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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조선대부고 조이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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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산행후기 재경조대부고 조이산악회 제279차 인왕산 산행결과(공지)
정종수(15회) 추천 0 조회 312 24.04.15 03:56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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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4.15 05:26

    첫댓글 김경준 기행문 -- 조이산악회279차 산행 인왕산(仁王山)을 다녀와서...

    279차 조이산악회 산행은 서울의 산 인왕산(仁王山)이다.인왕산(仁王山)으로 가는 길목인 독립문5번 출구가 오늘 산행 시작의 집결지란다.독립문역5번 출구앞에 산악대장 김민수후배가 조이산악회 깃발을 들고 있고 그옆에 안형순회장님이 벌써 부터 나오셔서 조이산악회 선후배 동문들을 맞이하고 있다.

    거의 한날 만에 만나는 기쁨 마음으로 더러는 악수로, 더러는 뜨거운 포옹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정겨운 장면이 연출되었다.인왕산으로 가는 길에 먼 발치에 독립문(獨立門)이 서있다.독립문(獨立門)은 독립 정신을 높이기 위해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서 세운 문이다.옛날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迎恩門)'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 말에 독립협회라는 단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더 이상 다른 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래서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새로 세웠다.

    서재필은 직접 프랑스의 개선문 사진을 보고, 이를 참고하여 독립문의 모양새를 직접 본따 그렸다고 한다. 1895년부터 독립문 건립을 위----

  • 작성자 24.04.15 05:40

    ---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하였고, 외국인 건축가를 영입해와 1896년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에 독립문이 세워지게 되었다.원래 독립문은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무악재로 가는 길을 넓히면서 서쪽방향으로 옮겨졌다.원래 독립문 자리에는 중국황실의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迎恩門)이 있었다.

    영은문(迎恩門)은 1407년에 조선 태종이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왕보다 높여 지성(至誠)으로 천사(天使)를 섬겨야 한다"는 사대주의적인 입장에서 조선으로 내려오는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건립한 대형 문이다.

    태종이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루(慕華樓)를 세우며 함께 건립한 문으로, 이후 중국 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慕華館)까지 영접 나오는 것을 상례로 삼도록 하였다.독립문역 앞에 우리 근세사 역사에 고난과 아픔의 흔적이 뒤밤벅이 된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자리잡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1910년 한일합방 전(前)인 1908년 10월 개소한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감옥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가장 악명 높은 감옥으로도 알려졌으며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가 이곳에 수감되어 고문을 당해---

  • 작성자 24.04.15 05:45

    ---야만 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임시의정원의 의원 여운형, 독립열사 유관순 등도 이곳에서 모진 수감생활을 했다.이제 오늘 산행의 목적지인 인왕산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인왕산(仁王山)은 서울이 분지로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仁王山)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산의 높이 338.2m이며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인왕사(仁王寺)라는 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조선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으로 불리우다가 세종때 부터 인왕산(仁王山)으로 불렀다.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身)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는 뜻에서 서산을인왕산(仁王山)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 이성계가 개경(開城)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궁인 경복궁을 어떤 방향으로 할 것인가? 를 두고 신하들간에 일대 격론이 벌어진다.주산(主山)을 북악산으로 하자고 하는 정도전파가 있었는가 하면,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자는 무악대사파로 나눈다 ---

  • 작성자 24.04.17 04:58

    ---격론 끝에 북악산을 주산(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기로 하고 정궁인 경복궁을 짓기로 한다.만약 그때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앉혀다면 한양의 서울 풍경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르면 좌 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기세(氣勢)가 우 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의 기세가 강하다고 보았다.그래서인지 좌청룡의 낙산 기세의 약함을 보(補)하는 의미에서 동대문에 해당하는 흥인문 사이에 없어도 괞찬을 의(之)자 끼워너어
    흥인지문(興仁之門)이이라 명명했다.

    남대문은 그냥 숭례문(崇禮門)으로 지었지만 동대문의 경우 흥인문(興仁門) 아니라 흥인과 문사이에 없어도 무방한 갈지(之) 하나 더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었다.더욱 흥미로운 것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북악산을 중심에 두고 좌 청룡 낙산은 장남에 해당하고 우백호인 인왕산 차남에 해당돼어 서울에서 장남보다 차남의 기세가 강해 장남보다 차남이 더 똑똑하고 잘랐다니 당시의 풍수지리설의 오묘함이 흥미롭다.

    서울의 정궁인 경복궁이 결정되고 동서남북을 아우르는 성벽을 쌓는 것을 두고 태조의 국사인 ---

  • 작성자 24.04.17 05:03

    ---무학대사와 당대 최고 유학자인 정도전 또 한번 대회전(大會戰)이 벌어지는데 무학대사는 인왕산의 선바위을 성안으로 하여 지금의 무악재을 연결하여 성을 쌓자 하고 정도전은 지금의 한성성곽을 축성 선으로 하자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다.

    선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데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禪’자를 따서 '(禪선바위)라 불렀다몇달 동안 옥신 각신 싸우다 겨울철 어느 날한성 축성이 미궁에 빠지자 태조 이성계가 기발한 제안을 한다.

    겨울철이면 눈이 내리는데 지금의 한성을 따라 눈이 때리면 그선을 따라 축성을 하고 선바위 밖으로 눈이 내리면 禪(선바위)를 안으로 하여 성을 쌓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그 결정이 내리고 그 다음날 신하로 부터 지금의 성의 선을 따라 눈이 내렸다는 보고를 접하고 그 선을 따라 한성(漢城)을 쌓으라는 어명이 내려져 지금의 한성이 선바위을 밖으로 하여 한성을 쌓았다'고 한다.

    당시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조선개국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하게 되었는데 무학대사의 불법(佛法)보다 유학을 기본으로 한 정도전의 논리 정연한 주장을 이겨낼 도리가 없어 판판히 당하고 만다.

  • 작성자 24.04.17 05:09

    ---어떻게 보면 불교로 상징되는 무학대사가 주자학의 유교에 밀렸다그래서 조선초기의 나라를 태조 이성계의 나라가 아니고 "정도전의 나라" 라고 일컬케 돼었다.정도전은 유교의 신념아래 4대문 4소문을 건립케 하고 편액을 만들어 태조에 품의한다

    조선 건국 초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뒤 한양 방위를 위해 성곽을 쌓은 뒤 동서남북에 문을 만든다. 이는 정동의 흥인지문(동대문), 정서의 돈의문(서대문), 정남의 숭례문(남대문), 정북의 숙청문(북대문, 1523년 이후 숙정문으로 개칭) 등 4개 정문이다.

    사소문은 조선 시대 도성인 서울 성곽의 4개의 작은 성문이다. 동북의 홍화문, 남서의 소덕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경회루 대조전뿐만아니라 조선왕궁의 모든 전각의 이름인 편액(扁額)을 정도전이 지었다고 하니 정도전의 학문의 위세와 권위를 가름 할 수 있다.

    독립문역에서 인왕산을 오르다 보면 국사당을 맞이하게 된다.인왕산 국사당(仁王山 國師堂)은 원래 남산(南山)의 산신(山神)인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는 산신당(山神堂)이며 나중에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가 봉헌되었다.

  • 작성자 24.04.17 05:22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사(神士)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인왕산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이 국사당(國師堂)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남산인 면목산 정상에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을 병탄(倂呑)하고 지금의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에 민족혼(民族魂)을 빼앗고 일본 정신을 강요하기 위한 장소로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짓고 일본황실의 신들께 제사를 올리게 되는데 남산의 정상에 국사당(國師堂)이 조선신궁을 내려다 보고 있지 않는가?

    (일본에 가면 신사(神社)가 헤일 수 없이 많는데일본에서 조상이나 고유의 신앙 대상인 신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일반신을 모시는 사당이 신사(神社)이고 일본놈들이일본의 죽은 왕이나 왕족의 시조를 모시던 제단인 신궁(神宮)이 있다.

    그러니까 일본놈들이 조선을 삼키고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만들고 아애 일본 수도를 서울로 옮기려는 음흉한 계획이였는데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폭격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해 일본의 수도를 서울로 옮기는 계획이 산산 조각이 났다. 그것도 아주 씨언 씨언하게...! 원폭탄을 처음에 동경과 교도을 까부시로 했는데 맥아더가 만류했다고 한다. 아주 나뿐놈! 그때 토교와 교도를 처부서--

  • 작성자 24.04.17 05:28

    ---불었으면 아조 좋았을 것을....) 이것을 보고 기분이 상한 일본 총독은 국사당(國師堂)을 인왕산 서쪽 자락으로 옮기게 했다. 그래서 국사당(國師堂) 이 인왕산 산자락으로 사실상 쫓겨나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니 민족의 굴욕사(屈辱史) 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조이산악회 깃발을 앞세우고 인왕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때는 춘삼월(春三月) 이라 강남 간 제비가 돌아오고 개구리 울어대는 봄향기가 물씬 풍기며 속절없이 핀 복숭아 꽃 복숭아는 도화살(桃花煞)과 색기 (色氣)가 있다고 🍑해서 제사상에 올리지 못하는데 산자락 이곳 저곳에서 복숭아꽃이 만발했다.

    서울을 품은 한양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에 "잠정등록"되있지만 아직 본등록이 지연되고 있다.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발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장사진(長蛇陣)으로 흡사 시골 장날 가는길 같다.저 앞에 인왕산 정상인데 오르고 내리는 길이 꽉 막혔다.

    인왕산 가는 길이 이처럼 막히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이렇게 지체하다가 점심 예약을 한 오후 1시에 예약한 식당에 도착이 어려워져 집행부 안형순회장님께서 "인왕산 정상을 오르는 것은 시간상 무리이고 날씨도 여름철---

  • 작성자 24.04.17 05:38

    ---처럼 무더워 그만 산길 옆에 자리를 펴고 홍어회에 막걸리 한잔 파티를 열기로 한다" 고대결단을 내렸다.그래서 비탈길 좁은 장소에 베낭에서 홍어무침이며 막걸리를 꺼내 접시에 담고 동행한 이기수 부인께서 마련한 미나리 무침과 적색포도가 펼쳐졌다.

    인왕산까지 짊어지고 온 막걸리, 홍어회무침, 미나리무침, 적색포도의 진가가 빛을 발하고 있다.짐을 지고 올라온 무거운 어깨와 수고하는 손길에 축복이 함께 있으라.."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조이산악회 회원이 대동단결 한가족이되어 화합과 단결을 이루었다.

    차희준 전임회장과 문병국총무가 이룬 조이산악회의 중흥(中興)의 역사와 전통이 안형순회장님과 성용호사무총장으로 이어지고 발전하고 있흐뭇하고 자랑스럽다.홍어회무침에 막걸리 한컵을 걸친 후 하산길에 나섰다.하산길은 무악재로 향하는 지름길을 택해서 인지 금방 내려온 것 같다.

    무악재 "서대문영양족발본점" 음식점에는 벌써 부터 일찍 도착한 조이회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이어서 상 위에는 소주 막걸리에 영양족발이 푸짐하게 차려지고 안형순회장의 건배 제의에 따라 축배를 들었다 --

  • 작성자 24.04.17 05:42

    ---- 이번 인왕산 산행에 최연장자로 참석한 15회 안종윤공학박사의 환영의 말씀이 계셨다.11회 안태호선배님(82)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번 산행에 참석하지 못해 송구(悚懼)하다는 말씀과 조이산악회 회원들간에 화합과 사랑으로 단결해 주실 것을 당부하고 다음 산행에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의 메시지를 전해왔다.고마운 일이고 조이산악회 최고 연장자다운 자세다.

    이어서 이번 산행에 처음으로 나오신 동문들 소개가 이어졌다.김준 재경조대부고 총동창회 전임회장님의 격려사도 있어 만장(滿場)
    의 박수를 받았다.신임 지도부 회장과 사무총장 등 임원진이 출범 후 더욱 발전되고 화합과 단결을 이룬 모습이 자랑스럽다.성공적으로 산행을 마친 안형순회장님과 성용호사무총장 그리고 임원진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다음 5월 둘째주 일요일 산행은 청계산이라는 공지를 끝으로 4월 조이산악회 인왕산 산행 행사를 마쳤다."막는 것 산이거든 무는 곤 못가랴!" 진취와 창조정신을 앞세운 조대부고 선후배 동문들이여! 그대들 앞에 행복과 행운이 함께하리---- 김경준 댓글에서 정종수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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