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구영 목사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땅위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밝은 웃음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두 개의 대조적인 기사를 읽었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 유관기관에서 발표한 어린이들의 학대, 기아, 미아 현황입니다.
아동학대란, 몸에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는 신체적 학대와 불안과 공포감을 주는 정서적 학대와 어른들의 성적 희롱을 삼는 성적학대와 어린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교육, 안전, 그리고 보호에 무심한 방임적 학대라고 합니다.
1000명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9.2%(816명)이 이런 학대를 받았다고 말하였고 IMF 당시 98년에는 9292명이 부모로부터 버려졌고 99년에는 7692명이 버려졌으며, 2000년에는 7760명이 버려져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서울 아동보호센터의 통계에 의하면 2001년 한해에 부모를 잃은 미아가 468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수많은 어린이들이 부모의 학대와 부모에게 버림받고, 부모를 잃고 거리에서 울며 방황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보고서는 제한적인 보고일 뿐 세계적으로 본다면, 몇 백만, 몇 천만의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방임아래 눈물을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앙세계에 실린 어느 젊은 엄마의 수기입니다. 6살짜리 욱이가 "우리 교회" 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둥근 지구 위에 교회를 그리고 교회를 지키는 무장한 사람을 그렸습니다.
교회를 망치는 사람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욱이네 교회는 전세를 든 교회인데 건물주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전세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의 걱정하는 소리를 듣고 있던 욱이가 저금통을 들고 와 짤랑짤랑 거리며 "엄마 돈 있으면 교회를 살수 있어? 이 돈으로 교회를 살꺼야" 곁에 있던 아홉 살짜리 종식이가 1000원짜리 한 장과 500원짜리 동전을 꺼내 한참 망설이다가 천원권을 엄마에게 내 놓으면서 "엄마 이 돈도 보태세요" 하며 한숨을 쉬며 편안해지는 그 얼굴의 미소는 이미 내 애가 아닌 천사의 미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엄마는 조용히 이렇게 다짐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내 아이로 키우지 말자. 비록 지금은 내 손에서 자라지만 내 손 밖에서 살 아이다"
어린이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천사의 눈물과 천사의 웃음이 제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어린이가 등장합니다.
이사야 11장 6-9절의 말씀은 메시아 시대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메시아 시대가 열리면 자연의 친화적인 모습이 전개됩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해도 해됨도 상함도 없을 것인데 이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10:13-16절의 말씀은 어린이를 용납하신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 랍비들은 부녀와 어린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반대로 그들을 용납하시는 신선한 얘기입니다.
고난의 길을 향하고 계신 주님의 심정을 잘 아는 제자들은 주님을 보호해 드릴 충정으로 어린이들의 접근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분히 여기시면서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마가는 주님께서 분히 여기셨다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받으신 모욕이나 박해 때문에 분히 여기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오용되거나 인간의 복리가 짓밟힐 때는 분노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어린이를 용납하신 일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4 상반절에 보면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기시며 이르시되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셨고
이사야 11장 6절에서 보면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회에서 무시당하던 어린이를 용납하신 말씀이며, 서로 대립 관계이던 피조물도 서로 용납하는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용납은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큰 자신감을 심어 줍니다. 반대로 거절당하는 마음은 닫혀지고 좌절과 자신감을 잃게 합니다.
최근 교육 심리학에서도 교육의 효과를 가장 많이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책망" 보다는 "칭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어렸을 때 무섭고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예의 바르고 순종적이기는 하지만 창의성이나 용기나 자신감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요즘 많이 배웠다는 젊은 엄마들은 아이들의 기를 마음껏 길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사가 과하면 화가 되는 것입니다.
칭찬만 듣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책망이나 충고나 비판을 소화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꾸중을 듣고 자살을 하고 부모님의 책망을 듣고 가출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잘잘못의 판단이 무딘 염치없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몇 일전, 카드 빛 700만원 때문에 죄 없는 젊은 여인 다섯 명씩이나 살해하여 차에 싣고 다니다 붙들린 사람들을 두고 전문가들이 그 심리를 분석하기를 "도덕적 불안감을 가져보지 못한 이들이 일으킬 수 있는 일"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잘못하고 체벌의 불안과 고통, 가책과 반성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린이는 엽기적인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교육의 효과가 칭찬이냐 책망이냐 하는 것은 칭찬이나 책망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적인 애정에 있습니다.
책임적인 애정이 없는 칭찬은 어린이를 염치없이 만들고 책임적인 애정이 있는 책망은 어린이를 정의롭게 만듭니다.
여기 "금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새번역에는 "방해하지 말라"로 번역되었습니다. 주님께 나오기를 거절당하지 않은 어린이만이 천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둘째, 어린이를 천국의 주인 삼으신 일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4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자의 것이니라" 하셨고, 이사야 11장 6하반절에 보면,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말씀은 천국의 주체를 어린이에게,
이사야서의 말씀은 메시아 시대의 지도력을 어린이에게 둔 것은 서로 공통성이 있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허락은 어린이에게 희망을 심어줍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5학년 교사가 학급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래 어떤 생활을 하고 싶으냐?"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때 첫째가 부자로 살고 싶다. 둘째가 높은 사람되어 살고 싶다. 셋째가 편하게 살고 싶다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이들의 희망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의, 아니면 세상의 희망에 오염된 희망입니다.
반면, 교육학자 제임스 도브슨(James Dobson)은 6학년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시켰는데 "I wish" 즉 "이러 이러 했으면…" 하는 제목으로 글을 짓게 했습니다.
그 결과 뜻밖에도 1위로부터 5위까지가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에게 남자 친구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빠 엄마가 하나면 좋겠다." 등등 가정의 평화와 사랑에 대한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어린이들의 희망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의 아니면 시대의 희망에 상처 입은 희망입니다.
참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재물을 남겨 주지 못한다. 그러나 모르는 일에 부요하신 하나님을 너희에게 남겨준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영아세례를 받는 어린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남겨 주시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변하지 않는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남겨 주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교회 안에서 길러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길러야 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성장기간도, 교육기간도 매우 깁니다. 동물들은 나면서부터 걷고, 뛰고, 몇 가지 본능적인 먹이 습득 기술만 익히면 독립하지만, 사람은 20년이 지나야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고, 25년-30년이 지나야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장기간과 교육기간은 학교보다 교회와 가정의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어린이에게서 교회와 가정을 뺏을 권리가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주신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린이는 미래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주역이 되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의 변두리가 아니라 주인이 된 어린이는 천사의 미소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어린이를 천국 시민의 표준을 삼으신 일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5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만들지 아니하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어른들도, 때로 어린이들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본능적인 신뢰와 순종과 진실과 겸허가 있습니다. 아직 의심과 거역과 거짓과 교만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의 신뢰는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권위의 수락입니다.
어린이는 본능적으로 부모나 어른들의 권위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신임합니다.
어린이는 본능적으로 누구나 신뢰합니다. 아직 의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기억이 단순해서 원한을 품거나 보복할 줄 모르고 곧 잊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곁에 주신 천사들의 얼굴에 눈물이 아닌 웃음이 늘 있도록 주께로 인도하는 어머니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안에 영원히 변치 않을 용납과 수락이 있습니다.
어린이의 영성을 본받아 신뢰와 순종과 진실의 겸손의 영성을 지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