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몸과 맘에 모시려면 하나님을 몸과 맘으로 불러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부른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찾으므로, 나는 하나님을 부른다. 내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내 존재와 삶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고 거룩하신 분이고 나보다 내게 더 가까운 분이다. 내 속의 속이며 나를 깨우고 세우는 분이다. 나를 무한히 자유케 하고 무한히 열어 주고 우주의 생명의 중심에 세우는 분이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분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른다. 흘러가는 무심한 강물이나 말없는 바위를 통해서, 들꽃이나 새의 기쁜 삶을 통해서 그리고 고통받는 이웃의 신음소리와 다정한 님의 말을 통해서 그리고 성서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부른다.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내 속을 열어서 비워야 한다. 내 속을 열고 비우면 하늘 바람, 생명바람이 통한다. 하나님을 부름은 하나님의 생명을 숨쉼이며, 영을 숨쉼이다. 하나님을 부르지 않으면 말라죽고 썩는다.
마틴 부버의 말대로 하나님이란 말에는 수 천 수 만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한숨과 눈물과 염원 그리움,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부를 때는 정성으로 불러야 한다. 하늘과 땅이 울리게, 과거와 미래가 울리게 불러야 한다. 믿으며 사는 이는 몸으로 혼으로 존재와 삶의떨림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체험의 종교다. 생명의 힘과 원천인 하나님을 부르며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내가 살아난다. 하나님을 참으로 부르기만 하면 허무와 죽음과 죄에서 벗어나 모두 함께 사는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을 참으로 부르면 서로 살리고 더불어 사는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하나님'에는 밝고 따뜻한 삶, 크고 하나인 삶에 대한 조상들의 염원과 생명의 님이신 '한님'(하나님)에 대한 한겨레의 그리움과 공경이 담겨 있다. 정성을 다해 진실하게 하나님을 부르면 우리 조상들의 간절한 염원과 신앙적 영성이 우리 속에서 살아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혼, 인격, 뜻이다. 우주 안에 인간보다 높은 인격과 혼이 있다고 믿는 믿음이, 적어도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위해서는,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맞서, 허무와 혼돈, 무의미와 퇴폐에 맞서 하나님을 부른다. 정의와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하나님을 불러 모심으로써 서로 죽임의 세계에서 서로 살림의 품을 열고, 어둠의 세계를 밝히는 등불을 켠다. 하나님을 불러 모심으로써 우주적인 빛과 생명의 원천을 우리 속에 모시어 들인다. 하나님을 믿음은 하나님을 모심이고 하나님을 모심은 삶에 대한 절대 긍정이며, 있는 그대로의 삶에로 돌아감이다.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생명은 창조자 하나님의 은총과 서로 통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솟는다.
흙처럼 자아를 비우고 겸허한 이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 창조자가 흙으로 사람을 지어서 생기,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흙 가슴만이 하나님의 생기, 숨을 모실 수 있다. 흙 가슴은 회개하는 마음이다. 하나님 앞에 자기자랑과 욕심을 버리고 겸허하게 흙 가슴이 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품어야 한다. 흙 가슴으로 하나님의 생기를 품으면 하나님의 생명이 싹트고 자란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흙처럼 겸허하지만, 온 천하보다 크고 존귀하다. 우주보다 크고 하늘의 별보다 높은 분을 모셨기 때문이다. 동학에서는 사람이 하늘이며,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고 가르쳤고 강증산은 사람이 하늘(이념)이나 땅(물질)보다 더 존귀하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서의 말씀과 19세기 민중종교의 사람존중의 가르침은 서로 통한다. 온 우주의 창조자와 주인인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우주를 창조하고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우주 생명의 중심인 하나님 안에서 인간은 새로워지고 우주생명의 중심에 선다.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우주생명의 중심에서 그리고 우주생명진화의 끝에서 허무와 죽음을 넘어서 불의와 죄악에 맞서 서로 살리는 생명운동을 펼친다.
우주생명의 중심이고 내 존재와 삶의 중심인 하나님은 또한 내 존재와 삶의 참된 바깥(초월)이며, 나와는 참으로 다른 존재이다. 나와는 다른 분이기에 말 걸고 만나고 사귈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제 안에 갇혀 사는 이는 제 눈으로만 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other)과 '다름'(difference)을 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 그에게는 '자아'를 위해 굴절되고 왜곡된 '너'와 '다름'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독백(monolog)만이 가능하고 '나와 다른 남'과의 대화와 사귐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부름은 내 존재, 내 삶의 바깥에 있는 생명의 님을 만나고 사귐이다. 나 홀로 살지 않고 더불어 삶이다. 더불어 살 때 신명나고 기쁘고 보람있다. 하나님을 부름은 하나님과 이웃의 다른 생명을 인정함이다.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메마른 나의 감옥에서 벗어나 너의 생명을 인정하고 너와 더불어 있다. 하나님을 부름은 이웃의 삶을 인정함이다. 하나님을 부름은 이웃과 더불어 살려는 결단이며 행위이다. 하나님을 부름은 새로운 공동체적인 삶에로 나감이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에게 열린 존재다. 자신을 열고 자신을 남에게 내어놓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존재이고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셨으므로 나의 삶이 소중하다. 나는 과거와 미래에 매이지 않고 오늘 나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하나님을 소중하게 모신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힘껏 살기에 하늘과 땅과 자연의 삶에 두루 통한다. 들꽃과 하늘의 새의 삶을 느끼고 이웃과 우주의 삶에 통하는 '하나'인 삶, 존재의 편안함과 여유를 지닌 삶을 살 수 있다.
첫댓글 하나님을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게 하소서!
요즘 나무잎을바로보고 있노라면 봅에는 다름을 모르던 잎사귀들이 너나 할 것없이 다 다름을 나타내고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매일 그 잎사귀들속에서 노래하는 하나님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