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읽기 墓誌銘⑹: 그 누구의 삶이 쉬우라
묘지명을 읽노라면 절절한 슬픔이든 희미한 애틋함이든 비애감을 느끼게 마련인데, 이 묘지명은 약간 화가 난다. 육촌 아우의 아내? 내게도 육촌이 있을까? 그마저도 상여의 처 최씨로만 남은 여자의 일생이 그렇다. 자진(自盡)했다. 남편을 따라간 것인지 집안의 형편을 고려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마뜩잖다. 21세기인의 시선일 것이다. 며칠 사이 한 사람이 대중의 시선을 받다 사라졌다. 한 당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등장했다. 30대 워킹맘 군사·우주전문가. 최소한 셋은 잡으려고 임명했을 것이다. MZ세대, 여성, 국방과 안보. 누군가가 사생활을 털었다. 터는 편을 째려보았다. 그러다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알려진 사실에 이쪽에도 저쪽에도 그랬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의 인식이었으리라. 그러다 이 글을 작성하는 즈음, 다시 신문기사 하나를 접했다. 외도와 성폭행은 너무 멀지 않은가. 19세기라면 몰라도 21세기에? 그럼에도 다시 여러 생각들이 잡스럽게 얽힌다. 19세기에도 21세기에도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남의 인생에 대해서 쉽게 예단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지만 쉽지가 않다.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예단하지 말라!
절부 최씨의 묘지명(節婦崔氏墓誌銘)
“절부 최씨는 나의 재종제 상여의 아내이다.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내가 장기로 귀양 갔는데, 상여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서로 작별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상여가 상중에 너무 슬퍼하고 또한 문족이 기울어짐을 염려한 나머지 슬픔과 근심으로 병이 나서 그해 11월 1일에 죽었다. 절부는 예로써 곡하고 효금정치의 상구와 여각포해의 전물을 친히 마르고 장만하며, 물과 장을 입에 넣지 않으면서 이것이 예라고 하므로 집안 식구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성복한 그날 밤에 그 방에서 소리가 나므로 촛불을 가지고 비추어보니 절부가 목매어 죽어 있었다. 그의 품에 든 것을 꺼내다가 글 하나를 얻었는데 그 글에, ”조금 더 연명하려 하였으나, 시가의 가난함을 생각하여 매장에 두 번 노구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아, 정렬하도다.
그의 죽음에 시아버지가 곡하며 슬퍼하면서 말하였다. “너를 모르는 사람은 네 정절이 훌륭하다 말하고 그 효행은 모른다. 옛날 네 시조모가 이질을 앓을 적에 네가 우리 집에 시집온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다. 네가 부축하여 측간에 오르고 부축하여 측간에서 내려오며, 죽과 미음을 가려서 먹이고 이불과 베개를 편안히 하여 누이며, 변기의 오물 씻어내고 옷에 묻은 더러운 것을 닦아내는 등 하루에 40~50차례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네 시어머니가 때때로 그 일을 하려 하면 네가 ‘힘드는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고, 유인도 너를 편안하게 여겼다. 아, 너는 효부로다.” 이미 합장하고 나서 일향의 선비가 의논하기를, “정상여의 아내처럼 정절과 효행이 있는데도 민몰되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수치이다.” 하고, 장차 관가에 신청하려고 상여의 아우 규건이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한다. 내가 말하였다.
“옛날 선조 교리공의 상에 목숙인이 순절하였다. 조정에 정문을 세워주기를 청하려는 사람이 있자, 우담 선생이 말하기를 ‘그만두라. 까닭 없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바른 의리가 아니다. 절렬을 표창하는 것은 문호의 복을 기르는 것이 못 된다.’ 하여, 드디어 그만두었다. 내가 또 어찌 감히 글을 지으랴. 그 사실을 적어 광중에 넣게 한다.”
절부는 그 선대는 강화 사람이다. 6세조 수는 관찰사이다. 상여의 휘는 약착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정절이 이미 빛나고, 효행 또한 드러났네. 조그마한 이 봉분은, 절효부 최씨의 무덤이네(節婦崔氏者, 余再從弟象如之妻也. 辛酉之春, 余謫長鬐, 而象如有母之喪, 不與別. 旣而象如毀甚, 且念門族廢矣, 悲憂成疾, 以仲冬一日死焉. 節婦哭之以禮, 絞紟䞓緇之具, 餘閣脯醢之奠, 親自裁庀, 唯水漿不入於口, 曰此禮也, 家人莫之疑焉. 旣成服, 夜有聲出其室, 執燭而視之, 節婦縊而死矣. 發其懷, 得一書, 書曰: “欲少延, 念舅家貧, 葬薶無再勞也.” 嗚呼, 烈矣, 其死也! 舅哭之慟曰: “不知汝者謂汝節, 而其孝不知也. 昔先妣權孺人之病痢也, 汝歸我秪一年, 扶之上圊, 扶之下圊, 抄粥糜以啗之, 安衾枕以臥之, 濯牏穢, 撋衣汚, 日四五十次不怠. 汝姑欲時爲之, 汝曰‘不知其爲勞也,’ 而孺人亦於汝乎安焉. 嗚呼,汝孝婦哉!” 旣合葬, 一鄕之士議之曰: “有節孝如丁象如之妻, 而使泯不彰, 吾輩之耻也.” 將申于官, 象如之弟奎建請余爲文. 余曰: “昔先祖校理公之喪, 睦淑人殉焉. 有欲請綽楔于朝者, 愚潭先生曰: ‘止. 無故殉夫, 非義之正. 節烈表揚, 非所以養門戶之福.’ 遂止焉. 余又何敢文?” 爲之紀其實, 以納其壙. 節婦, 其先江華人. 六世祖【琇】, 觀察使也. 象如諱若鑿. 銘曰: “節旣皭矣, 孝隨以章. 此封者尺, 是唯節孝婦崔氏之藏.” 『여유당전서3』, 문집Ⅱ, 3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