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6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하나님의 기념책 》
말 3:16~18
〈 하나님의 침묵과 남자들의 ‘동굴’ 〉
어떤 심각한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남자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 책을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이때 주변에서는 혼자 있고싶어하는 그 남자의 방식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남성의 심리를 빗대어 “남자의 동굴”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만일 자기 주변에 이런 남성이 있다면, 그 남자의 동굴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동굴에서 나올 때는 나름대로 해결책을 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 하나님도, 깊은 침묵이 필요하다고 여기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은 무려 400여년 간이나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들, 살아가는 중에 이러한 침묵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남성의 동굴”은 “하나님의 침묵기”에 견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지난 1,500여년 동안 이스라엘을 제사장나라로 삼고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야곱을 건국의 시조로 하는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각자의 신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제사와 예배를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최고의 전성기는 모세가 이끌던 출애굽 시대였습니다.
430년간 이집트의 노예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지도자가 모세였습니다.
광야 40년, 방황했던 시기였기에 몸과 마음은 힘들었지만, 영혼은 안식을 누렸습니다.
“몸과 마음은 힘들었지만, 영혼은 평안을 누린 시기였습니다.”
출애굽하고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했습니다.
모세이후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초기 시대입니다.
솔로몬 이후 유다백성은 다시는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 야곱 이후 지난 1,500년을 돌아보시며 하나님은 침묵기에 들고자 하십니다.
〈 말라기 시대의 남은 자들 〉
하나님이 침묵기에 드실 무렵 이스라엘은 명분을 잃고 유다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보다는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남아 있습니다.
주전 586년 유다가 망하여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이 지나서 포로들이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지은 해가 주전 515년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최고조였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요? 현실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성전을 다시 지어놨는데, 현실 생활에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유다 백성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헛되다’는 풍조가 서서히 나돌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참된 축복”이 아닌 “거짓 축복”에 미혹되었습니다.
☞ 지난 주에 설교했지요? “거짓 축복” (말 3:15)
첫째, 교만한 자가 복되다.
둘째, 악을 행하는 자가 복되다.
셋째,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복되다.
말라기 선지자 당시 유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예수 안 믿는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 하나님은 지난 1,500여년을 돌아보시면서 한 400년쯤 침묵하고자 하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유다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역사에서, 모두 타락하여 끝장이 날 듯한 상황이지만 새로운 싹은 언제나 돋아납니다.
커다란 나무 밑동을 “싹뚝!” 잘라내면 나무는 사라지지만, 그루터기에서 새 싹이 돋습니다.
구원사에서 이를 “남은 자”라 합니다. “남은 자 사상”입니다.
(16절)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 말라기 시대,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남은자들”이 있었습니다.
〈 기념책에 기록되는 자들 〉
말라기 3장 16절 말씀에서 “기념책에 기록되는 자들” 이들이 곧 “남은 자들”입니다.
말라기 시대 하나님이 한마디 하시면,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하면서 대들었습니다.
말라기서에 7차례나 이런 문답이 나옵니다.
①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말 1:2) 하시니, 유다가 뭐라 대답했습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반문합니다. 사랑받은 적 없다는 뜻입니다.
② “너희가 내 이름을 멸시하였다”(말 1:6) 하시니,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멸시한 일 없다는 항변입니다.
③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올렸다”(말 1:7)
“우리가 어떻게 제단을 더럽게 하였나이까?”
④ “너희는 나를 괴롭게 했다!”(말 2:17)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면서,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에까지 이릅니다. 금도를 넘어섭니다.
⑤ “내게로 돌아오라!”(말 3:7)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돌아가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비아냥입니다.
⑥ “너희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도다!”(말 3:8)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도둑질 한 적 없다고 대드는 것입니다.
⑦ “너희는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했다.”(말 3:13)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이렇게 유다가 하나님께 꼬박꼬박 말대꾸 하면서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중에도 ‘이건 아닌데~’ 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맞아,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했어, 우리가 제단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것을 떼 먹었어!”
이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 바로 이들의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기념책’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셨습니다!
〈 기념책에 기록된 자들 〉
하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기념책에 기록하셨습니다.
‘기념책에 기록하셨다?’ 하나님이 이들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1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기념책에 기록된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본디 이 세상 모든 것,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집을 나가 부모님과 무관하게 사는 것처럼, 피조물인 사람도 그렇게 삽니다.
소유주가 하나님인데, 그 진리를 부인하고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삽니다.
“하나님과 나는 상관없어!”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산다고, 창조주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상관없는 척 삽니다.
그러나 역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야~” 양심의 소리를 부인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념책에 기록하십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이 아끼는 자녀가 됩니다.
기념책에 기록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본문의 표현이 매우 뛰어납니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어떤 아버지에게 자녀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아버지를 떠나 삽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아버지를 섬기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특별히 아끼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는 자녀, 아버지는 그 자녀에게 진정한 아버지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자기의 특별한 소유가 된 ‘남은 자’에게 이렇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의 기념책에 기록된 자가 누리는 복,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의 복입니다!
〈 의인과 악인의 분별 〉
하나님의 기념책에 기록된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8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제가 늘 설교를 통하여 누누이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의인 악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한평생 의인으로 사는 이도 없고, 한평생 악인으로 사는 이도 없습니다.
살다가 때로는 의를 행하고, 때로는 악을 행합니다.
내남없이 모두가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의인, 악인이 따로 정해져 있는 듯이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 성경은 그러나 의인 악인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본문 18절에서 분명히 선포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이 기준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기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의인 악인에 대한 정의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의인, 악인 기준이면 그 이상의 기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인 악인 기준을 믿는 자들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 기준을 받아들일 리 만무합니다.
그러면 안 믿는 자들에게 의인 악인 기준은 누가 정합니까?
대부분 자신들이 정합니다. 자기가 기준입니다.
자기 보기에 옳으면 의인, 자기 보기에 옳지 않으면 악인으로 단정합니다.
사람이 정하는 의인 악인 기준이 옳겠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이 옳겠습니까?
이치를 따져 봐도 자신이 정한 기준보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의인 악인 기준을 적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의인으로 분별하시고 기념책에 기록하십니다.
☞ 지금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기념책에 기록된 자녀들인 줄 믿습니다!
〈 기념책에 기록된 자의 복 〉
하나님의 기념책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이름과 행실과 언행이 기록됩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념책에 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나의 언행이 기록됩니다!”
하나님의 기념책은 우리에게 2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먼저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인정하시고 이름을 기록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행으로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념책에는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가실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행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최고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