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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의 중요성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아모스 코메니우스는 《필요한 유일한 것》(Unum necessarium)에서 자신의 신앙관에 대하여 이렇게 답한 바 있다.
“누가 나의 신앙고백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사도신경을 지적하겠다. 왜냐하면 사도신경만큼 짧고도 간결하면서도 신앙의 핵심을 간추려 말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기도의 형태에 대하여 묻는다면 나는 주기도문을 말해 주겠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 문을 여는 최상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누가 내 삶의 방향성을 묻는다면, 나는 십계명을 말해 주겠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이외 그 누구도 이보다 더 낫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1)
짧고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온 세계 그리스도인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2세기경 초안이 마련되어, 수많은 공의회를 거쳐서 8세기 무렵 완성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이 안에 압축적으로 들어있다.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세 번째 조항에서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한다. 바로 그 대목에 잇대어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다. 이러한 고백은 곧 교회론이 성령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공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은 성령의 역사와 이어지는 것이다. 공교회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자의적 판단으로 축소될 수 없다. 우리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교회를 믿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우리는 교회의 몸을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 신앙을 함께 나누는 지체로서 교회의 존재를 인정하여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때와 공교회를 믿는다고 표현할 때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대하는 교회의 모습이 비록 엄청나게 실망스러울지라도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존재를 믿기에 그것이 우리 신앙고백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의 연속성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자유로운 행위를 약화하지 않으면서 제도 교회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론과 교회론: 교회 개념의 정의
스위스 종교개혁의 유산을 20세기에 가장 잘 접목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는 ‘내가 교회의 존재를 믿사오니’를 계속하지 않고서는 성령에 대하여 … 언급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우리가 성령의 사역 위에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확립하지 않은 채로 교회를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슬픈 일입니다. … 나는 성령을 믿지만, 교회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2)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어져 왔다. 따라서 인간적인 규범과 척도로만 규정되고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 안에서 교회를 지칭하는 개념을 생각해볼 때 구약성경에는 교회를 가리키는 직접적인 단어가 없다. 단지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지칭하는 “카알”(Kahal)이 근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인 공동체, 부르심에 응답하는 공동체를 뜻한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란 “에클레시아”(Ekklesia)로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구성원들은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 시작은 사도행전 2장에서 증언하는 성령강림의 집단 체험의 자리였으며, 다양성이 살아있고, 소통이 가능한 화해와 연합이었다. 교회의 시작이 성령에 의한 사건이라는 점이 핵심이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교회의 제도·관습들은 성령의 궁극적이며 종말론적 성격과 대치될 수는 없다. 종교개혁 신앙의 정수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교회의 개념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의한다. “유일하고 거룩한 교회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치며 성례전을 올바로 집행하는 성도의 회중이 교회입니다.”3)(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7조)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공교회
보편적 교회, 공동의 교회라는 의미의 공교회 개념을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는 가톨릭·정교회·개신교 세 부류로 발전된 교회 공동체를 지칭한다. 이는 서방전통과 동방전통을 아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개신교만을 뜻하는 것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많다. 교파를 막론하고 사용하는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사도신경에서 공교회는 영어로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로 표현된다. 개신교는 가톨릭을, 가톨릭은 개신교를 부정하고 비방하는 한국교회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표현은 로마가톨릭주의가 아닌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뜻한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혹은 개인적으로 사도신경을 뜻 없이 외우는 일을 지양하고, 21세기 한국적 상황에서 의미를 되새기며 진정한 고백으로 역동성을 불어넣으면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을 일상화할 필요가 있겠다.
개신교 신학에서 교회는 세례받은 사람들의 성사적 공동체라는 기본적 특징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어떤 가시적 요소도 하나님의 약속과 활동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한다. 교회는 스스로의 영역을 지키고 자전하는 데서 존재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 안에 동참하는 것으로 세상 가운데 존재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유를 교회의 활동과 결정에 예속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유보다 인간적 조건, 판단, 이념, 전통과 관습을 우위에 놓으려는 시도는 인간의 생각과 이상을 투영하여 하나님 예배가 아닌 우상숭배로 빠지게 할 위험성을 항상 내포한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자유를 증언해야 하며, 세례가 바로 그 자유를 선사하는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고, 두려움과 강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것이다. 그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예전을 진행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여기서 교회의 다양성이 생겨난다.
“교회의 참된 통일을 위해서는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인간의 전통 곧 인간에 의하여 제정된 의식과 예식이 어디서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4)(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7조)
전 세계 교회가 획일성을 지향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다는 공통분모를 갖고서 다양성 속의 일치가 필요하다. 다른 것에 방점을 두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교집합을 찾는 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치가 중요하다.
알곡과 쭉정이, 정통과 이단
정통과 이단 시비를 둘러싼 다툼과 투쟁은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아시타비(我是他非)적 접근 혹은 권력구조에 의하여 정의롭고 진정성을 지닌 소수 신앙인들이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고문과 형벌로 죽어간 사례는 무수히 많다. 따라서 누군가를, 혹은 한 집단을 이단으로 지목하는 일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돌아볼 때 자신들만이 순수한 소수의 신앙 공동체라고 주장했던 사례가 아주 많았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주의자들의 논쟁에서 구체적 사례를 볼 수 있겠다.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제국 안에서 기독교 교리를 정립해 나가는 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대에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과 관련하여 논할 수 있는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지리적 갈등, 상업과 농업으로 구분되는 계층 문제 등 당시 사회·정치·경제적 배경을 뒤로하고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살펴보면, 이 사안은 배교한 주교에 의하여 행해진 성례전의 정당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제국의 기독교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은 자신들에게만 신앙의 정통성과 순수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궁극적 심판을 인간 몫이 아닌 하나님의 일로 여겼으며 교회의 흠결성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개혁의 절정에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교회가 원래 성도들과 참된 신자들의 회중이기는 하지만, 현생에 있어서는 많은 위선자들과 악한 사람들이 신자들 가운데 섞여 있게 되므로 악한 사람이 집행하는 성례전을 받는 것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성례전과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주어진다 할지라도 효과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의 값어치에 따라 효과 있게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도나투스파(Donatists)와 이러한 유의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악한 사람들의 교직을 허용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악한 사람들의 교직은 무익하고 전혀 무효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5)(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8조)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나투스파를 상대하여 교회론과 세례론을 펼쳤던 것처럼,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훌드리히 츠빙글리는 공교회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 관점에서 언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의 책임과 결단, 행동을 언약 성취의 조건으로 보았던 재세례파의 공로주의와 달리 츠빙글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사상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의 빛 안에서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로서 행동이 수반된 믿음을 갖고 서두르며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완전할 수 없음을 겸허히 수용하여 인간의 의로움을 상대화하며 궁극적인 하나님의 의와 개입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기다림과 서두름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 속에 살아간다.
이탈리아의 왈도파, 체코의 후스파 뒤를 이어 개혁교회의 진정한 기틀을 놓았던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교회의 중요성과 가치를 말하였다. 신앙 공동체는 그 말씀을 사회 안에서 실현하며 공동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 16세기 스위스 상황에서 츠빙글리는 기독교공동체(Christengemeinde)와 시민공동체(Bürgergemeinde)가 서로 유기체적으로 관계하는 의식을 강화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충실하고 훌륭한 시민이며 기독교인의 도시란 기독교 교회와 다를 바 없다”6)라는 츠빙글리의 원칙을 다종교, 다문화 사회인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인 중 누구도 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용한 문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진정한 교회, 참된 교회는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지상의 교회가 지닌 불완전성과 한계성을 잘 표현하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초대 교부들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더욱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지상의 가시적 교회가 보여주는 오염되고 추악한 모습들을 분별하게 하며,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며 부족한 부분을 개혁하는 추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참 교회란 성령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아래 있으므로 인간적 한계에 가둘 수 없다.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긴박하며, 아름다운 것이다. 예배의 가장 근원적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며 믿음에 의한 일이기 때문이다.”7)
보이는 교회, 현재적 교회는 끊임없는 개혁과 갱신의 대상이다. 그래서 개혁전통은 개혁교회의 개념을 정의할 때 명사형으로 표현하지 않고, 끊임없이 개혁되어야만 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고 동사형으로 표현했다. 다른 말로 하면 개혁의 시도는 의무이며, 이를 행하지 않는 교회는 개혁의 의미를 담은 개신교라고 볼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진정한 교회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가 이 세상 문제를 등한시하게 하거나 조용하게 죽은 뒤 사후세계에 도달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앙 안에 교회를 종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세상을 영과 몸, 정신과 물질, 저승과 이승, 비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 하늘과 땅 등으로 나누어 이원론적 사고방식에서 전자를 고차원적인 것으로 보고 후자를 저차원적인 것으로 폄훼하는 영지주의적 시도 안에 교회가 물들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저급한 이 땅 안으로 꿰뚫어 온 하나님의 자기개입이자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이 땅은 더 이상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어 지나치거나 부정할 곳이 아닌 살만한 곳으로 회복되었으며,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본래적 본향은 하늘나라이다. 그래서 이 땅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본질에서 빗나간 부수적이고 주변화된 것으로 치부되기 쉽다. 교회의 사회참여를 말하는 일은 본질에서 이탈하여 본연의 자세를 망각한 일로 간주될 위험성이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교회에 부여된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승천 이후 예수는 비가시적인 존재로 비대면화되어 지역과 경계를 허물어 영의 임재로 교회의 터전을 세우셨고, 그것은 막힌 담을 뚫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불통을 소통으로 이어주는 관계의 원천이 되었다. 만약 예수의 존재가 팔레스타인에 지역적·물리적으로 국한되어 있었다면 교회는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없었을 것이며, 기독교는 세계 종교가 아니라 한 지방의 종교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교회는 이 땅 위에 살되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현실에서 살되 미래를 소망하며, 보이는 것을 구체화하되 보이지 않는 것을 품으며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 위에 임하였으나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기다림 가운데 우리의 책임성이 더욱 요청된다.
에큐메니즘의 의미
교회가 전 지구적 문제 상황과 위기 속에서 사회적·공적 책임을 수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계 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교회의 일치와 연합 운동을 통해 세계 평화와 화해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8년 세워졌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전 세계의 개신교 교회와 정교회를 아우르는 플랫폼일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도 학문적으로 함께 동참하여 협력하는 교회 일치와 연합의 운동체이다. 물론 세계교회협의회도 나름대로 한계가 있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근거 없는 가짜 뉴스의 확대재생산은 지양해야 한다. 1950년대 냉전체제 가운데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둘러싼 한국 장로교의 분열과 이념분쟁을 극복하고, 세계교회협의회 출현의 본질과 의미가 무엇인지 진정성 있게 되새겨야 할 때이다.
사도신경이 언급하고 있는 공교회의 개념 안에는 보편성과 거룩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것은 교파 차원을 뛰어넘는 세계 교회의 연대를 의미하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뜻하는 에큐메니즘(Ecumenism)이다. 에큐메니즘의 어원이 되는 오이쿠메네는 희랍어로 집, 우주를 뜻하는 오이코스(Oikos)에서 기인한다. 이 단어는 에큐메니즘에 관련될 뿐 아니라, 오늘날 기후위기 시대에 더욱 주목해야 할 지속가능한 개발에 내포된 생태를 뜻하는 에콜로지(ecology)와 경제를 지칭하는 이코노미(economy)에도 공통되는 개념이다. 이처럼 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은 세계적 지평 안에서 경제 정의, 생명 사랑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우주적 구원 지평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전통적인 공교회가 집중했던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하나님의 몸이자 우주 만물을 위한 집인 지구에 거하는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과 상호 연속성에 주목하며 관계의 폭을 넓혀나갈 필요가 있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기독인들에게 전 지구적 관계망 속에서 사람과 자연을 포함한 이웃 피조물에 대한 포괄적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영어로 가톨릭(catholic)이라고 표현되는 이 보편성의 의미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온 세계 교회가 성경에서 증언하는 예언자와 사도들로 이어지는 전통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 거룩성과 보편성의 기초는 우리를 위하여(pro nos) 우리 밖에(extra nos) 있는 신적 초월성에 기인한다.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인간 스스로가 거룩성과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보편성의 지평을 상기할 때 개교회이기주의와 분리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앙 동료들의 집합체로서 교회를 논할 때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 실천과 이어진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일요일에 국한된 행위일 수가 없고, 매일의 삶 가운데 이어져야 한다. 새벽기도, 수요, 금요예배 참여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 매 순간의 삶 자체가 예배여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의 근원적 목표는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을 증언하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칼뱅이 표현했듯이 이 세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대”(theatrum gloria mundi)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생활의 장소가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교회 안에 한정될 수 없고, 그 외연이 확장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질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강조했던 구약 예언자의 말씀은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21세기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앙 공동체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 5:21-24, 새번역)
예언자와 사도들 전통을 이어받은 제자의 사명을 이제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부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해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문 뒤에 숨어 그들만의 닫힌 공간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을 경험하고 난 뒤 이들은 당당하게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제자들은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 주님의 몸 된 지체로서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으며, 이는 이웃을 섬기는 구체적 사랑, 봉사와 실천으로 나타났다. 본래 1인칭 복수로 쓰였던 니케아 신조와 다르게,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1인칭 단수로 표현되었다.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은 곧 나 자신의 진정성 있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 의미 없이 옛 신조를 되뇌는 것은 영혼 없이 입술로만 되풀이하는 일일 뿐이다. 사도신경의 의미가 제자 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나서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도상 위의 교회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공동체이며, 이 세상 안에서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잔치를 미리 맛보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소유물이 아니며, 교회의 구성원에게 하나님 나라를 독점하고 선취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나, 이후 제도권 교회가 생겨났고, 사변화하고 기업화되었으며,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대기업화되기도 했다. 교회가 마치 하나님 나라 출입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천국행 티켓을 손에 받아든 “행복한 소유자들”(beati possidentes)과 그들의 멤버십을 관리하는 단체로 교회가 전락해 버리는 위험은 역사 안에 늘 존재해 왔다. 그러나 깨어있는 소수자들에 의하여 그 본질을 다시금 회복하는 운동 역시 늘 함께했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을 위하여만 존재하는 왕국이 결코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방법에 의하여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망하면서 기다리고,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서두르는 일이다. “교회는 기다리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러 나가는 것”8)일 뿐이다.
교회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우리에게 교회를 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인정하며 본질에는 일치로, 표현에는 자유로, 매사에는 사랑으로 마주해야 한다. 교회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 이전의 자리에 머물 뿐이며,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건설하거나 앞당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교회 공동체는 그 하나님 나라 운동에 함께하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전망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하게 한다. 그 안에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주님을 끊임없이 다시 못 박는 이 부조리한 지상의 교회는 비판적 개혁 대상이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 위에 임할 때까지 우리가 봉사하며 섬길 대상이지 거부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머뭇거리고 지체할 시간이 없다.
■ 각주
1) J.M. 로흐만 지음, 정권모 옮김, 《기도와 정치-주기도문 강해》(대한기독교서회, 1995), 6쪽.
2) 칼 바르트 지음, 신경수 옮김, 《교의학 개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195쪽.
3) 지원용 편역, 《신앙고백서》(컨콜디아사, 1988), 27쪽.
4) 《신앙고백서》, 27쪽.
5) 《신앙고백서》, 27쪽.
6) “ut iam dixisse olim non paeniteat, Christianum hominem nihil aliud esse quam fidelem ac bonum civem, urbem Christianam nihil quam ecclesiam Christiananm esse.” Huldreich Zwingli, “Complanationis Jeremiae(1531),” Huldreich Zwinglis sämtliche Werke, Edited by Emil Egli et al. (Zürich: Berichthaus, 1959), vol. XIV, 424. 20-21.
7) K. Barth, 《Gotteserkennentnis und Gottesdienst nach der reformatorischen Lehre》(Zollikon: Verlag der Evangelischen Buchhandlung Zollikon, 1938), 190.
8) 《교의학 개요》, 203쪽.
첫댓글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 위에 임할 때까지
우리는 봉사하며 나누며 섬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