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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엔 성난 龍처럼…' 조식 선생 강학 펼친 곳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평생 벼슬 거부하며 초야 묻혀 산 실천성리학 대가
48세때 뇌룡사 지어 곽재우 등 수많은 대석학 배출
전란때 불타 소실…1883년 복원
남명은 그의 학문적 황금기에 뇌룡정에서 경의지학(敬義之學)을 실천하고 가르쳤다. |
'시동(尸童: 옛날 신주가 없이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을 대신하여 제사상 앞에 소상처럼 앉아있는 아이)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용처럼 광채가 나타나고, 말없이 고요히 침묵하여도 덕(德)은 우레소리와 같아 사람을 감동시킨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는 뇌룡정(雷龍亭·경남도 문화재자료 129호)의 이름은 바로 장자(莊子)의 재유(在宥)편에서 따온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연산군 7년)~1572(선조 5년))의 불같은 삶은 이 구절과 너무 흡사하다. 평생동안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했지만 불의를 보면 등천하는 용처럼 불끈 일어나 전제왕권을 향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갈을 서슴지 않았다. 남명은 48세(1548) 때 뇌룡사(舍)를 짓고 61세(1561) 때까지 강학에 힘썼다. 61세 이후는 산해정에서 일생을 보냈다.
#남명의 경의실천
남명은 뇌룡정시절 단성현감 사직소(丹城疏: 乙卯辭職疏)에서 "자전(慈殿: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를 지칭)은 생각이 깊으시나 깊은 궁중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을 잇는 한 고아일 뿐입니다(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沖, 只是先王之一孤嗣)"라는 과격한 표현을 써 조야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이 상소이후 남명의 기개와 인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뜻있는 유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남명은 이때 내암(來庵) 정인홍, 덕계(德溪) 오건, 한강(寒岡) 정구, 동강(東岡) 김우옹,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개암(介庵) 강익, 송암(松庵) 김면, 대소헌(大笑軒) 조종도, 영무성(寧無成) 하응도, 각재(覺齋) 하항 등의 대석학을 배출했다. 이들중 대부분은 남명이 죽은 지 20년 후인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뇌룡정의 부침(浮沈)
뇌룡사는 전란으로 불타고 훗날 뇌룡정으로 복원되었다. 1883년 조희규·신두선 현감과 유림인 허유, 정재규 등의 발의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다.
남명이 뇌룡사를 지어 거처할 때 화공에게 벽에 뇌룡을 그려 붙이도록 했다고 한다. 뇌룡정이라는 현판 글씨는 복원당시 학자인 하용제의 글씨이다. 14세 손인 율람(栗嵐) 조종명, 유림의 호당(浩堂) 김련씨 등이 뇌룡정과 최근 정 오른편에 복원한 용암서원(龍巖書院)을 관리하고 있다.
#뇌룡정은 신명사도의 표현
뇌룡정의 건축구조는 남명이 지은 신명사도(神明舍圖)를 본떠 지었다. 신명사도는 신명사명(神明舍銘)을 도표로 제작한 것으로 신명은 마음을, 사(舍)는 마음이 앉아있는 집, 즉 우리 육신을 의미한다.
후산(后山) 허유(1833~1904)의 신명사도명혹문(神明舍圖銘或問)에 따르면 남명은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밝힌 심성(心性)의 수행체계를 독자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라 하였다. 도가와 병가(兵家)를 아울러 특별한 자신의 수행법으로 발전시켜 당시 주목받았다. 신명사도명은 다음과 같다.
"태일진군(신명을 뜻함)이 명당(신명의 집)에서 정사를 편다(太一眞君, 明堂布政), 안으로는 총재가 주관하고 밖으로는 백규(외정의 각 담당관)가 살핀다(內宰主, 外百揆省), 추밀(국가중요기밀처)을 받들어 왕명을 출납하니 진실과 믿음으로 수사(출납의 사령장)를 편다(承樞密出納, 忠信修辭), 화(和)·항(恒)·직(直)·방(方) 네 글자로 부절(符節: 신분의 징표)을 발하고 백가지 금지령 깃발을 세워 신명을 지킨다(發四字符, 建百勿), 구규(九竅: 사람신체의 아홉구멍)의 사(邪)가 세 요처(눈·귀·입)에서 비로소 발하니(九竅之邪, 三要始發), 사(邪)가 움직이는 기미가 있으면 용감히 이겨 전진하여 섬멸토록 하라(動微勇克, 進敎壓殺), 구규의 사(邪)를 이겨 신명에게 보고하니 요순시대의 태평함이로다(丹 復命, 堯舜日月), 세 관문(귀·눈·입)이 닫혀 있으니 맑은 들판 끝없이 넓도다(三關閉塞, 淸野無邊), 개선하여 하나의 본성으로 돌아가니 시동처럼 앉았고 연못처럼 고요하도다(還歸一, 尸而淵)."
#퇴계 이황과 서신으로 교류
남명의 벗으로는 송계(松溪) 신계성, 황강(黃江) 이희안,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대곡(大谷) 성운 등이 유명하다. 동계(桐溪) 정온은 송계, 남명, 황강을 영중(嶺中)의 삼고(三高)라고 칭송한 바 있다.
동 시대에 쌍벽을 이루던 퇴계 이황과는 서신으로 교류했다. 남명은 이황에게 "근래 학자들이 손으로 청소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명예를 훔치고 남을 속여 해가 타인에게 미치게 한다"면서 이들을 꾸짖어 줄 것을 서신으로 청하기도 했다. 기초학문이 없는 오늘날 남명이 태어난다면 뭐라고 할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은 기획시리즈입니다)
뇌룡정의 모태가 된 신명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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