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림 시인 약력
1947년 경북 문경 출생
1989년 『문학과비평』 봄호에 「굴욕의 땅에서」
외 9편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2005년 랜덤하우스중앙
시평집 『울어라 내 안의 높고 낮은 파이프』
나무, 사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질기게 견디면
나무 둥지 속에 염통이 생기고
쓸개가 생기고
고요히 흐르던 연둣빛 수액이
뛰노는 붉은 핏물이 되는 걸까
얼마나 멍하니
얼마나 머엉하니, 기다리면
수십년 붙박혔던 뿌리가
저리 겅중거리는 발이 되는 것일까
아직 나무였던 시간들이 온 몸에 무늬로 남아있는데
제 몸이 짐승이 된 줄도 모르고
자꾸 허공으오 가지를 뻗는 철없는 우듬지를 그대로 인 채
저 순한 눈매의
나무가
한 그루 사슴이 되기까지는
상자들 8
그러니까 나는 그 상자들의 도시에서 한 상자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다시 쬐끄만 상자들을 낳았던 거죠
날 새면 눈도 코도 귀도 없는 괴상자들이 막무가내 배달되어 왔죠
깨알만한 것들이, 집채만한 것들이
물렁물렁한 것들이 딱딱한 것들이
필시 수세기를 달려왔을 그것들이
엄마 엄마 부르며 벌컥 벌컥
문을 열어 젖혔죠
그 때 나는 매일 부엌에서 그것들의 먹이를 만드느라 바빴죠
그것들이 자라 낙타가 되고 치타가 되고 악어가 되고 물뱀이 되어
꼭 저 같은 것들을 뒤집어쓰고 어디론가 떠날 때까지
이런 봄날 하릴없이
잿빛 허공에 귀를 대고 있으니
목울대를 늘이고 귀신 소리로 우는 그것들의 울음이 들리네요
그러면 문득
앞뜰을 뽀얗게 뒤집어쓰고 때 이른 목련이 솟구쳐 오르죠
글쎄 저 앙바툼한 나무 한 그루가 함뿍
희디흰 이파리 나풀거리는 여린 상자들을 매달고 달그락거리는 거리잖아요
낙타... 치타... 악어... 물뱀... 들이 가지마다
글쎄!
어이 가방 !
길을 건너는데 등뒤에서 누가
어이 가방 ! 하고 불렀다
가방장사 삼년에 그는 비명 한번 못 지르고
가방이 되어버렸다
서류가방이 지나간다
륙색이 지나간다 여행용 트렁크가 굴러간다
어슬렁 악어가 지나간다 보도를 쿵쿵 울리며 들소가
뛰어간다 유모차를 끌고 구렁이 한 마리 지나간다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사용처가 분명치 않은 가방 하나가
신호가 바뀌는 줄도 모르고 비척 온다
사방에서 호루라기 소리
똔똔 삐삐 어디론가 타전하며 여, 여보세요
지퍼가 고장났다니까요 걸을 때마다
속이 줄줄 새요, 손잡이가 떨어져서 들 수도
없다니까요 자꾸 실밥이 뜯어져요
납작한 둥그런 정육면체의
슈트케이스 서류가방 마약밀매 가방
시체운반 가방……
어느 궁창에서 다 떨어진 가방 속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늙은 수선공
고장난 지퍼 고칠 염도 못낸 채
'어느 걸 내다 버릴까?'
걸친, 엄마
한 달 전에 돌아간 엄마 옷을 걸치고 시장에 간다
엄마의 팔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팔을 꿰고
엄마의 목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목을 꿰고
엄마의 다리가 들어갔던 구멍에 내 다리를 꿰!
고, 나는
엄마가 된다
걸을 때마다 펄렁펄렁
엄마 냄새가 풍긴다
―엄마…
―다 늙은 것이 엄마는 무슨
…
걸친 엄마가 눈을 흘긴다
비둘기들
네 식구였다
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을 훑고 다니고
하나는
안전선 밖에서 종종거라고
하나는
뜨거운 레일 위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푸득
날아 건너편으로 가고
하나는
제 집인듯한
전철 플랫폼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빠알간 맨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