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산(千佛山) 운주사(雲住寺)_ 산지 1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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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석탑
운주사 입구에서 내리면 오른쪽으로 운주사 600m 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10여 분이면 주차장을 지나 일주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제일먼저 높이 10m 나 되는 9층석탑을 보게 된다. 산 등성이 위로는 탑들이 보이고,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석불들이 여기저기에 분포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정통적인 의미에서 이곳은 풍수상으로 명당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지세로서는 풍수에서 명당으로 치는 자궁(子宮)의 형상이기는 하지 만 사찰이 들어설 만한 자리라고는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대개의 명산 사 찰과는 달리 큰 산이며 심원한 계곡도 없다. 그저 야트막한 구릉사이의 분지에 터를 잡아 놓았고 사찰 주변의 여기저기에 천태만상으로 세워진 석조물들은 전통적 기법보다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형상화해 내고 있다. '雲住寺" 와 "雲舟寺"는 같은 절 이름이다. (運 : 돌운 / 전체의 궤도 . 住 : 살 주 / 살다. 거처 . 舟 : 배주 / 배) 문제는 이 '運舟寺' 가 이곳의 풍수지리적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는 점이 다. 운주사의 창건 연대는 대체로 신라 말엽으로 추정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운주사 유적발굴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해무리굽현(도자 기의 파편을 지칭하는이름) 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의 일부가 강진의 도요지 에서도 발굴되어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학설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유물의 특성으로 보아 운주사는 신라 하대 ~ 고려 초에 창건 되었을 가능성이 고고학적으로 증명 되는 셈이다. 8~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절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운주사는 도선국사의 국토비보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운주사 창건설화 중 어떤 것은 색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이 있다. 즉 이곳의 터가 여자의 음부에 해당하는 곳이요 생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장차 제왕이 나올 군왕지지(君王之地)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선국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천불. 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맞지가 않는 이야기다. 도선국사가 어째서 군왕지지의 혈을 누르겠는가... 아무리 설화지만 하루만에 천불. 천탑 그 대공사를 어찌 할 수 있는가.
석조불감과 원형다층석탑
7층석탑 운주사에서 동편으로 멀지않은 곳에 있는 춘양면(春陽面)에 돛대봉이 있으니 이는 운주사에서 노를 젓고 돛대봉에 돛을 올린다는 생각의 반영이 되고 또한 일봉암(日封巖)도 가까이 솟아 있으니 이것은 천불. 천탑을 조성하는 동안 "산들이 해를 묶어 놓았다."는 전설을 글자에 나타낸 것이다. 당대의 일본은 끊임없이 이 땅을 침략하여 수많은 피해를 입혔다. 야만적인 왜구들은 산천이 좋고 문물이 뛰어난 우리나라를 항상 넘보았다. 생태적으로 너무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태풍이 오나. 지진이 있나. 그렇다고 먹을 것이 부족한가. 어느 모로 보아도 자신들이 사는 곳보다 훨씬 좋았던 것이다. 침략과 약탈의 근성은 그러니까 일본의 환경적 조건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경제대국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일본이지만 그동안 쌓은 죄가로 앞으로는 국운이 크게 흔들릴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일본의 경제가 충격에 휩싸이고 상대적으로 우리의 국운은 상승하고 있다. 경제에 조금은 고비가 있기는 하지만 잘 극복이 될 것이다. 도선국사의 당대만 하더라도 왜구들이 침입 침탈은 나라의 크나큰 우환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뛰어난 산천 정기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운주사와 그 일대의 천불. 천탑은 바로 이런 와중에서 비보책으로 조성된 것이다. 그러니 나라의 운세가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터가 바로 이곳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천년의 비밀을 신비롭게 간직하고 있는 운주사 터의 이런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제 어머나의 조국강산 품안에서 사라진 조각품들을 아쉬워 할 줄도 모른다. 이곳 일대의 천불. 천탑은 결코 도선국사가 도술을 부려 하룻밤 만에 세운 것이 아니다. 도선국사의 비보책에 따라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주변의 이름없는 민중들에 의해서 대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곳 일대는 광범위하게 암반이 분포되어 있어서 그 작업이 용이했을 것이며, 논에도 밭에도 계곡에도 산에도 모두 제멋대로 자유분방하게 세워진 것을 보면 나라의 기운을 잘 보존하고자 한 민중들의 염원이 철저하게 반영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륵 신앙도 접목되었을 것이다.
마당바위의 5층석탑
운주사의 주변 지세로 보아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이른바 도선국사의 "산천비보론"이다. 도선은 일찍이 풍수지리에 도통하여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로 추앙받는 분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국역풍수룰 이루어 놓았고 각 지역의 풍수적 헛점을 보안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즉 산천의 병든 곳을 치료해서 전국토를 완벽하게 유기체로 만드는 것이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다 같이 잘 살자" 이것이 곧 도산국사의 주장이었다. 유마경(維摩經 : 성스러운 유마힐의 설법이라고 이름하는 대승경전)의 주인공이 되는 유마거사(維摩居士 : 인도 바이샬리 성에 있었던 재가신도로서 부처님의 경지에까지 오른 인물)는 중생의 몸이 아프면 내 몸이 아프다고 했다. 도선국사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 그러니 국토의 어느 한 곳이라도 시원찮은 기(氣)가 감돌거나 또는 배치가 잘못되어 기가 새어나가 버리면 나라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선국사의 비보사상 이엇던 것이다. 즉 스님은 산천의 의사엿던 것이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의 지형 전체를 배(舟)로 보았다. 그런데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땅이 영남에 비해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항상 염려 하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금수강산 삼천리의 빼어난 정기가 배가 기울어지는 동쪽으로 흘러서 일본으로 가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그래서 호남에서 제일 적격지를 골라 천불. 천탑을 세운 것이다. 풍수적 생기가 가장 왕성한 곳. 영남의 무수한 산들의 정기와 맞겨를 수 있는 너른 들판의 생생지지(生生之地) 천불. 천탑으로써 맞겨를 수 있는, 영남의 산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운주사 일대였던 것이다. 이런 추정은 전해오는 전설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 및 도선국사의 일대기를 종합 정리해본 결과,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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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바위 7층석탑 / 칠성바위에는 직경 1m 나 되는 원형돌이 7개 있다.
신랑 신부 부처 와불(臥佛)
장차 다가올 미륵용화의 세계미래의 부처님이 와서 중생들을 구원해 주는 그 유토피아(Utopia : 理想的)를
기다리며 이 땅의 사람들은 고난을 참으며 지내왔던 것이다.
운주사의 명작이요, 걸작중의 하나인 누워계신 부처님이 일어나는 그날 미륵용화의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어온 것이다.
믓 새들의 조상들과 가믓없어이 흘러간 구름들.
비바람 폭풍우가 천군마마로 달려가리
피 묻은 창과 칼들이 이 땅을 휩쓸고 갔어도
묵묵무언으로 참아온 어머니 중의 어머니여!
온 겨례의 대망의 그날이 이제 다가오나니
지아비와 지어미는 천년의 잠을 깨어 다정히도 손잡고
일어나라 일어나라!
도선국사 827 ~ 898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사 / 성은 金氏 / 영암출신으로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중이 되었다.
도선은 승려로서 보다 음양 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졌다.
도선국사가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다.
875년(현강왕 1년)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 하였다.
도선은 옥룡사에 머문지 35년이 되는 때인 898년(효공왕 2년)에 세 수 72세로 입적하였다.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저서로서는 유명한 명당기(明堂記)가 많다.
[출처] 전남 천불산 / 운주사 천불. 천탑|작성자 summit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