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 길(여덟 번째)
(진걸선착장→정지용생가, 2016년 5월 25일)
瓦也 정유순
설레는 기분으로 설친 잠 때문인지 차만 타면 눈꺼풀이 무겁다. 차의 속도가 줄어들고 흔들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 가고자 하는 대청호 주변의 가파른 길에 접어들었나 보다. 더 짙어진 녹음이 어제 내린 비로 윤기를 더하여 숲길을 만든다. 그러나 외길을 조심스럽게 들어 가야하는 버스는 여간 고역이 아니다. 거의 45° 급커브로 꺾어야 하는 좁은 길에서는 앞뒤로 밀당을 여러 번 하여 겨우 돌아 들어간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몇 차례 반복을 하여 도착한 곳은 오늘의 출발지인 군북면 석호리 진걸선착장이다.
<진걸선착장>
시야가 탁 트인 대청호를 기대했는데 그 놈의 미세먼지가 내 눈을 흐리게 한다. 금강 본류가 호수로 변한 선착장 끝에서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찌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래도 잔잔한 호수는 흔들림이 없는 말 그대로의 아침고요다. 각자 오늘의 걷기를 준비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청풍정 방향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이 흙길 보다는 좀 힘들기는 하지만 길게 도열한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든 가을에 다시 오라고 새끼손가락을 걸어온다. 약초로 더 알려져 개체수가 점점 더 줄어드는 토종 엉겅퀴가 아침이슬을 털고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은행나무길>
<엉겅퀴 꽃>
청풍정은 갑신정변으로 삼일천하를 누렸던 김옥균이 기생 명월이와 함께 숨어 들어와 은거하던 곳이란다. 절치부심하며 후일을 기약하던 중 명월이는 “선생과 함께 했던 세월들이 내 일생에 영화를 누린 것 같이 행복했지만, 소녀로 말미암아 선생이 품은 큰 뜻에 누를 끼칠까봐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청풍정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김옥균은 아침에 일어나 이 사실을 알고 주검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후
바위 절벽에 ‘명월암’이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하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고 온 것이 너무 아쉽다.
<대청호와 청풍정>
<청풍정>
돌거리고개를 넘어서는데 꽃이 활짝 핀 산딸나무가 반겨줄 때
“맑은 물 굽이굽이 휘돌아가고
비단 강 금빛모래 뛰어 놀던 곳
어미 소 한가로이 풀 뜯던 벌판
오봉산 소쩍새 가냘픈 울음소리
꿈에나 그려지는 아득한 고향”
석호(石湖)마을 유래 비에 적힌 시 한수 읽어본다.
<석호마을 유래비>
울타리 가에 자태를 뽐내는 인동초도 오월의 짙은 향으로 유혹한다.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낸 인동초는 한 가지에 하얀 꽃과 노란 꽃이 피어 금은화라 부르는데 수분(受粉)이 되기 전 모습은 하얀 꽃이고, 수분이 되면 노란 꽃으로 변신한다고 함께 한 도반께서 알려 주신다. 그 옆의 분홍색 인동초도 향이 짙어 갈수록 색이 더 붉어진다. 조경용인 원예종 무늬버들나무도 대청호의 아름다움에 한몫을 한다. 자연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350년 역사를 지닌 국원리(菊園里) 마을로 들어서서 국원삼거리를 지나 ‘큰엄마네 민박집’ 앞을 지나친다.
<인동초>
<무늬버들나무>
<국원리 마을비>
포장된 도로만 걸어오다가 마성산 가는 길로 접어든다. 고인돌 같은 너른 바위에는 “대청호오백리길” 표시가 앙증맞게 앉아 있고, 며느리재(Ⅰ) 올라가는 초입부터 경사가 급하다. 갈림 길에서 마성산 쪽으로 더 힘겹게 올라가니 또 며느리고개(Ⅱ)가 나온다. 아마 며느리 시집살이만큼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이름을 부르게 되었으리라.
<고인돌 같은 바위>
<며느리재 가는길>
<며느리재 이정표>
며느리재 남쪽으로 마성산 가는 길목에 늘티산성 표지석이 보인다. 삼국시대 산성인 늘티산성(300m)은 퇴뫼형(삼태기형)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150m이며, 아남 및 안내면 동북방향에서 금강을 건너오는 적군을 경계하고 며느리재를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라고 한다.
<늘티산성 표지석>
늘티산성 터를 지나 오르막길에 올라 나무 그늘이 있는 곳에 자리를 깔고 각자 준비한 도시락으로 요기를 한다. 앉은 자리는 약간 경사져 좀 불편하고 사람이 왕래하는 등산길이다. 다행이 식사하는 동안 오가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음식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개미가 극성을 부린다.
<며느리재2 이정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심하게 오르내리는 고개를 지나 마지막으로 마성산 급경사 길로 접어든다. 몸을 되도록이면 땅에 가깝게 하여 걸어가지만 경사가 심한 곳은 코끝이 땅바닥에 스칠 것 같다. 숨이 턱밑 까지 올라온 마지막 바튼 숨을 몰아쉬자 헬기장이 나오고 마성산(馬城山) 정상이 코앞이다. 정상에서는 사방이 시원하게 탁 트인다.
<마성산 정상 이정표>
마성산(409m)은 옥천군 군서면 수북리와 옥천읍 교동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옥천군 진산(鎭山)이다. 주민들이 말(馬)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말(馬)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금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이슬봉과 참나무골산으로 거의 반듯하게 능선이 이어져 일명 일자산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남서쪽으로는 육영수생가와 정지용생가가 있는 옥천읍이 훤히 보인다.
<마성산정상 표지석>
옥천읍 쪽으로 내려오는 길도 경사가 만만치 않다. 미끄러지지는 않았지만 미끄럼 타는 기분이다. 그나마 숲이 우거져 시원하고, 뻐꾸기와 휘파람새 등 새들의 노랫소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한때 토양을 “산성화 시킨다”는 오해 속에 수난을 겪던 자리공이 길옆으로 많이 자라고, 1960년대 초에 농업용 저수지로 건설된 교동저수지에는 조형물이 멀리 보인다.
<자리공>
<교동저수지 조형물>
산길에서 막 내려오자 규모가 제법 큰 한옥이 나타난다. 이집이 바로 전 박정희대통령 부인 육영수(1925∼1974)여사의 생가다. 이집은 1600년대 정승을 지낸 김씨가 처음 집을 지어 살았고, 이후 송정승과 민정승 등 3명의 정승이 살았다 하여 3정승 집으로 불리었다. 현재 가옥은 1894년경에 축조된 것을 재현한 것으로 조선후기 사대부가 사는 집의 구조와 규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육영수생가 안내>
육여사가 태어나기 전인 1918년 아버지 육종관이 민정승의 자손에게서 사들여 개축하였다고 전해지며, 99칸 집으로 대문에 들어서면 사랑채, 건너채, 안채, 뒤채, 행랑, 별당, 후원, 정자, 연못 등이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그후 1969년 현대건설에서 매입한 뒤 전면 개∙보수로 원형을 잃었으며, 1999년에는 철거되어 생가 터만 남았던 것을 2002년 생가 복원계획을 수립하여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2011년 5월 11일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육여사의 손때를 더듬으며 안채와 사랑채 등 울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시인 정지용생가로 간다.
<안채>
<석빙고>
<대형 뒤주>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8년 시인 정지용은 해금되었다.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인지 월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쓴 주옥같은 글들은 북한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 금서로 묶여 어느 누구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정지용 시비>
이 땅의 시인으로써 1930∼40년대 우리 민족의 모습을 문학적이고 아름다운 글로 표현한 사람이 정지용 외에 또 있을까∼. 정지용문학관 앞에 서 있는 동상이나 문학관 내부의 긴 의자에 앉아 계시는 모습은 오랫동안 묶여 있던 아픔 때문인지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표정이 여리고 굳어 있는 것만 같았다.
<정지용 문학관>
<문학관 내부의 정지용 상>
옥천 구읍에 자리한 생가는 초가삼간 겹집 같다. 김희갑 작곡 이동원 박인수 노래 ‘향수’와 채동선 작곡 조수미 노래 ‘고향’이란 노래가 안방의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는 것처럼 쓸쓸한 바람이 되어 맴돈다. 기왕에 정지용 생가에 왔으면 정지용의 생애도 한번 되돌아보고 주옥같은 시(詩) 하나라도 읊었으면 좋으련만 가는 길이 바빠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서리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처럼 허전하기 그지없다.
<정지용 생가>
첫댓글 이름 모르는 나무는 조경용 원예종 "무늬버들나무"로 밝혀졌습니다. 이쁘게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