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한국 미술계의 최대 이슈 메이커는 단연 천경자(1924~2015)입니다. 얼마 전 뒤늦은
사망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위작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죠. 그 때문일까요? ‘천경자’란 이름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고 엄청난 가격대를
형성하며 작품들이 거래되고 있죠.
천경자는 한국화 가운데 특히 채색화 분야에서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한 작가입니다. 여성 화가로서는
드물게 대중적인 인기도 대단했죠. 꽃과 연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사랑을 받으며 ‘꽃과 여인의 화가’란 멋진 칭호도 얻었습니다. 꿈과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유명했죠. 다양한 나라로 여행을 다니면서 창작의식을 일깨우고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아예
천경자 상설전시관이 마련돼 있습니다. 덕수궁 일대로 봄나들이를 나올 일이 있다면 한 번쯤 천경자의 그림 세계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천경자, 목적, 1972 |
베트남전 홍일점 종군화가로 참여한
천경자
‘전쟁을 그린 화가들’을 시작하면서 잠시 천경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천경자는 여성의 몸으로 어떻게
거친 전장에 뛰어들게 됐을까요? 그는 베트남전쟁에 종군화가로 참여했었습니다. 당시 종군화가단의 정식 명칭은 ‘국방부 주관 월남전 한국군 전선시찰
화가단’이었죠. 6·25전쟁 당시에도 종군화가로 활동했던 많은 작가들이 베트남전 종군화가단에 몸을 담았는데요. 천경자는 단장으로 나선 이마동과
김기창, 김원, 박광진, 박서보, 박영선, 오승우, 임직순, 장두건 등 당대를 주름잡던 화가들과 함께 베트남으로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현대미술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작가들이죠.
종군화가단의 파견은 당시 문화공보부가 ‘파월 국군의 용맹한 활약상을 재현하겠다’는
목표로 국방부의 협조 아래 이뤄졌습니다. 종군화가들은 1972년 6월 14일부터 7월 2일까지 약 20일의 일정으로 베트남에 파병 중이던
청룡부대와 맹호부대에 각각 배치됐습니다. 종군화가들은 전투현장과 부대, 병원 등을 방문해 참전 용사들의 활약상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같은 해 12월 8일부터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월남전 기록화 전시회’란 이름으로 국민에게 공개됐습니다.
당시 출품된
작품들은 작가들의 이름값과는 사뭇 대비됩니다. 이에 일부 작가들은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작품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촉박했다” “작업량에
비해 제작비가 적어 힘들었다”는 회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작품들은 전쟁과 그 본질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죠. 또 작가 개인의
작품경향과 동떨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경자는 이 가운데서도 보기 드물게 자신의 작품경향을 훌륭히 담아내 주목할
만합니다.
자신의 작품경향을 반영한 천경자의 ‘목적’
정글에서 벌어진 매복작전을 그린 작품 ‘목적’을 살펴볼까요? 열대식물의 색감과 짙은 녹색의 군복 색감이 어우러진 것이 한눈에 들어오지요? 또 빽빽한 열대림 속에 다양한 소재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거진 수풀은 비슷한 색감으로 층을 쌓아 올리듯 그렸기 때문에 높은 밀도감과 은근한 색변화를 보여줍니다. 작가는 열대식물을 묘사하면서 그것의 두께와 질감보다는 형태에 치중해 공간을 평면적으로 느껴지게 표현했습니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군인들의 새까만 얼굴은 그들의 하얀 눈을 통해 대비시켰죠. 또 나비, 도마뱀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꽃과 열매 등 이국적인 요소를 넣어 열대지방의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나비와 꽃은 천경자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화면에 장식성을 더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죠.
김기창, 적영, 1972 |
기록화의 양식에 충실한 김기창의 ‘적영’
비교를
위해 김기창의 그림 ‘적영’을 볼까요? 국방부 신청사 1층 현관에 걸려 있는 적영은 베트남전 당시 우리 군이 수행했던 가장 치열한 전투인
638고지 전투, 이른바 ‘안케 고개 전투’를 그리고 있습니다. 배경이나 구도 면에서 천경자의 ‘목적’과 비슷한 이 그림에서 김기창은 자신의
작품경향을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실 이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그린다’는 처음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김기창의 작품이
그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기창이 종군화가단으로 참여할 즈음의 작품을 보면, 작품에 추상적인 요소를
접목했는데 ‘적영’에서는 전혀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전에 제작한 기록화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죠.
당시 남녀의 시각차이도 있어
남녀의 시각차이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군 복무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남자 작가들은 보다 현실적으로 전쟁을 인식하고 있죠. 반면 군대 특유의 문화나 임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천경자는 표현의 측면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천경자가 여행을 통해 창작 욕구를
일으켜왔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합니다. 사실 천경자는 종군화가란 역할을 ‘또 다른 여행’으로 여겼습니다. 베트남전 종군에 대해 회고한 그의 글
가운데 일부를 잠시 볼까요?
“때마침 문공부에서 월남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한 화가 열 사람을 뽑아 파견한다는 기별이 왔다.
우선은 여행이 좋아서 나는 혼자 미친 사람처럼 환호성을 올렸다.”
그는 당시 종군화가단의 활동을 미지로 떠나는 여행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문장입니다. 이번엔 베트남에서의 생활에 대해 적은 글을 보겠습니다.
“매일 헬리콥터를 타고 전방에
나가서 고되긴 했지만 즐거운 스케치를 많이 했다. 스케치를 하면서 전차를 따라가는 스릴이 말할 수 없이 좋았고, 전진이 휘날리는 열사에 핀
‘빼방쉐’라는 진분홍 꽃이 유정하기만 했다. 또 우리들을 위해 더위에 방탄조끼까지 걸친 사병들은 일부러 모델이 되어 주어 움직이지 않고 오래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여행의
호기심이
이 글에는 전쟁의 참혹함이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낯선 풍경에 대한 호기심, 즐거움이 느껴질
뿐이죠. 당시 종군화가단은 우리 장병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천경자가 저런 천진난만한 글을 쓸 수 있었던
배경이었죠.
어떤 분들은 전쟁을 바라보는 천경자의 태도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그럴 여지를 남긴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시각을 달리해보면 그가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안전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치 휴전 상황인
지금의 안보 상황을 잊고 평온한 하루를 보내는 시민들의 일상처럼요. 부디 불편한 마음보다는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국군 장병
여러분들의 헌신 덕분에 국민은 오늘도 행복할 수 있었답니다.
<김윤애 문화역서울 284
주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