집단 수양공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누정은 신라 소지왕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전(口傳)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으로 볼 때 천천정 이전에 누정의 축조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5세기 이전의 누정 역사는 알기 어렵다. 누정은 이처럼 궁실을 위한 원림(園林)의 조성과 더불어 군신의 휴식처로 만들어지기 시작해 차츰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누정 지역적 분포
현재 문헌으로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누정 가운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누정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경상도가 1천295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1천70개), 충청도(219개), 강원도(174개), 제주도(6개) 순이다. 경상도 중에서는 안동(97개), 산청(83개), 예천(79개), 거창(69개) 등 순으로 많다.
이보다 앞선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국역본)에는 전국의 누정 수가 885개로 돼 있다. 이 중 경상도가 263개로 가장 많다. 전라도(170개), 평안도(100개), 충청도(80개)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여기에 수록돼 있는 누정 중에는 소실된 누정도 있고, 이후에 신축한 누정도 있다. 안동 지방에 있는 누정 가운데는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로 다른 장소로 옮겨진 것도 상당수에 이른다.
누정은 지리적 환경과 누정을 건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정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학자나 묵객(墨客)들의 출입이 있어야 한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는 어느 지역보다 퇴계 문인을 비롯해 많은 사숙문인(私淑門人)들이 배출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학풍을 이끈 본거지가 경상도인 만큼 학자들이 머문 곳이 많으며, 누정도 많을 수밖에 없다. 경상도는 이처럼 누정이 건립되거나 경영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경상도의 누정 중에는 소박한 초당의 정자가 많다. 형편이 좋아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가 많은 전라도와는 차별되는 점이다.
◆누정의 기능과 누정문화
누정은 세워진 위치나 건립 취지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다. 우선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을 들 수 있다. 명승지나 경관이 좋은 곳에 있는 누정은 그곳에 오르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그 흥취를 즐기게 되는 것이 1차 기능임은 당연할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누정은 주로 학문을 가르치고 수양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 사대부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해 누정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많았다. 씨족끼리의 종회(宗會)나 마을사람들의 동회(洞會), 각종 계 모임을 위해 건립된 경우도 있으며, 활쏘기 수련장 구실을 한 곳도 적지 않다. 궁궐 및 관아의 누, 성루(城樓) 등은 휴식이나 연회, 감시, 조망 등의 용도로 활용되었고, 사찰의 누는 강당, 사찰사무실, 전망, 종루(鐘樓) 등의 용도로 사용됐다.
옛 관리와 선비들은 누정을 건립하고, 직접 누정을 유람하며 글을 남기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했다. 누정 문화활동의 주역은 현직 관리보다는 퇴임한 선비나 처사로 지내던 지식인들이었다. 누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자에 남긴 자취로 보면 자연 속에 소요자적하거나 은둔하던 지식인들의 공이 절대적이다.
지식인들은 각박한 현실을 피해 누정에서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며, 거기서 정신적 즐거움을 찾고 자연을 배우는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 우리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선비문화나 산수문화는 누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누정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은 기획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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