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의 시험대에 오른 정치력
가능하면 정치적 이슈에 대한 글을 쓰지 않으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어수선해서 하나 올립니다. 사회는 정치체계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체계와 국제정치, 그리고 더 깊어 들어가면 한 사회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한 관습과 정서까지 얽혀서 돌아가는 큰 쳇바퀴와 같습니다. 이것을 통합적으로 사회체계(social system)라 부르고 이를 주도하는 것이 정치체계입니다. 그래서 모택동은 정치괘수(政治掛帥), ‘정치가 앞장서서 깃발을 높이 든다.’라고 했지요. 전체 사회체계에서 법체계는 조그만 부분이며 다른 체계와 밀접하게 얽혀있습니다. 법대로 법조문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어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우리나라 헌법 1조도 쉬운 말이 아닙니다. ‘민주’가 그렇고 ‘공화국’이 그렇습니다. 북한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지요? 누가 3대 세습인 북한을 민주적이고 공화국이라 생각합니까마는 자기들은 그렇게 부릅니다.
이런 종합적인 정치 세계를 이끌어가는 게 통치자이고 이들에겐 이들의 길이 있습니다. 왕에게는 왕의 길이 있고 귀족에게는 귀족의 길이 있고 평민에게는 평민의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왕자로 태어나면 부와 권력을 갖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없다고 하지요. 권력을 두고 피의 투쟁이 다반사이니까요. 평민들은 귀족들의 엄격한 도덕률을 요구받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군주는 개인으로서는 착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지만 군주로서는 악의 강에도 발을 디딜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오래전에 본 ‘줄리우스 시저’인가 하는 영화에서 시저는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묻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너를 배반하고 적이 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아들은 서슴지 않고 목을 베는 시늉을 합니다. 이것이 통치자를 위한 교육입니다.
오늘의 주제로 돌아갑시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제 검사나 검찰총장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정치인입니다. 나는 대통령이 취임하는 순간부터 ‘이건 아닌데...’라는 걸 여러 번 느꼈습니다. 상대방 이재명 후보가 선거에서 패배를 인정했으면 취임식 등 국가적 행사에서 만날 때 악수하고 청와대에 초청해서 식사도 하면서 화합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은가요? 물론 그는 수많은 혐의를 가진 ‘범법자’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그를 단지 야당 대표로 만나주면 되는 겁니다. 만난다고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지요. 야당 당수가 범법자라 만나지 못한다면서 대신 야당 원내총무를 다른 정당 대표들과의 모임에 초청하나요? 대통령은 yes man들로부터 좋은 소리만 들으라는 게 아닙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당연히 듣기 싫고 엉뚱한 소리가 나올 것이고 대통령은 ‘알겠다.’고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다음 법적인 문제는 법무부, 검찰에서 처리할 것이라고 선을 그으면 됩니다. ‘내가 대통령으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당신의 범죄는 이제부터 검찰과 잘해 봐!’하면 얼마나 통쾌할까요?
이태원 핼러윈 사태도 그렇습니다. 그 전 세월호 참사와 비교되지요. 우리에게는 생소한 핼러윈이라는 미국의 이상한 명절놀이를 즐기려던 많은 젊은이 죽은 사고입니다. 온 국민이 가슴 아파합니다. ‘왜 애들이 골목길에 가득 찬 걸 교통 정리하지 못했느냐?’라는 안타까움과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하지요. 동시에 많은 국민들은 ‘이건 개인적인 일인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걸 수년에 걸쳐 정리하지 못하고 여전히 국정에 발목을 잡는 사건으로 만들고 있나요? 이 모두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 밖은 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늑장 대응’을 걸고넘어진 대부분 경우 법원에 가면 무죄 석방되거나 기껏해야 집행유예 등 가벼운 처벌로 석방되지요.
그런데 국민 정서는 다릅니다. 옛날부터 가뭄이나 홍수, 지진 등 천재지변조차 군주의 잘못이라 여겼습니다. 군주가 근신하고 하늘과 백성들에게 사죄합니다. 대통령도 국민에게 사죄한 다음 최고 책임자를 면직시켜야 했습니다. 그가 범법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의적 책임도 없다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도 없는데 왜 해임하느냐는 건 법적 판단이지 정치적 판단이 아닙니다. 국민 정서를 달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안부 장관은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습니다. 대통령이 아끼는 사람이라면 해직했다가 다른 직책에 기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법적 책임이 없다는 말로 문제가 해결됩니까? 국민 정서를 그렇게도 이해 못 하나요?
이재명 대표의 부산 피습사건을 봅시다. 헬기 이송이 매뉴얼대로 했다지만 국민 정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산대 병원에서 치료받았어야지요. 그런데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을 요구하는 야당에 맞서기보다는 ‘옜다! 떡 하나 더 먹어라.’하고 주어 버리니 그다음은 국민들이 나서지 않습니까? 의료계나 지역 정치인들, 심지어 정부에 반대하던 정당조차 나서서 헬기 이송이 지나친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던가요?
취임 초로 돌아가 봅시다.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는 door stepping(?)은 참신했지요. 그런데 대통령 기자회견을 잘 아는 기자 출신 친구들의 반응은 ‘언제까지 가려나?’였지요. 몇 달이나 했나요? 대통령에게 기자회견만큼 어려운 게 없습니다. 미국이나 서양에서는 어릴 때부터 토론 위주로 교육하지요. 그래서 대통령이 기자들과 토론을 잘합니다. 한국은 암기가 위주라 토론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청와대 기자회견은 사전에 질문지를 제출받고 (요즘은 예상 질문에 대해) 대통령의 발언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대통령 선거 때 토론을 보면 상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너는 너 말 하고 나는 내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던가요? 그런데 매일 준비하기 어려운 출근길 기자회견을 한다는 건 엄청난 모험이었을 겁니다.
미국 백악관 기자회견은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끝나면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기자들은 앞 주제에 대한 대통령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집요하게 추가 질문으로 물고 늘어집니다. 이런 회견을 미국 대통령들은 일 년에 50회 정도, 매주 한 번꼴로 겪어내지요. 트럼프같이 제 멋대로인 대통령도 있기는 합니다만. 한국 대통령들은 신년 기자회견을 각 부처 브리핑으로 대신하는 등 편법으로 때우고 기자회견은 일 년에 몇 번 하지 않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초 의도는 가상했지만, 출근길 회견을 중단한 뒤 기자회견다운 회견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다음, 최근 문제가 되는 대통령 부인에 관한 겁니다. 미국의 대통령 부인들은 힐러리를 비롯하여 현 바이든의 부인까지 대부분이 사회생활을 한 분들입니다. 정치를 하거나 가르치거나 사회활동가 등 진정한 ‘공적인’ 사회인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지요. 당연히 공인으로서 금도를 알고 적절하게 행동합니다. 아니면 멜라니같이 남편의 외유에 그림자 동행이나 하는 정도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 부인들은 이런 경험들이 없지요. 무슨 사업을 하거나 갤러리 운영 정도는 수익사업이지 대통령의 동반자로서의 경험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부인들이 남편을 지배하려 하거나 마치 공동 대통령인 듯이 행동하지요. 아니면 호랑이 탈을 쓴 여우같이 남편의 위세를 내세워 대통령 이상으로 폼잡는 호가호위(狐假虎威)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가 아니라 모든 길은 청와대 안주인으로 통한다고 했지요. 조선 시대에는 ‘베갯머리송사’라 했던가요?
이건 대통령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중국 명나라의 건국에 공헌이 많은 주원장의 부인인 마(馬)황후는 명을 주원장과 ‘공동’으로 세웠다고 ‘공동군주’라는 우스갯말도 있지만, 현대 민주주의 선거에서 후보의 부인을 보고 투표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대통령 부인으로서 금도를 지키지 못하면 대통령이 나서야지요.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희생하지 않은 부인이 누가 있습니까?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건 대통령의 국가경영, 통치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단호하게 선을 긋고 척결할 것은 척결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부인의 정치 ‘간섭’을 막아야 합니다. 한발 물러나는 것이 두 발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재명의 피습사건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명품 가방 사건을 빨리 사과하고 정치 공작, 몰카를 단호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보세요. 이것이 공생하는 길입니다. (2024.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