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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송학동 성당
 
 
 
카페 게시글
오늘의강론 스크랩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미카엘라 추천 0 조회 5 15.09.24 08: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중 제25주간 목요일>(2015. 9. 24. 목)(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헤로데가 몹시 당황하였다는 말을,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말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양심의 가책'이 아닙니다.
뒤에 있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헤로데의 말은, 그가 양심의 가책을 하나도 안 느꼈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당황한 것은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인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귀신인가? 귀신이 나를 찾아와서 해코지 하는 것은 아닐까?"
같은 식으로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라는 헤로데의 말은, 요한이 죽은 것은 틀림없다는 뜻이고,
자기가 요한을 죽였음을 다시 확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죽은 사람의 '부활'을 안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은 아니라고,
즉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요한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헤로데 입장에서 생각하면,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요한의 귀신이거나,
요한 행세를 하는 가짜 요한이거나, 요한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루카복음에는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3,31)."
사람들이 예언자로 존경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도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에
헤로데는 예언자 한 명을 더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은 죽여 없애도 그만인 성가신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는 말을,
죽여야 할 사람인지 내버려 두어도 되는 사람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 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을 때입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루카 23,6-8)."
지금 이 내용을 보면, 헤로데는 자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전혀 양심의 가책을 안 느끼면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했다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라는 말에 들어 있는 '기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난 동방박사들의 기쁨(마태 2,10)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기쁨,
즉 세속적인 즐거움입니다.
헤로데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자신의 욕망을,
즉 신기한 일을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음을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
헤로데가 만난 예수님은 '조롱거리'였을 뿐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에는
헤로데처럼 신기한 일을 보기를 기대하고,
또는 세속적인 복을 기대하고 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 수는 적었고, 거의 대부분은 그냥 떠나버렸습니다(요한 6,66).
그들이 바라는 것, 즉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는 헤로데처럼 어떤 표징(기적)이라도 보기를 기대했다가 안 보여주시니까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려고 간 사람들도, 고친 다음에는 거의 대부분 그냥 가버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소문'을 듣고,
신기한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우려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현실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그냥 떠납니다.
교리를 이해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교리를 믿기가 어렵다,
교회가 재미없다, 너무 딱딱하고 차갑다, 뜬구름 잡는 말만 한다, 등등... 이유가 많지만,
근본적으로 바라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냥 떠납니다.
그들이 종교와 신앙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그것을(세속적인 복이나 즐거움을)
교회에서 주지 않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자,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사도 17,18)"
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고,
"당신이 말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겠소?
당신은 우리가 듣기에 생소한 것을 전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소(사도 17,19-20)." 라고 말하면서
관심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관심은 '새롭고 신기한 것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예수님'에 관해서 설교를 했는데,
사도행전 저자는 그 결과를 이렇게 전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전체 내용을 보면 아테네에서의 바오로 사도의 활동은 실패인데,
그래도 신자가 된 사람이 몇 명은 있었으니(사도 17,34) 완전한 실패는 아닙니다.

 

이미 신자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희망'에 대해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희망'에 따라서 '믿음'과 '사랑'이 바뀌게 됩니다.
"무엇을 희망하는가?"에 따라서 신앙생활 전체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느냐? 아니면 참 신앙으로 성숙해지느냐? 로.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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