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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많은 인물은 설교의 재료가 되어 다양한 성도에게 천편일률적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성경 시대의 인물은
그 시대에 맞는 하나님이 뜻을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순종을 본받으라는 교훈의 설교는
구약 성경 저자의 관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요하고 믿음의 순종으로 백 배의 결실을 맺은 이삭을 본받아야 하고
환도뼈가 위골되는 야곱의 기도로 은혜와 복을 사모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꿈을 설교합니다.
성경의 네러티브와 설교의 네러티브는
성경 저자와 설교자의 차이 만큼이나 서로 다른 메세지가 되었습니다.
설교를 듣는 성도는
사드 배치로 분노하고 전기 요금 누진제에 광분는 현재의 모습으로
족장을 비롯한 믿음의 영웅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는 교훈의 설교를 듣고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냥 아멘합니다.
구약 성경의 인물을 묵상하면........
그 믿음의 영웅을 본받으라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복음을 전하면서
특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인물 설교뿐만 아니라 대체적인 설교의 경향은
성경 저자의 시선과 관점과 강조와는 전혀 상관없는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그 말씀의 교훈과 상관없는 설교는
예레미야의 시선으로 보면 거짓 선지자의 몽사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몽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것은
참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공격하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성경의 어느 시대에도 강조되지 않았던 성경의 사실입니다.
모세를 본받고 여호수아를 본받고 기드온을 본받고 사무엘을 본받고 다윗을 본받는 신앙을 가져라는 성경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라는 설교자의 다시 쓰는 성경입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순전한 예수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과
오늘날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설교자의 성경에 대한 왜곡과 날조와 변질과 진리의 혼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을 통해서 쏟아지는 수 많은 설교를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범심론이요, 종교 다원주의 신앙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르게 선포할 때 어멘하면
심비에 새긴 복음과 믿음의 진보를 이루고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본받아 행하였던 것은 모두 가증한 우상숭배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악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의 주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본받는 것 외에
본받고 따라야 하는 믿음의 대상은 없습니다.
성경의 신앙 인물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던 삶의 자취요,
그 시대를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의 등불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 왕국의 선지자로 남 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떤 형태로든
레위기의 법대로 제의식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모세 율법에 대한 이해가 없었지만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였던 엘리야는
선지자의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는 고난이라는 관점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고난 없이 형통한 길을 걸었던 신앙의 인물과 고난으로 형통한 길을 걸었던 신앙의 인물로 구별됩니다.
고난 없이 형통한 길을 걸었던 성경의 인물은
이스라엘 여명의 등불이 되었던 사무엘 선지자와 다윗 시대의 갓과 나단 선지자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엘리사 정도입니다.
포로 귀환의 영웅들 가운데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성전 건축의 방해를 받았으며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의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고난 받는 상황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2차 포로 귀환과 종교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신앙의 인물은 고난으로 걷는 형통의 길을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하였으며
고난과 함께 영광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여정은
그 자체로 고난의 길이었으며 믿음의 순종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로 고난 받을 일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꿈으로 말미암아 형들에게 미움 받아 종으로 팔렸습니다.
또한 보디발 아내의 유혹과 성추행 누명으로 옥살이를 하였고
고난으로 형통의 길을 걸었던 창세기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요셉을 본받아야 하는가?
그럴려면 적어도
요셉의 상황이 만들어 져야 합니다.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계시된 꿈이 있어야 하고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 이성의 유혹과 성추행의 누명으로 감옥에 가고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가 되어야 하고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의 상황이 있어 그것을 대처하는 지혜로 천하 만민을 구제해야 합니다.
요셉의 꿈을 설교하지만.......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꿈을 설교하면서
꿈이 없는 교회는 죽었고 꿈이 없는 인생은 망한다고 설교합니다.
요셉의 꿈을 가진 사람은 역사상 누구였던가?
요셉의 꿈을 이룬 사람은 성경 역사상 아무도 없고
다만 메시야를 예표하는 요셉의 특정 부분에 관한 이해를 할 뿐입니다.
요셉이 받은 고난을 본받을 수 있는가?
요셉이 가진 계시적 꿈을 본받을 수 있는가?
계시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의 지혜를 본받을 수 있는가?
일인지하 만인자상의 총리가 된 요셉이 될 수 있는가?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만이 갈 수 있는 고난으로 형통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세는 고난으로 형통한 길을 걸었던
여호와 곧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가자는 모세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으로 계시 신앙의 원형이 된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풀무의 연단을 받았으며
홍해를 건너 그리스도와 함꼐 장사되고 부활에 참여하는 세례를 받았으며
반석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석의 생수를 경험하였습니다.
출애굽의 신앙과 그 증거는
모세에게 투영된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이해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모세는
고난과 풀무의 연단으로 출애굽의 신앙과 그 계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복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본받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설교는
성경의 어떤 인물도 소화할 수 없는 단단한 식물이요, 그 양식입니다.
모세는 오직 모세 그 자신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특정된 계시적 신앙을 가졌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 혹은 하나님의 종 모세라는 말은
모세에 대한 성경 저자의 고유한 호칭이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모세를 본받아 그 신앙으로 모세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고
모세의 율법적 반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계시 신앙을 가질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은 모세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시선은
계시적 영감의 통전적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모세의 길을 걸을 수 없고
성경의 인물 가운데 모세를 본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세의 후계를 이은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의 길을 갔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세와 함께 하였고
모세를 통하여 반포된 율법을 온전히 지키며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또한 여호와 전쟁의 전사가 되어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하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그 자체로 고난의 길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는 가운데 형통의 길을 열었습니다.
어느 대형 교회 목사는 새교회당 건축을 가나안의 비전으로 제시하며
청년 여호수아를 본받아 믿음의 진군을 강조하였습니다.
과연 새교회당 건축이 가나안의 비전인가?
고령의 나이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여호수아를 청년 여호수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청년 여호수아라는 개념은
비전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우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본받아 성공한 사사가 있는가?
여호수아를 본받아 신앙의 비전을 성취한 성경의 인물이 있는가?
후대 선지자 곧 성경 저자가 기억하는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유월절과 초막절을 지킨 인물로 기억되었습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느8:17-18)
성경의 3대 절기는
유월절과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성경의 유월절은 여호수아 때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켰고
그 후 히스기야 때와 요시야 때와 성전 재건 후 유월절을 지킨 것 밖에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 가운데 크게 유월절이 지켜진 것은 세 번 밖에 없다는 것은
충격을 넘어 아득한 절망,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대기와 열왕기는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 한 후 일 년에 세 번의 절기를 지켰다고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 다른 말씀을 하였습니다.
역대기는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대하35:18)
열왕기는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왕하23:21-23)
이처럼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기억 속에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초막절을 지키는 아득한 추억의 한 페이지 뿐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제대로 지켜 진 것은
느헤미야 때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의 3대 절기는 약식으로 번제를 드린 적은 때때로 있었지만
유월절은 요시야 18년에 가장 크게 지켰고 초막절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에 가장 크게 지켜졌습니다.
이렇게 후대 이스라엘 백성의 의식 속에는 모세의 율법은 커녕 3대 절기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과 솔로몬 정도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무엇을 본받아야 할 가치가 거의 없고
무엇을 본받지 말아야 할 가치 밖에 없습니다.
청년 여호수아에 대한 비전의 설정은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한 인본주의 신앙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꿈을 이루는 비전이 아니라
여호와 전쟁의 전사로 심판의 창 끝과 칼날, 그 자체였습니다.
어쩌면 이슬람의 지하드라는 성전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모티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온전한 순종으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심판하는 여호와 전쟁의 전사였습니다.
여호수아 뿐만 아니라 사사 시대의 사사들은
킬링 필드의 주역으로 죽이고 또 죽이는 인간 병기, 그 자체였습니다.
성경의 사사기를 읽으면서 옷니엘을 본받고 에훗을 본받고 드보라를 본받고
기드온을 본받고 입다를 본받고 삼손을 본받아야 하는가?
과연 성경 사사기는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사사 시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의, 산물이요, 그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은
아브라함 언약의 뿌리를 가졌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서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복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언약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신앙적 증거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서의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의 실상이지만
사사 시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츨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굴레를 가졌습니다.
심판은 가나안 땅의 우상과 그들의 풍습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요,
구원은 심판으로 임한 이방 나라의 압제로 인한 고통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구원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특별한 능력으로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실상은
전쟁이 없는 평안이었습니다.
문득 사사기 저자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사사기의 파행은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는 사사기 저자의 이해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다는 선지자의 이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사기에 모세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라는 신명기의 말씀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룹니다.
출애굽의 여정은 율법의 순종에 대한 풀무의 연단이었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세 율법에 대한 순종의 연단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사 시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에 대한 업급이 없고
열조와 세운 언약이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삼손의 의식 속에 할례 받은 백성이라는 의식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한 전부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또 구원하며 사사를 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모세의 하나님이요,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사사 시대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이스라엘은 백성은 물론 사사들과 심지어 사사기 저자마저 전혀 없습니다.
사사 시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모세 율법에 대한 절벽,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근거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출애굽의 역사는 설정된 역사요,
모세의 율법은 바벨론 포로 그 이후의 저작이라고 합리적 주장을 합니다.
성서의 기록에 대한 합리적 의심은
학문의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기에 나타난 심판과 구원이라는 주제는
열조의 언약으로 말미암은 가나안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요,
심판과 구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을 잃어 버렸고 열조의 언약을 알지 못하였지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출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을 전제한 심판과 구원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비롯하여 출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의 배경이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계시 신앙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모세의 율법과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변함없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완전한 실상으로 나타난 메시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계시 신앙의 뿌리요, 출애굽의 증거와 그 신앙은 계시 신앙의 원형이며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가진 메시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성된 계시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계시 신앙은
그 계시의 뜻에 맞는 순종으로 구원에 이르고 불순종으로 심판에 이릅니다.
순종의 구원과 불순종의 심판, 그 중간 과정은
고난으로 걷는 형통한 길의 구원 역사요, 하나님의 정관이며,
생명의 은혜로 넘치는 구원의 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 받는 주의 백성과 이스라엘은 풀무의 연단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과정이요,
죄의 심판에서 은혜의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는 계시 신앙의 전형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깨닫게 하였으나
오늘날 그 말씀으로 하는 설교자는 성경 저자의 관점과 상관없이 인물을 우상화하여
계시 신앙의 본질을 흐렸습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설교하지 말라는 설교에 대한 역한 반응은
본질적으로 성경을 왜곡하고 날조하는 사이비 설교에 대한 대중의 경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혼잡한 설교로 성경을 이해하는 신앙은
거의 100% 사이비의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복음적인 강단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이단과 사이비의 첩경이요,
기독교 범심론이며, 종교 다원주의로 가는 첩경입니다.
성경 저자의 시선을 따라 그 동선에 맞는 계시 신앙으로 올바른 성경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루며, 그 영생의 구원에 합당할 것입니다.
고난으로 걷는 형통한 길은 정형화된 믿음의 길이요,
요셉을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하나님의 뜻을 담은 구원의 길로 상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