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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조선사회에 큰 파문을 던진 표류담
권 무 일
1. 표류와 표류담
우리나라는 대륙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바람과 조류의 흐름이 변화무쌍하다. 겨울에는 대륙의 영향을 받고, 여름에는 바다의 영향을 받는다. 계절풍이 해양활동에 영향을 끼치고, 들쑥날쑥한 해안의 지형과 울퉁불퉁한 서남해의 해저면海底面은 불규칙한 파랑을 일으켜 항해자들을 괴롭힌다.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 해상활동이 위축되고 배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원양항해는 꿈도 못 꾸게 되어 선원들의 경험도 인근바다에서의 활동으로 제한되었다.
해상활동은 첫째 고기잡이를 위한 연안 항해, 둘째 친척방문 또는 장사를 위하여 육지와 섬 또는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나들이, 셋째 관리들의 이동이나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는데 차용되는 항해, 넷째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하거나 조세를 조운하는 항해로 나눌 수 있는데 어느 경우에나 조난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제주도를 오가는 배들은 계절풍의 영향으로, 그리고 일찍이 장한철張漢喆(1744-?)이 간파한 것처럼 천봉만학千峯萬壑이 드리워진 해저면으로 인해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고 예기치 못한 풍랑이 배를 요동치게 한다. 제주사람들은 육지로 오가다가 또는 관리들의 부임‧귀임과 공물운송에 차출되어 항해하다가 자칫 표류하는 일이 많았다. 일단 표류하게 되면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족들이 상실감 속에 사는 일은 제주사람들의 일상사가 되었다. 최부崔溥(1454-1504)의 『표해록』에는 일행이 표류할 때 동승한 제주의 한 관원이 이렇게 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 표류하고 침몰되는 배가 10에서 5,6척은 되어 제주사람들은 이제 빠져죽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빠져죽곤 합니다. 그런 까닭에 경내에는 남자의 무덤이 매우 적고, 마을에는 여자가 많아서 남자보다 3배나 됩니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오가자면 조류와 바람을 이용하곤 하지만 바람과 풍랑이라는 것이 예측불허인지라 풍랑에 휩쓸린 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바람에 떠밀려 정처도 없이 흘러가다가 망망대해에서 빠져죽거나 굶어죽기도 하고, 멀리 낯선 땅에 표착하기도 했다. 그들이 만일 살아남아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이 요행히 살아서 돌아온다 해도 몇 달 몇 년이 걸린다. 그들은 예기치 못한 조난으로 바다를 떠돌다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는데 위험에 직면하여 생사의 기로에 섰다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온 이들의 이야기는 모험담이자 오랜 기간 동안 낯선 곳에서 경험한 이국의 풍물‧문화에 대한 견문담이 되었다.
표류담은 스스로 적은 것과 다른 사람이 대신 기록하여 남기는 두 가지가 있다. 1477년(성종8)에 제주에서 진상품을 싣고 육지로 가던 중 추자도에서 표류하여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에 표착했다가 2년8개월 만에 돌아온 김비의의 표류담은 홍문관에서 받아 적었고, 1801년(순조1) 흑산도 연해에서 표류하여 유구‧필리핀‧중국을 거쳐 3년2개월 만에 돌아온 신안의 홍어장수 문순득의 경우 흑산도에 귀양가있던 정약전이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다. 표류경험을 자신의 필치로 기록한 작품으로는 최부의 『표해록』과 장한철의 『표해록』이 단연 돋보인다. 이 두 권의 표해기록은 모두 한문서사문이지만 문헌적 가치와 문학적 작품성이 인정된다.
2. 이방익의 표류담
1797년 정조임금을 흥분시키고 조선사회를 깜짝 놀라게 한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나타난 이방익(1756-1801)의 표류이다. 제주사람 이방익은 임금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충장위장(정3품)의 직책에 있던 사람인데 그 전해인 1796년9월에 잠깐 말미를 얻어 제주에 머무르던 중 제주연해에서 일행 7명과 더불어 일진광풍에 휩쓸려 가뭇없이 사라진 뒤 중국의 대만·복건‧절강‧양자강‧산동‧북경·만주를 거쳐 9개월 반 만에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의주부윤 심진현은 파발마를 띄워 임금께 급히 장계를 올렸다. 그 내용이 국왕의 일기인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다. 장계를 받아든 정조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이방익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궁궐에 불러들여 직접 표류담을 들으면서 몹시 경악했다. 『승정원일기』에 이때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정조는 당대의 석학 박지원으로 하여금 이방익의 일들을 적어 바치라고 명하였는데 그 기록이 바로 『서이방익사書李邦益事』이다. 그 밖에 당대의 석학인 박제가, 유득공 등이 사사로이 이방익을 만나 표류담을 듣고 저마다 이방익을 3인칭 화자로 하여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였다. 한편 이방익은 일인칭화자로서 가사歌詞인 「표해가」를 지었고 순한글 서사문 『표해록』을 썼다.
「표해가」는 국한문을 섞어 3‧4조 또는 4‧4조의 운문으로 꾸민 장편가사인데 이방익은 이 글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적지도 없이 정처도 없이 표류하는 정황을 읊었다. 팽호도(대만해협 펑후섬)에 표착하였다가 고국에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에서 본 중국의 제도‧문물‧풍속‧고적에 얽힌 역사와 설화, 지나온 연로의 풍광 등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견해와 주체할 수 없는 감흥을 쏟아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기행체험을 순한글로 쓴 『표해록』을 남겼는데 이는 초유의 한글 표류기로 국문학사 및 국어학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이방익의 『표해록』은 220년 후 필자가 그의 발자취를 찾아 중국을 답사하는데 길잡이가 되었다.
충장위장으로 현직에 있던 이방익은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인 제주 북촌리를 찾았다. 그가 고향사람 7명과 더불어 동쪽 섬 우도에 묻힌 어머니의 묘소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느닷없이 일진광풍에 풍랑이 거칠어지자 그들이 탄 일엽편주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배안에 있는 음식은 순식간에 바다에 휩쓸려버렸고 노와 돛대와 삿대가 부러져 날아가 버렸다. 배는 늦가을에 불어오는 북서풍에 밀려 부침을 거듭하며 해안에서 멀리 한없이 떠내려갔다. 배는 망망대해에 떠도는 가랑잎같이 바람에 따라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넓은 바다로 흘러간다. 인간의 힘으로는 방향을 돌릴 수도 없고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고 정지시킬 수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방익은 아버지와 처자식들이 슬피 우는 모습을 상상하며 목이 메었다. 일행은 물에 빠져 죽기보다 기갈과 굶주림으로 죽을 처지에 놓여 있었다.
기갈상태에서 5,6일을 버텨야 했다. 늦가을의 북서풍은 비를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는 일본의 어느 섬으로 가까이 가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바람의 방향이 북동풍으로 바뀌면서 한줄기 비를 쏟아부었다. 이윽고 배는 동중국해에 접어들어 남쪽으로 한없이 흘러간다. 열흘이 지나도록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큰 물고기가 선판으로 뛰어오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경각에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기적을 맞았던 것이다. 배는 바람을 따라 장장 6,000리를 흘러가는 동안 뒤집어지거 나 파선되지 않은 것은 제주 남쪽 바다 즉 동중국해가 해저면이 평탄하고 완만한 수심100-200m의 대륙붕지대라 큰 파랑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표류한 지 16일, 눈앞에 큰 섬이 나타났다. 이윽고 배는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면서 여덟 사람을 너럭바위에 내동댕이쳤다. 표착한 곳은 대만해협에 위치한 팽호군도의 북섬 북쪽해변이었다.
필자는 이방익의 발자취를 따라 대장정을 떠날 때 첫 발걸음으로 2018년 4월 팽호도를 찾아 북섬인 길패도吉貝島(지베이다오) 북단의 한 지점을 이방익의 표착지로 비정했다. 동행한 현지인도 이곳을 지목했다.
3. 중국 견문기
당시 청나라 영토인 팽호도의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음식을 주는 등 따뜻하게 대했다. 더욱이 마조교의 우두머리인 마궁대인은 큰 물고기가 뱃전에 뛰어올라 그들이 굶주림을 면했고 풍랑이 그들을 팽호도 해안에 던진 것은 마조신의 은총이라며 그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방익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쌀장사라고 둘러대다가 마궁대인의 따가운 눈초리에 못 이겨 자신이 조선국의 정3품 충장위장임을 밝혔다. 대만에 이송되어서는 여러 대관들 앞에서 자신은 조선조정의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으로 임금이 청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 임금을 시위侍衛(큰 칼을 차고 국왕을 근접경호하는 일)한 사실을 밝힌다. 이로 인해 이방익은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 여러 관청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방익 일행은 신병치료와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하여 팽호도에서 한 달, 대만에서 한 달을 지체했는데 그동안에 으리으리한 관아, 층층이 지어진 병영, 번화한 거리, 항구에 모여든 각국의 상선들, 풍성한 물자, 밤새 울리는 풍악, 여인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구경할 기회를 가졌고 주민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이듬해 정월4일 이방익 등은 대만해협을 건너 중국본토 최남단 하문에 상륙했다. 이방익은 우선 주자서원에 들러 주자의 소상塑像에 참배했는데 이는 중국의 관리들과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일행은 하문에서 출발하여 안계‧천주‧복주에 이르는 동안 수레를 타거나 교자를 타고 이동했는데 연도에는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길을 가는 중, 한 떼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이방익의 의관을 만져보거나 입어보고 감격에 차서 우는 장면을 발견했는데,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정조는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했다 하더라도 옛 명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명나라를 흠모하고 있으며 명나라와의 춘추대의를 지키고 있는 조선을 부러워하는 증거라고 했으나 박지원은 그들은 일천여 년 전 당나라에 이민 갔던 신라 유민의 후예일 것이라고 보았다. 필자는 중국답사의 일환으로 푸젠성(복건)을 방문했는데 이방익이 지나온 하문과 천주 사이에 신라촌‧고려착高麗厝(고려마을)‧고려산‧고려묘의 유적을 거론한 향토사학자의 문헌을 확보했고 천주 옛 거리에서 고려 사람들이 살던 마을인 고려항高麗亢을 둘러보기도 했다. 더욱이 필자가 만난 사람들은 현재 푸젠성에서 생산되는 신라갈‧고려채‧고려(그들은 인삼을 고려라 부름)가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식용식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이방익이 만난 사람들은 고려인의 후예이고 이는 고려 초‧중기 300년 동안 송나라(960-1280)와의 밀접한 교류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푸젠성 남평의 어떤 스님에게서 원표법사‧현눌선사‧영조대사 등 신라 또는 고려 출신 고승들의 행적을 들을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방익이 세계최대‧최고最古의 돌다리 안평교(일명 오리교 2,255m)를 건너갈 때 곡식 실은 수레와 비단 실은 수레가 넓은 다리를 꽉 메웠고 다리 아래는 물화를 실은 상선들이 왕래하고 있었으며 다리 중간의 광장에는 저자거리가 형성되어 북적대고 채색한 누각에는 화려하게 꾸민 여인들이 거문고를 타면서 유희와 미모를 뽐냈다. 이토록 이방익은 복건성의 곳곳에서 번화한 거리, 넘쳐나는 물류, 여인들의 호화로운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모습 등 중국의 발전된 모습을 체험하고 장례행렬 등 풍속‧풍물을 눈여겨보았다. 또한 남국의 자연풍광과 때 이른 농산물의 풍성함을 조선의 가난한 농촌과 비교하며 부러워했다.
한편으로는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이방익의 마음은 타들어 갔는데 복건성의 성도인 복주에서는 황제의 호송사자가 도달할 때까지 40여 일을 기다려야 했다. 이방익은 호송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선하고도仙霞古道를 따라 절강성으로 들어가는데 험난하기로 유명한 선하령을 넘어야 했다. 당나라 때 반란군 황소黃巢가 개척한 이 길은 중국대륙의 남북을 연결하는 관절점으로 중국의 왕조역사,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측면 그리고 문화전파와 중국 여러 종족의 동질성 확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길을 통하여 선하령을 넘은 유명한 과객들이 많았는데 주희(주자)‧명나라의 지리학자 서하객‧마르코 폴로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방익이 선하령을 넘으면서 『표해록』에 상세히 기록해둔 것은 역사상 큰 족적이며 기념비적인 쾌거임에 틀림이 없다.
일행은 선하령에서 전당강을 따라 항주로 이동하면서 엄자릉이 벼슬을 마다하고 낚시로 소일했다는 자릉조대를 관람하고, 항주 서호에서는 기생들과 어울려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그는 양자강을 거슬러 동정호를 찾아 악양루에 오르고 동정호에 얽힌 고사와 시인묵객들의 행적을 더듬었으며, 되짚어오는 길에 적벽강, 구강 등 유명한 전적지를 방문했다. 소주 그리고 양주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유서 깊은 사찰인 한산사‧호구사‧금산사 등을 둘러보며 당시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방익 일행은 산동반도를 거쳐 북경에 도착했고 청나라 황제의 재가를 얻어 귀국길에 올랐다. 실로 9개월 보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4. 조선사회에 일으킨 큰 파문
1797년(정조21)윤6월10일 정조임금은 의주부윤 심진현으로부터 <의주부윤 심진현은 제주표류인 이방익 등이 대국을 거쳐 돌아온 사실을 치계함>이라는 내용의 장계를 받고 몹시 놀랐다. 이방익을 만나보기도 전에 그를 한 품계 올려 오위장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전주중군(전라감영의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종2품 무관직)으로 겸직 발령한 사실에서 정조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방익은 윤6월20일 서울에 도착했는데 성질 급한 정조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이방익을 불러올려 이방익이 견문한 내용을 청취했다. 미지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는 이방익이 아뢰는 표류담에 충격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이방익을 크게 쓰겠다고 공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방익은 인물됨이 매우 뛰어나다. 그의 표류담을 들어보니 한 배에 탄 여덟 사람이 아무 탈 없이 3만 리 길을 다녀왔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고 더구나 자양서원‧자릉조대‧악양루‧금산사 등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닌가.-『일성록』
정조의 이러한 관심은 조정의 뭇 신하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방익은 고려중기 이후 조선시대를 통틀어 양자강 이남과 대만을 처음 목격한 사람인데 이는 대단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중국 강남을 이상향으로 삼아 시와 그림을 남겼지만 그것들은 실제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글과 그림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18세기의 대항해시대 이래 급격하게 변모하는 중국 강남의 모습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방익의 경험담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이방익이 엮어가는 이야기는 매우 귀하고 생소한 것이었다. 이방익이 본 관청과 군부대‧고적과 유물‧사찰 등 종교시설은 중국의 역사이며 동시에 당대였다. 그가 엿본 풍물과 풍속은 중국의 살아있는 문화였다. 그의 표류담은 중국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국제적 상황, 중국사회의 변화, 백성들의 생활상 및 평등사회를 지향한 포용적 정치현실까지 폭넓게 담고 있었다.
정조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개혁적인 임금이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당쟁을 종식시키고 탕평책을 써서 여러 당파의 의견을 조율하는데 힘썼다. 해묵은 신분사회를 타파하려 했고 서얼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려 했다. 그는 홍대용‧박지원 등 북학파 실학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서얼 출신인 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을 중용하여 새로운 학풍의 진작과 사회개혁을 주도하도록 했다. 정조는 채제공‧이가환‧정약용 등을 통하여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고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을 어루만지는 정책을 펴서 민생안정과 국리민복을 지향해 나가려 했다.
당시 북경을 다녀온 사신들이 강남지역의 사정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면서 그 지역 백성들은 걸핏하면 소요를 일으키고 있어 강남이 불안과 암흑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마당에 이방익의 이야기를 들은 정조는 조선 지식인들의 무지함과 좁은 안목을 개탄했을 것이다.
정조와 이방익의 만남은 그동안 중국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 세계질서에 편입되어가는 중국의 정책과 실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방익이 구술한 내용을 가감 없이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에 남긴 것은 정조가 이방익의 중국 견문에 상당한 관심을 둔 데서 비롯된 매우 유의미한 경우이며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방익의 표류담은 정조의 주도하에 신진개혁을 시도하던 조정대신들과 개혁세력에게도 일파만파 전달되어 그들로 하여금 조선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하층민들에게까지 큰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일찍이 1780년 외교사절단으로 청나라를 다녀와 더 큰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갖고 『열하일기』를 집필한 박지원이 이방익의 표류담에 다음과 같이 큰 의미를 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번에 이방익은 바다에 표류하여 민(복건성)‧월(절강성)을 거쳐 왔지만 만 리 길이 전혀 막히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이 안정되고 조용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고 우리나라사람들의 선입견을 통쾌하게 깨뜨렸으니 그 공이 보통의 사신들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던 개혁의 바람은 3년 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개혁의 이론가들과 역군들은 밀려나거나 죽임을 당한다. 순조의 즉위 이래 조선의 임금들은 모두 외척에게 휘둘렸을 뿐 줏대를 갖지 못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고 나라의 문을 꼭꼭 잠가버렸다.
이방익이 언제 전주중군을 사직하고 하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전주에 있는 동안 중국에서 지참한 일기 3권을 토대로 『표해록』을 썼고 하향해서는 『표해가』를 지었다. 그는 1801년 44세로 고향 제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방익의 표류담은 타다 남은 재가 된 듯했지만 질화로 속에 이글거리는 불씨로 남아 풀뿌리 백성들에게 읽혔다. 최남선은 일제강점기에 전 국민이 신음하고 있을 때 이방익이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과 열린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과 무인기질을 기리고자 『청춘』지에 「표해가」를 실었고 위관韋官 이용기는 기생들이 부르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던 「표해가」라는 노래를 채집하였다. 가람 이병기는 시중에서 읊조리는 「표해가」 가사를 미농괘지에 철필로 베껴서 보관했다. 이토록 1797년의 표류 이야기가 백년이 넘도록 입에서 입으로, 또 기방에서까지 불리었다는 것은 이방익의 장거가 우리 민족의 자존심으로 이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필자는 2017년에 『이방익표류기』를 펴냈고 2018년부터 2020까지 3년에 걸쳐 그의 길을 따라 걷고 이를 기록하여 『제주표류인 이방익의 길을 따라가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