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비(士)’라는 말은 사대부(士大夫)의 사, 즉 아직 대부(벼슬아치)가 아닌 관료의 예비군을 이른다. 조선의 양반은 문반(文班)이든 무반(武班)이든 벼슬해야 하는 업보를 타고났다. 농사도 공장(工匠)도 장사도 할 수 없으므로 먹고 살려면 관직에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벼슬하지 않은 선비는 벼슬을 위해 계속 공부하는 것이 업(業)이다. 그런데 스스로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과거를 보지 않거나 일찌감치 접고, 그렇게 평생 살게 되면 처사(處士)라 불리는 것 같다.
상곡 최천주(上谷 崔天柱)란 분을 다산 선생은 최 처사라고 하였다. 벼슬을 거부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으나 자신의 강직한 성품으로는 관직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벼슬했다면 84세까지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을 견디거나 이겨나가는 슬기가 필요했을 것인데, 이분은 그것을 해내신 것 같다.
상곡(上谷)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공은 휘(諱)는 천주(天柱), 자는 자안(子安)이요, 학자(學者)들이 상곡선생(上谷先生)이라 불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먼 조상인 아(阿)는 고려 때 시중(侍中)이고, 10세 조상 철(哲)은 판도판서(版圖判書, *호조 판서에 해당)를 지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증조는 휘가 덕란(德蘭)이며 진사로, 명종(明宗) 때 세 차례 상소하여 불교를 배척하였으며, 조부의 휘는 적주(的周)이다. 아버지의 휘는 망지(望之)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강직함으로 미움을 받아 벼슬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조양 임씨(兆陽林氏)다.
공은 1615년(광해군 7)에 나서 향년 84세로 죽었으며, 죽은 지 다시 1백 년이 되었다. 그의 현손(玄孫) 종운(鍾運)이 그 고을의 선비와 벗들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것으로 행장을 지어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내가 받아서 읽어보니 공은 군자였다. 아버이 섬김에는 효도하고 자신의 출세에는 담백하며, 명예를 피하는 데는 용감하고, 자취를 숨김에는 확실하며, 물(物)을 취함에는 잘라내듯 하고, 사람 관찰함에는 엄격하며, 행보(行步)가 법도에 맞고, 행동거지가 예(禮)에 들어맞으니, 군자가 아니고서 이러할 수 있겠는가?
부모의 상에 죽을 마시며 여묘(廬墓) 살이 한 것이 6년이었다. 몽산(蒙山) 아래에 여묘의 터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효행을 알 수 있다.
소시적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친지(親知)가 모두 축하하였는데, 그 시권(試券)이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님을 보고는 관에 신고하여 그것을 버렸다. 한번은 회시(會試)를 보러 가서 이름난 문장가가 지은 문장을 얻었는데, 그 벗에게 주면서, “네 문장이 아직도 졸렬하니, 이 작품과 부합하지 않는다.”하고, 스스로 써서 주었으니, 출세에 담백함을 알 수 있다.
경전(經傳)에 마음을 다해 노력하여 저술한 바가 매우 많았다. 하루는 고을 사람이, 공의 학행(學行)을 들어서 책임지고 나라에 추천하려 의논하였다. 그러자 공이 쓴 글들을 죄다 가져다 불태우면서, “남겨 두면 장차 나에게 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오직 《소경차의(小經箚疑)》 몇 장만 불타지 않았을 뿐이니, 명예와 자취에는 아예 마음에서 끊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고을에서 명망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공이 그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주인이 새벽에 사당에 참배(參拜)하러 가려 하면서 하인을 꾸짖으며 세숫물을 대령하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공이 그가 과시하는 것을 알고 말없이 돌아와서 다시는 가지 않았다. 내현(奈峴)에 사는 우씨(禹氏)는 큰 부자로서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1671년(현종 12)의 흉년에 공에게 곡식을 주니. 공이 “친분이 없는데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고는, 사양하고 돌려보냈다. 여기에서 엄하고도 확실하게 잘라냄을 알 수 있다.
공이 젊었을 때 운암 이흥발(雲巖 李興渤) 공의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만년에 더욱 학문을 좋아하여 한결같이 학문에만 뜻을 두고 익혔다. 인산(麟山) 아래에 산림과 시냇물이 그윽하면서도 탁 트인 곳에, 공이 서재(書齋)를 짓고 손수 송죽화목(松竹花木)을 심어 놓고 소요하고 읊조리며, 자제들과 손들과 벗들과 강학하며 도를 논하였다.
사람을 교육함에는 반드시 《소학(小學)》ㆍ《대학(大學)》으로 가르쳤는데, 교수 방법은 간략하면서 온화하고, 요약하면서도 두루 살폈다. 그러므로 공에게 나아가 배워서 재목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얼마 뒤에 당(堂)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져 다치자, 제자들에게 명하여 짐을 꾸리게 하면서, “돌아가자. 내가 오늘 걷다가 쓰러졌으니 곧 죽게 될 것이다.”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과연 두어 해 만에 몰하였다. 죽음에 임해서는 혼모(昏耄)함이 더욱 심하여, 집안 사람을 손[賓]으로 여겨서 반드시 옷을 가다듬고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았으니, 여기에서 공의 품행을 볼 수 있다.
부인은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니 부(府)의 서쪽 몽산(蒙山) 인좌(寅坐)의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3남을 낳으니, 맏이는 익(䋚), 다음은 기(紀)인데 문과에 합격하고 정랑이며, 다음은 유(維)이다. 1녀는 이 옹(李顒)에게 출가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명예는 피할수록 더욱 뒤따르고 / 名辟彌隨
풍모는 멀어질수록 더욱 생생하네 / 風遠彌憶
가지가 무성하게 잘 뻗어나니 / 支條孔暢
뿌리를 돈독히 한 힘이로다 / 敦本之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