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 25 성탄 주일 말씀 말씀/ 요한복음 3:16 독생자를 주셨으니 Merry Christmas 예수님이 성탄은 세상에서 어떤 기쁜 소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온 세상에 미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 서로 인사해봅시다. merry christmas 참 기쁜 성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런 세상에 살면서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나요? 요한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가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지난 주 얼요일 유달 동호회 색소폰 모임이 있었습니다. 모인 전에 제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보면 간단한 말씀이지만 여기에 아주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독생자. 주셨으니, 믿음, 영생... 이 중에서 제가 전하고자 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생각 해 보신분? 그러자 친구 박중용 목사님이 ‘주셨으니’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딩동댕. 어떻게 알았습니까? 김해영 목사님이 이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고 합니다. 와우! 그렇습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독생자. 영생... 그러나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영생의 길로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떤 역사든 살아있는 역사는 줌으로서 시작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주지 않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난 추수감사 메시지를 전하면서 아들이 사과 하나를 전해주자 아버지가 “감사합니다” 하고 받을 때 손이 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사 영생을 주고 하실 때 구체적으로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받게 되었고 알게 되었고 믿음을 갖고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탄의 기쁨을 이처럼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댓가 없이 주셔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아무 댓가 없이 공짜로 받았기에 기쁨고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내가 받은 기쁨,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주는 것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내 떡 내가 먹고 s 덕 네가 먹을면 될텐데 복잡하게 왔다갔다 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주지 않고 내 안에 머물러 고여있으면 썩게 됩니다. 흘러가야 증가 되고 깨끗해지고 발전 진보하게 됩니다. 그럴 때 기적도 일어나고 생명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난 주 누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를 이를 5살 영재 바이올니니스트 설요은 동영상을 보내주었는데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한글도 아직 깨치지 못할 나이인데 음악을 이해하고 음악 조표 기호까지 알고, 그 작은 손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파가니니처럼 연주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파가니니는 11살에 무대에 섰다고 하는데 요은이는 5살입니다. 바이올린이 좋으냐고 물으니까 바이올린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말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범으로 연주를 해봉더니 소리가 좋아야 아름답지 않느냐? 소리를 아름답게 내면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새까만 악보를 보며 연주하길래 복잡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복잡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연주는 알레그로인데 더 빠른 것도 있다고 합니다. 악복 해석까지 성인보다 더 잘 압니다. 절대 음감도 있어서 어떤 음악 소리도 들으면 그대로 고 재연합니다. 여인의 향기 주제곡 빠르고 강렬한 곡을 그대로 도# 레미레 합니다. 처음 듣는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귀가 없으면 못 듣고 모르는데 나는 귀가 있으니까 듣고 하는 것이라 합니다. 세 살부터 바이올린은 배웠는데 1년 후 네 살 콩쿠르 우숭, 5살 때 작곡도 20곡이상하고 모든 연주를 어려운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한다고 합니다. 글고 바이올린 외에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소아암에 걸린 아이들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아프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머리카락을 기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멀리를 길러 실제 기증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바이올린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냐고 물으니 바이올린을 할 때 행복하다고 합니다. 내 바이올린을 듣고 사람들이 행복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크리스티안 김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공연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득 찾아와서 함께 연주하는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연주자가 연주하는 그대로 따라서합니다. 나중에 엘가의 사랑의 인사 연주를 할 때는 병언의 어른 환자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 연주를 듣고 안 아팠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발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5섯살짜리가 이런 연를 하고,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 이건 하나님의 특별 은총 아니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살짜리가 아름다움, 행복, 나눔,긍휼이러 것을 압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자기 뱅성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삶을 살라고 이런 은사와 마음을 주시지 않았겠는가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던지 주면 아름답습니다. 어린 5살자리 요은이가 환자들을 위햇 연주를 들려주고 머리카락을 길러서 기증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무엇인가 줄 때 아름다운 역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열왕기 상 말씀을 큐티로 배우고 있는데 시대적으로 보면 17장은 아합왕이 그 아내 이세벨과 짝하여 바알 우상우상을 숭배를 하고 하나님의 선지가를 죽이는 그런 시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근도 심해서 물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엘리아도 핍박을 피하여 지내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를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내십니다. 과부에게 얻어먹으라는 것입니다. 엘리가 가서보니 돈 많은 과부가 아니라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었는데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자신과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 한 찢어지게 가난한 여자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먹고 죽으려는 그런 떡 하나를 얻러 먹으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엘리아는 두려워 말고 먼저 그것으로 내게 떡을 만들어 가져오면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여인이 그 말씁을 의지하여 순종합니다. 그런데 결과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어도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줄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니ᅟᅡᆮ. 즐 때 더 넘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풍족하고 부요한 자를 통해서 먹이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자를 통해서 먹이시려 하셨을까요? 지난 번에는 하찮은 까마귀를 통해서 엘리아를 먹이시더니 이번에는 가난한 과부를 쓰십니다. 결과 순종했을 때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게 믿음으로 순종하여 줄 때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디모데 전서 1: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여러분, 믿음 안에는 가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줘도 줘도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ᅟᅡᆮ. 저는 처음 이 준다는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대게는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저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도 할 때 주시옵소서를 잘 합니다. 주시옵소사! 그런데 언젠가부터 받는 것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아무리 많이 받아도 받는 것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행 20:35).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했습니다(눅 6:38).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께 나와 드렸더니 그것이 5 천명을 먹이는 기적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잠언서 30장 15절을 보면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다고 다고 하느니라 합니다. 'Give! Give!'하는데 족한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하 가난하다고 없다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어야 하겠구나? 주는 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인구나! 여러분 마중 물이라는 것아시지요? 한 되박 물이 남았는데 그것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뽐뿌에 아낌 없이 부어 넣습니다. 그리고 뽐뿌질을 합니다. 그러면 땅 속 깊은 곳에서 생수가 콸콸 솓아나옵니다. 사르밧 과부의 한음쿰 밀가루와 기름은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죽으면 죽으리라 먹지 않고 엘리야에게 주었을 때 기근이 그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콸콸 솟아났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과부가 배운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하심, 말슴대로 하면 된다는 믿음 아니겠습니까? 주는 것이 행복이구나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나누며 그렇게 사는 것이 몸에 배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는 것이 희생아 아니라 즐거움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주게 되면 우리는 행복을 맞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주는 것은 곧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고 사랑에 대해서 알아도 주지 않으면 아직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지 않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린 왕자 책을 보면 사막 한가운데 우물이 있는데 우물은 깊은 잠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병에든 생수많을 찾고 쉽게 물을 마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린 완자는 사막의 길을 걸어서 우물가로 갑니다. 가서보니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도루래 두레박, 밧줄... 왕자가 웃으며 줄을 만지고 도르래르ㄹ잡아단기니다. 그러자 바람이 오랫동안 잠들었다거 일어납니다. 낡은 바람개비가 삐꺽거리듯 도르래가 삐꺽거립니다. 그리고 어린 왕자가 아저시에게말 합니다. 우리가 우물을 갱웠더니 우물이 노래를 불러...이이야기는 좀 다른 방향의 이야기 이지만 작은 관심을 가질 때 잠들었던 우물이 깨어나고 그렇게 해서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려 마시는 물이 얼마나 맛있는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ㅅ고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어림 왕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막을 걸어서 땀흘려 왔고 히들여 도루래를 내려 우물을 깨우고 깊은 곳에 길어올려 마시는우물은 보통 음료주솽 다르다는것입니ᅟᅡᆮ. 그 물은 별빛을 받고 걸어온 발걸음과 돌래의 노래와 내 팔의 노력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선물처럼 마음을 흐믓하게 하였다. 관심을 주고 받을 때 한모금의 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사랑은 단지 감각적이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살아있는 것을 주는 것이다.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즉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행동감을 고양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받으려 주는 것이 아니지만 남에게 주는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 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기 안에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어떤 모양이던 그에게 다시 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는 것은 생산적인 생명의 활동이다. 준다는 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게 한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아는 사람은 계속 주고 나누게 되는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계속 움켜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던지 가만히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썩고 흩어집니다. 그런데 작은 것이라도 주는 것은 신기하게 무엇인가를 탄생케 합니다. 주는 자 받는 다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심으로(요한 3: 16) 믿고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행복을 누리게 되었고,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또 사랑을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는 능동적 활동입니다. 주고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기도하지만 너와 나 사이에 생명의 강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강이 있는 그곳에는 생명이 자라고 기쁨이 넘칩니다. 저는 최근 큐티 말씀을 섬기면서 우리 교회가 우주적으로 사랑과 생명의 말씀을 먹이는 비죤을 보았습니다. 엘리아를 먹인 까마귀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까마귀가 되겠다고 하시는 분이 많아서 흐뭇하기도하고 감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주는 사랑에 대해서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기에 무엇이든지 있으면 나누어 주려고합니다. 그러다보니 택배도 많이 보내게 되고, 택배를 받는 사람이 친정아버지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지난번에는 택배를 받아들고는 친정 아바지는 아니고 고향 어머니가 보내즌 것같은 느김을 받았습니다. 김치 된장 고춧가루 깨소금, 영양제, 일회용행주까지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받아보네 하였습니다. 은영 집사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저뿐 아니라 울산의 박창준 목사님. 김태구 목사님까지 주의 종들 쌀과 여러 가지를 섬겨주시는 것을 보며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렇게하니 다들 나도 까마귀가 되겟다고 합니다. 저는 우주교회 가마귀 군단을 창설해야 하는가 했습니다. 주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정말 은혜입니다. 무엇인가 주다는 것을 단지 그것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떽쭈베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장미 한송이를 전해 줄 때 그것은 꽃만이 아니라 그 손에 향기가 묻어있다. 꽃만 아니라 사랑이 있고, 괌심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도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독자 아들 예수를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시 것입니다. 이번 성탄에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신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생명의 꿈틀거리고 사랑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모두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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