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약탈했던 수많은 문화재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보물은 경기도 풍덕군 경천사 10층 석탑이었다. 1348년 고려 충목왕 때 세워진 석탑은 소재가 대리석이지만 정련한 기교 덕분에 옥탑(玉塔)으로 불렸다.
석탑탈취를 주도한 인물은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아키였다. 그는 1907년 1월 24일에 거행되는 황태자(순종)의 결혼 축하를 위해 일본 국왕 특사자격으로 한국에 왔다가 문화재를 강탈해 갔다.
다나카의 석탑 탈취는 조직적이고 대규모였다. 군대를 동원하여 아름다운 탑을 한 조각씩 들어내려 철도편으로 재물포까지 운반한 뒤 대기 중이던 배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워싱턴 포스트’(1907. 6. 2)가 보도했다.
군대가 아닌 총과 칼을 든 민간인들이었다는 설도 있다. (신한민보, ‘옥탑 탈거의 수말’, 1907. 7. 5, 7. 12) 어쨌건 다나카는 탑의 탈취에는 성공했지만 문화재 불법탈취를 강력하게 규탄하는 역풍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의 문명파괴적 야만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규탄하고 나선 사람은 고종의 외교 자문관이었던 미국인 헐버트와 영국인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이었다.
헐버트는 일본 고베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재팬 크로니클’과 미국 신문에 일본이 자행하는 약탈 행위의 본보기로 이 사건을 알렸다. ‘한국에서의 문화파괴‘ (재팬 크로니클, 1907. 4. 4), ’사라진 탑과 다른 사건들‘ (4. 18) 등을 잇달아 기고하여 일본의 문화재 침탈을 규탄했다.
미국 언론도 동조했다. 미국 주재 일본대사 아오키는 7월 2일자로 외무대신 하야시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미국 언론이 5월 19일부터 다나카의 절도행위를 비판하는 기사를 퍼뜨리고 있다. 다나카에게 뒤집어씌운 오명은 결국 일본에 비우호적인 여론 형성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 는 요지였다. 대표적인 예로 워싱턴 포스트(WP) 6월 2일자 기사를 첨부했다.
‘일본, 400년 후에 한국의 유명한 탑 절도에 성공하다’(1907. 6. 2)라는 제목의 WP 기사는 임진왜란 때 파고다 공원의 탑을 강탈하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일본이 드디어 이번에는 성공을 거두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문제의 탑을 그림으로 소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가 탈취하려고 상단 3층까지 해체했다가 가져가지 못했다는 파고다 공원의 대리석 탑과 일본으로 반출한 경천사 석탑을 나란히 대비한 것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경천사에 있던 옥탑을 찾으매 청산이 말이 없도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의 보배가 모두 동경박람회장이나 오사카의 고물상 물건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탄식했다.(1910. 4. 12)
일본에서도 다나카를 비판하는 신문과 잡지가 많았다. 국내외의 비난을 의식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와 2대총독 하세가와는 탑의 소유가 총독부임을 내세워 반환을 요구한 끝에 1919년 국내로 되돌려 왔다.
비운의 석탑은 긴 세월 경복궁 안에 방치된 채로 광복을 맞았고, 1959년에야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이듬해 원래 모습을 되찾으면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