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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묵상글 들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 인간에게 좌우되지 않는 비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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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인간에게 좌우되지 않는 비결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소낙비를 그대로 다 맞듯이 오늘 다윗은 저주의 비를 그대로 다 맞습니다.
그런데 비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다 맞으면 그런 비는 어떤 비일까요?
재앙일까요? 은총일까요?
더럽힘일까요? 씻김일까요?
고등학생 때 매우 감상적이었던 저는 비 맞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일부러 비를 맞았는데
그때 저는 제가 씨기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감정 샤우어를 한 겁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죄가 씻기는 그런 느낌은 아니고
감정의 정화였던 것 같습니다.
옛날 유행가에 '눈물을 감추고'라는 노래가 있었지요.
울고는 싶지만 눈물은 보이고 싶지 않아 비에 젖어 우는 내용입니다.
가사 중에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쓰라린 가슴에 고독이 넘쳐 넘쳐
내 야윈 가슴에 넘쳐 흐른다.'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 노래 가사처럼
비에 젖으며 감정에도 젖었던 것인데 그 감정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젖으면
다시 말해서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면 긍정적인 것이 되는 겁니다.
은총도 내가 부정하면 부정적인 것이 되듯
재앙도 내가 긍정하면 긍정적인 것이 되고,
적어도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게 됩니다.
오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받습니다.
시므이는 분명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저주를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들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저주는 저주가 되지 않습니다.
시므이는 저주를 퍼부었지만 다윗에게는 전혀 저주가 아닙니다.
저는 소음에 아주 민감합니다.
어디 가서 시계 소리가 나면 시계를 아예 떼어버리고
냉장고 소리가 들리면 냉장고를 꺼버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할 때는 쇳소리, 기계 소리가 엄청나도
소음 그 한가운데로 들어가니 소음이 도무지 소음이 아니였습니다.
거부하거나 피하지 않고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이렇게 됩니다.
저주도 거부하지 않으니 저주하는 사람만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갑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한 인간의 행위로만 보지 않고
그 행위 뒤나 행위 안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불행이 인간에게 좌우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자신의 행불행을 의탁하는 뜻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여기에는 나의 행불행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겠다는 의지도 있습니다.
인간의 저주나 비난에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 비결이
하느님께 완전한 의탁에 있음을 다윗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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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로,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 5,2)
이제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서 마귀들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은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고 저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그리스도의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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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그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만남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처음에는“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때를 기다리며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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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요한 보스코
오늘 독서에서는 다윗 왕조가 왕자 압살롬의 반란으로 흔들리는 이야기를 들으셨고, 복음에서는 군대 마귀에 들려 미쳐 버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제 정신을 차리도록 해방시켜 주신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또한 오늘 전례에서 교회가 기억하는 인물은 요한 보스코 사제입니다. 그는 19세기 가난했던 이탈리아 사회에서 가정에서는 물론 학교에서 받아야 할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가 작은 범죄들을 저질러 감옥에 드나드는 청소년들을 보고 시대적 소명을 느껴 투신한 인물입니다.
요한 보스코 자신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탓에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과 독실한 신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는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낙인찍은 청소년들을 그만큼 더 따뜻하게 돌보아야한다고 여겼고 또 그리하면 그 청소년들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라토리오’라는 성가대를 만들어서는 청소년들과 함께 어울리며 노래도 하고 운동도 하며 기술 교육도 시키고 학교에도 보내는 청소년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그가 7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오라토리오 출신 사제가 천 명을 넘어설 정도로 그의 청소년 교육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평소에 존경하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이름을 따서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게 된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의 이런 삶과 활동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자면 최근의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는 1968년과 1979년에 총회를 열어 공의회의 정신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논의했는데,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과 어린이 청소년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함을 결의한 바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 보스코는 이보다 2백 년이나 앞서서 예수님의 활동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일생동안 헌신했던 혜안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요한 보스코가 가난한 이들과 청소년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바탕은 주어진 현실의 사회적 맥락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을 눈여겨 보았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사랑은 모래알처럼 제각기 흩어져서 살던 사람들을 찰흙처럼 단단히 뭉친 공동체로 변화시켜 놓습니다. 이른바 공동체성입니다.
요한 보스코처럼 예수님의 정신이 제대로 머리에 박힌 가톨릭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가 살거나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내어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노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신앙의 기운이 지닌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모래알갱이처럼 흩어져서 서로 죽기 살기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분위기를 신앙인이라면 숨막혀서 답답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공기를 자유스럽게 호흡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서만 신앙인은 마음껏 숨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기에 부하들을 전쟁터에 내보내 놓고서 부하의 아내를 탐내기도 했고, 이런 불륜을 보고 자란 아들을 아버지로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해서 끝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문제아 압살롬은 사랑받지 못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청소년과도 같습니다. 이 상태는 마치 마귀에라도 들린 사람처럼 천방지축이요 제멋대로이며 문제투성이에다가 사고뭉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릇 모든 악은 작은 죄가 벌려 놓은 틈바구니로 들어오는 법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가난한 청소년들 역시 사랑과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어서 그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부모들이 저마다 제 자식들만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자라나는 세대를 돌보려는 책임을 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 보스코 사제가 던지는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청소년을 돌보는 일은 모든 어른들의 공동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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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 가짜 뉴스가 너무 많다고 합니다. 뻔히 보이는 거짓인데도 이를 굳게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연구진은 어떤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더 맹신하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일반적인 사람보다 분노를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이 가짜 뉴스를 더 잘 믿고 더 쉽게 퍼트린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노하게 되면 더 쉽게 속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분노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분노하면 상대방만 보고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출발해서 역으로 과거로 들어가게 되면서 분노를 더 키우게 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람들의 분노는 매우 커졌습니다.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면서 불평불만이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이런 분노가 가짜 뉴스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맹신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분노를 하게 되면 얼른 그 분노를 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분노를 더 크게 만드는 내 분노에 동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 판단을 제대로 못 하게 할 뿐입니다. 가짜 뉴스를 진짜 뉴스와 구분할 힘도 잃게 됩니다.
분노 없이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또 분노가 생겼을 때, 그 분노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분노에서 벗어나야 참 진리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진리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분노를 예수님을 향해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구해주십니다. 더러운 영이 들어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셨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문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구해주는 과정 안에서 재산 피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악령들이 돼지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 고장 사람들이 기르던 돼지들이 모두 호수 안으로 빠져 죽고 말았지요.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시오.”
아마 사람들은 분노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더러운 영에서 자유로워졌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재산의 피해만을 보면서 분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저 사람이 건강해진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야? 왜 우리가 손해를 봐야 하는 거야?’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예수님을 쫓아냅니다.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을 쫓아낼 수 있었을까요? 분노가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 혹시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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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날 때는 화를 내야 할 대상을 바꿔라. 화내야 할 대상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의 자제력이다.(B.칼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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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진다는 것(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헤르만 헤세의 멋진 글입니다. 어디에서 여러분은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그 행복을 찾은 사람만이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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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님이 중국에서 의주, 평양을 거쳐서 한양으로 왔던 이야기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내용이 생생하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845년이면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님은 25살이었습니다. 영하 20도가 넘는 길을, 눈이 허리까지 쌓인 길을 신발도 벗고 12킬로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캄캄한 밤에 걸었다고 합니다. 오직 기댈 곳은 하느님이기에 묵주를 돌리고 또 돌렸다고 합니다. 겨우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마중 나오기로 한 신자들과는 만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지치고, 지쳐서 거의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신자들을 만났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발은 동상에 걸렸고, 한양에 도착해서는 보름동안 몹시 앓았다고 합니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한국인 첫 번째 사제요, 순교자입니다. 생각해 보니 성인이 걸은 길은 언제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성인은 가시밭길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았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왕, 이스라엘을 통일했던 왕 다윗이지만 그의 길도 꽃길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에 나가 승리했지만 그 때문에 사울 왕의 질투를 받아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충실한 부하를 전쟁에서 죽게 하였고, 부하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다윗은 깊이 뉘우쳤고, 뉘우치는 다윗의 기도는 시편에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제가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교회는 고인을 위한 연도에서 다윗의 기도를 바칩니다. 고인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천국으로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합니다.
31년 저의 사제생활을 돌아보면 대부분 꽃길이었습니다. 보좌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 사목국 3년, 연수 3년, 청소년국 1년, 성소국 5년, 평화신문미주지사 3년입니다. 추운겨울이면 따뜻한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더운 여름에도 시원한 사제관에서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 어디를 찾아가기보다는 늘 교우들과 함께 다닐 수 있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강론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이 있기에 본당 재정에 큰 신경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교구에서는 1년에 한번 피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동창신부들도 많았습니다. 미국 뉴욕으로 올 때 비자 신청도 평화신문 본사에서 서류 준비를 다 해 주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의 재정에 어려움이 있지만 아직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꽃길을 걸으면서도 때로 짜증내고, 걱정하고, 불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덧 2022년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가시밭길일지라도, 꽃길일지라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2월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대라고 불리는 마귀였습니다. 수천의 마귀가 사람을 괴롭혔으니, 사는 것이 힘들었을 겁니다. 삶 자체가 가시밭길이었을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고, 마귀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마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전하였습니다. 가시밭길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꽃길이 주어진다면 좀 더 겸손하게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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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穩全한 사람
- 주님을 중심中心에 모시고 사는 성인聖人 -
누가 온전한 사람입니까?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성인입니다. 성인은 일부 영적 엘리트가 아니라 믿는 이들의 보편적 성소입니다. 누구나 온전한 성인으로 불림받고 있습니다. 참 기쁨과 참 행복도 온전한 성인의 삶에서 나옵니다. 누가 온전한 사람입니까?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한 3실의 사람입니다.
감사와 감동과 감탄의 3감의 사람입니다.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을 우선순위로 하는 사람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인내와 절제, 그리고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이 영적으로 건강한 성인들입니다. 참 온전한, 건강한 사람은 이렇게 영혼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영혼이 튼튼할 때 육신도 뒤를 잇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 성인이 그러합니다.
요즘 자주 가톡 전송중 수도원 십자로의 예수님 성심상 사진과 더불어 전하는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예수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참으로 온전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19세기 북부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으로 ‘젊은이들의 사도’라 칭하는 살레시오 수도회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 사제가 그러합니다. 만72세, 당시로 보면 천수를 누린 성인입니다. 성인에 대한 일화도 참 풍부합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성인의 어록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산업화라는 격변기 속에서 빈곤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몸소 실천한 교육자이자 영성가이며 뛰어난 저술가였던 성인의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오늘 성 요한 보스코 축일을 맞이하여 살레시오 수도자들을 축하하며 드린 말씀도 좋았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의 아버지이며 스승인 이 위대한 성인을 생각한다. 그분은 자신을 경당敬堂에 가두지도 않았고, 자신의 것들에 갇히지도 않았다. 그분의 특징적인 창조성을 지니고, 젊은이들을 찾아 거리로 뛰쳐나갔다.”
성 요한 보스코의 후예이자 ‘수단의 돈 보스코’라 일컫던 살레시오 수도회의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의 삶도 감동 그 자체입니다. 암투병중 임종직전에 성 요한 보스코를 꿈에서 보고 간병하던 살레시오 수도회 수도자들에게 “Everything is Good!(모든 것이 좋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습니다.
성 요한 보스코, 이태석 세례자 요한 수도사제 두 분 모두 예수님을 닮은 참 사람, 온전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에 접근합니다. 복음에서 게라사의 더러운 영에 들린 미친 사람과 제1독서의 다윗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완전히 소외되고 버림받은 처지입니다. 주석일부를 소개합니다.
“압살롬 아들의 반역으로 어둠속에 떨어진 다윗이다. 그는 울면서 머리는 산발한채 맨발로 올리브 산을 울면서 걸어갔다. 시므이는 그를 저주하며 돌을 던진다. 여기서 다윗은 게라사의 미친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 다윗 역시 그의 아들, 신하들, 그의 왕직으로부터 비극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어있다.”
외관상 비슷하지만 내용은 천지차이입니다. 다윗의 대죄에 대한 보속의 수련이 참 엄혹합니다. 이런 회개에 따른 보속의 시련을 통해 참으로 비워지고 겸손해진 다윗이었을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꾿꾿이 한결같이 견뎌내는 다윗의 인내와 겸손이 놀랍습니다. 바로 주님은 다윗의 이점을 주목하셨을 것입니다.
이래서 대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성 다윗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이 다윗을 교육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주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자리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진짜 더러운 영에 들려 미쳤을 것입니다. 마지막 다윗의 말마디가 그의 하느님 믿음을 입증합니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말한후 부하들과 계속 고난의 피난길에 오릅니다. 반면 복음의 게라사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중심 부재의 사람들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마음의 중심 자리에 주님이 자리하지 않을 때 악령이 자리잡게 되고 공동체에서 소외된, 버림받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태하고 약한 인간들인지요! 미치거나 자살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생존경쟁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자니 병도 많고 폐인이나 괴물도 많고, 자살자도 많습니다. 참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며 참사람 찾아 보기고 힘든 시절입니다. 이 모든 궁극의 원인은 중심에 주님을 모시지 못한, 중심 부재의 결과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침내 빛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더러운 어둠의 영들은 축출되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구원되어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일꾼이,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이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온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해달라는 청을 거절하신후 제 삶의 자리로 복귀시킵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러나 유비무환의 지혜가,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리기 전, 내 삶의 중심에 마음의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사실 이런 영성훈련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처방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어둠의 더러운 영들을 말끔히 쫓아내시고 당신의 생명과 빛, 영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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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센 돌풍이 이는 호수를 건너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도착하십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며, 곳곳에 무덤이 있고,
유다인들에게는 부정한 돼지 떼가 방목되는 지역입니다(이사 65,4 참조).
‘군대’라고 불리는 더러운 영은 아무도
휘어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러한 더러운 영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는
엎드려 절하며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간곡히 청하여
돼지들에게 들어가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던 더러운 영 ‘군대’는,
돼지들이 호수로 달려가 빠져 죽음으로써 결국 파멸하고 맙니다.
그렇게 이 부정한 지역에서 마귀의 세력이 사라지고,
이제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집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에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들의 고장을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반면에 치유받은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은 열두 제자의 특징이고 사명입니다(마르 3,14 참조).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가족에게 알리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치유받은 이는 물러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자기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요르단강의 동쪽에
자리 잡은 열 개의 도시, 데카폴리스 지역에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가 복음 선포로 이어집니다.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이민족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이 사건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는 어떠한 경계나 제한이 없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의 복음 선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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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그런데 이 지방의 본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구세주이신 주님을 대하는 주민들의 처신에 대한 예언적 암시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참조: 마태 8,34; 마르 5,17; 루카 8,37).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그 사람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썩은 시체로 악취를 풍기는 무덤에서 산다. 이 세상의 영광을 약속받았던 자가 그곳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또한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는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 하시자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몰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들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들을 막으셨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인간들에게도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이 돼지들을 소유할 힘이 있었다면 인간을 소유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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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 8)
지나온 길 모두
은총이었습니다.
허상이 지배하던
우리 삶을
당신 빛으로
치유하여 주십니다.
더러운 영을
추방하심으로
가짜의 삶이 아닌
진짜의 삶으로
되돌려놓으십니다.
자녀들을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람의 정체는
언제나 사람입니다.
치유와 정화는
다채로운 색깔속에서도
한가족으로 살게하는
주님의 힘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우리 아닌 많은 것들이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지극한 힘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십니다.
예수님과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 만나면
조용해집니다.
너무 많아
너무 시끄러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더러운 많은 것을
비우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더러운 영이 아니라
맑은 영으로 살게 하시는
지극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자신이 만나면
모든 것은 다시
고요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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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귀들과 돼지 떼>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마르 5,6-10).”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마귀 들린) 사람과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마귀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자기를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쫓겨난 마귀가 가야 할 곳은 ‘지옥’입니다.
‘지옥’은 원래 사탄과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입니다(묵시 20,3).
그래서 ‘지옥’은 마귀들도 무서워하는 곳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흉내 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라는 말은,
당시에 구마자들이 마귀를 쫓아낼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한다.”
라고 말하는 것을 흉내 낸 말입니다.
마귀는 원래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말은,
쫓겨나는 것을 피하려고 애원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진실을 왜곡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쫓아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은,
그것의 정체를 밝혀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마귀는 자기들의 수가 많아서 이름이 ‘군대’ 라고 말하는데,
‘군대’ 라는 이름은 그것들의 단결력과 폭력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귀의 이름이 ‘군대’ 라는 점에서 ‘군사독재 정권’이 연상됩니다.
지금도 일부 국가에서 군사독재 정권이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인권을 탄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군부의 모습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1-13).”
마귀가 예수님께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은,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없다면 짐승들 속에라도 있게 해 달라고,
즉 지옥으로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루카 8,31).
왜 돼지였을까? 마침 그곳에 돼지 떼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마귀의 간청을 허락하셨을까? 그것은 모릅니다.
돼지들은 왜 집단 자살을 했을까?
말 못하는 짐승들이긴 하지만, 돼지들은 마귀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고,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돼지들은 마귀를 거부했는데, 게라사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17절).
게라사인들은 마귀와 함께 사는 것이 별로 괴롭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4-17).”
여기서 ‘겁이 났다.’ 라는 말은,
게라사인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무서워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보다,
그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을 더 무서운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는 “떠나라고 요구했다.”,
즉 “쫓아냈다.”입니다.
게라사인들이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한 것은, 예수님이 무서워서,
재산 피해만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생활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싫어서 등으로 해석됩니다.
(은총이 내린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은총이 내렸을 때 그 은총을 온전히 받게 됩니다.)
예수님 덕분에 그 지역에서 마귀가 제거되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그 지역은 ‘빈 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 집’으로 방치하면
처음보다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진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12,43-45).
마귀가 제거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을 성령으로 채우지 않고 ‘빈 집’으로 방치하면,
악령이 들어와서 자리 잡게 됩니다.
게라사 지역도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데(18절),
그 요청은 제자로 삼아 달라는 요청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돌아가서 ‘예수님의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이
그에게 더 적합한 ‘성소’ 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일은 ‘복음 선포’는 아니고, 나중에 그 지역에 복음이 선포될 때를
대비해서 사전 작업을 한 것과 같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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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아분열에서 통합으로 가는 길♣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불결한 곳으로 알려진 이방인 지역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시어(5,1. 20)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곳은 더러운 영들이
출몰하는 무덤들이 산재했고(5,2-5), 방목하는 돼지 떼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곳까지 가셔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족쇄와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했습니다(5,4-5).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고통과 시달림이 얼마나 컸을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5,9).
군대처럼 많은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상태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뒤틀리고 자아가 심하게 분열되었으며 그 결과 이웃과의 관계 또한 어긋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상태가 곧 자기소외를 체험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이 사람은 예수님께 더러운 영을 내쫓아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그에 맞서 스스로 물리칠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떠나가게 해주시자 그는 그분께 “함께 있게 해달라”(5,18)고 청합니다. 분열되고 뒤틀렸던 그의 자아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회복되고 통합된 것입니다. 자아회복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며 영적 성숙입니다. 자아통합은 예수님께로 돌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나에게도 뒤틀림과 무사 안일함이 깊이 스며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 안에서 뒤틀림은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내 삶의 주인이요 삶의 길이며 목적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야 이런 뒤틀림이 없이 자아가 통합되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원의식을 뚜렷이 지녀야겠지요.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행동하면 자아는 분열되고 영혼에 어둠이 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의 결핍인 ‘대충주의’는 ‘뒤틀림’의 한 양상입니다. 무엇이든 기도 안에서 헌신적으로 하지 않고 적당히 편의 위주로 처리하고, 형식적이고 무사 안일한 태도로 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뿐 아니라 실천 없이 모든 것을 영성이라는 말로 함축시켜버리는 ‘순영성주의’도 뒤틀린 삶의 모습입니다. 그 밖에 세속주의, 복음 가치의 상대화, 물질주의, 혼합주의 등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뒤틀림의 상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뒤틀림을 극복하려면 우선 목수의 아들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일치하지 않고서는 자아통합과 회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의 지역 가운데서도 변방의 불결한 곳을 직접 ‘찾아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처럼 뒤틀림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현장은 나 자신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으며 사회공동체일 수도 있겠지요.
오늘도 나 자신과 세상 안의 뒤틀림을 회복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멈추어 갈라진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과 시선을 고르며, 하느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아통합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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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었다.”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언젠가 단골 이발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따라 늘 면도해주시던 자매님이 안계셨습니다.
그 대신에 ‘상당히’ 연세가 있으신 할아버님께서 어울리지 않게 하얀 가운을 입고 면도사 역할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 앞 사람한테 면도하시는 폼을 봐서 할아버님은 ‘초짜’ 알바가 분명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차례 때 저는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시는 것이 영 서투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세가 있으셔서 면도칼을 쥐신 손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그런 할아버님께 얼굴을 맡겨드리고 있노라니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만만치 않은 얼굴인데, 칼자국이라도 하나 더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머릿속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꼬마 때 들은 이야기,
어떤 이발소에는 무서운 이발사가 있다, 그 이발소의 특징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는 하는데
나오지는 않는다,
그 이발소에는 지하실이 있고, 어느 순간 이발의자가 자동으로 바닥이 밑으로 꺼져버린다...
1월 31일은 가난한 청소년들의 사도이자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의 사부이신 성 요한 보스코(혹은 돈보스코)의 축일입니다.
돈보스코께서도 어느 날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돈보스코가 사제로 서품된 지 2년 정도 지난 때,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던 1943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머리를 깎으러 단골 이발소에 가셨던 돈보스코는 거기서 한 어린 소년을 만납니다.
당연히 그 소년은 갓 이발소 일을 시작한 왕초보였습니다.
바닥이나 쓸고, 이발 도구를 정리하고, 겨우 면도를 위한 비누칠 정도 하던 아이였습니다.
그 소년이 돈보스코의 얼굴에 비누칠을 하기 위해 다가왔습니다.
“친구야, 네 이름이 뭐지? 나이는 몇 살이고?”
“카를리노예요, 열 한 살이고요.”
“좋아 카를리노 비누칠을 잘 해다오. 아버지는 안녕하시냐?”
“돌아가셨어요. 엄마 밖에 안계세요.”
“저런 저런, 가엽구나.”
대화가 오가는 중에 카를리노는 비누칠을 끝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돈보스코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를리노, 어디 가니? 면도를 해줘야지.
자, 이제 용기를 내고 면도칼을 가져와서 내 수염을 깎아다오.”
그 순간 주인이 깜짝 놀라서 달려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맙소사, 신부님! 이 아이는 초짜예요. 아직 면도를 못하지요.
그저 비누칠만 하는 아이랍니다.”
돈보스코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언젠가는 이 아이도 면도를 시작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게 시험 삼아 한번 해보게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을 겁니다.
자 카를리노, 용기를 내거라!”
카를리노는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돈보스코의 수염을 깎았습니다.
사실 돈보스코도 카를리노가 면도칼을 턱 주변에 댈 때에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세게 깍은 곳도 있었고, 몇 군데 작은 상처가 나긴 했지만 카롤리노는 면도를 끝냈습니다.
돈보스코는 긴장으로 얼굴이 잔뜩 경직된 카롤리노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했다. 카롤리노! 이제 우리는 친구니까 자주 나를 만나러 와주길 바란다.”
나중에 카롤리노는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오라토리오에 들어오던 날 돈보스코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보다시피 난 가난한 신부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게 빵이 단 한 조각 밖에 남지 않는다하더라도 난 그걸 너와 나눠 먹을거란다.”
그 후 카롤리노는 훌륭한 살레시오 회원이자 돈보스코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동반자가 되어
50년간 오라토리오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보스코는 당시 어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길거리 청소년들에게 다가섰습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억압과 죄와 고통의 족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들을 해방시켜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돈보스코는 그들 안에 깃들어있던 가능성을 눈여겨보셨습니다.
끊임없이 그들을 격려하고 지지했습니다.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펼쳐놓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 때문에 죽을 고생을 다하고 있는 한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지 못하고 무덤가에서 살았습니다.
더러운 영이 활개를 치기 시작할 때 마다 그의 영혼과 육체는 처참하게 망가져갔습니다.
이토록 비참한 삶을 견뎌내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시며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태초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주시며 새롭게 출발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새로운 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지난 날 내 삶을 휘감고 있었던 어둠과 슬픔의 자취를 말끔히 거두어가시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맑은 하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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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악령보다 무서운 것이 자아임을 모를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서 군대라는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당시 로마 한 군단은 6천 명이었으니, 한 사람 안에 얼마나 많은 악령이 들어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들어가서 물에 빠져 죽은 돼지들만 2천 마리가 넘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마귀 군단의 압제에서 벗어난 사람은 온전한 모습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같은 인물은 받아주시면서 이제 악령으로부터 깨끗해진 이는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악령에서 해방되면 성인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너무 쉽습니다.
저도 군대에서 죽은 귀신을 보는 군인에게 “그냥 안 보이는 척 하세요”라고 했더니 사흘 만에 그 귀신이 보이지 않게 된 일이 있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하라고 했더니 악령이 그냥 나가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이렇듯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더 무서운 것이 있음을 잊고 악령을 더 무서워합니다.
게라사 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악령이 들린 사람을 휘어잡기 위해 쇠사슬과 족쇄를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악령이 들린 사람은 그것들을 다 끊어버렸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게라사인들은 자신들 안에 그 악령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바로 ‘자아’입니다.
게라사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돼지 2천 마리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떠나가 달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악령에서 해방된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예수님은 악령에 대해서는 그 숫자에 상관없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시지만 자아가 자아내는 탐욕, 성욕, 명예욕에 대해서는 아무 힘도 없으십니다.
그냥 조용히 떠나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무서운 자아가 우리 안에 있음을 잊는다는 것은 곧 악령이 걸려있는 사람보다 위험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포스터에 “처음부터 잘못된 건 없어…. 그냥 너만 없었으면 돼…”라는 섬뜩한 메시지가 담긴 영화
‘파수꾼’(2011)입니다. 과연 학교 일진의 친구들은 행복할까요?
기태, 희준, 동윤은 절친한 친구입니다.
기태은 여자친구 세 명과 함께 월미도에서 미팅을 주선합니다.
희준이 관심 있는 보경은 기태에게 관심을 보이고 기태는 희준을 생각해 고백을 거절합니다.
보경이 기태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본 희준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까지 빼앗는다고 기태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하게 됩니다.
기태는 지금 다니는 학교에 일진이고 그런 기태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은 무척 예민한 부분이었습니다.
희준은 기태가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과민반응한다는 말을 흘리게 되고, 기태도 희준에게 망을 보라고 시키는 등 자존심에 상처를 입힙니다.
이를 계기로 둘의 사이는 본격적으로 나빠집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동윤은 희준을 보고 이상함을 느낍니다.
기태는 희준을 가방까지 빼앗아가고 가방을 찾으러 온 희준의 뺨을 때리는 등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농락합니다.
동윤은 기태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합니다. 기태는 마음을 바꾸어 다음날 사과하러 희준에게 다가갑니다.
기태는 이제 그만하자고 사과하는데, 희준은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에 사과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전학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좋은 이미지로 남기를 원했는지
기태는 전학하는 희준에게 셋의 우정과 추억이 담긴 야구공을 건네며 작별인사를 합니다.
희준이 전학 간 뒤 기태의 폭주는 계속됩니다. 이에 동윤은 기태를 말려보려 또 충고합니다.
기태도 이번에는 동윤의 여자친구 세정이가 건전하지 못하다며 동윤에게 충고하며 그런 충고가 얼마나 마음 아픈 것인지 알려줍니다.
세정이를 만난 동윤은 표정 관리를 못하고 헤어지자고 합니다.
이에 세정은 자신의 소문으로 인해 상처받고 자해를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갑니다.
이에 동윤은 기태를 찾아가고 그 소문에 있어서 자신이 그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을 세정이에게 말했느냐고 따집니다.
기태는 그런 오해를 하느냐며 어이없어합니다. 이에 동윤이 기태에게 먼저 폭력을 가합니다.
기태와 한 패거리들이 동윤을 둘러싸 때렸고, 기태가 일어나 그들을 말리며 동윤에게 그건 오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윤이 학교에 나오지 않자 기태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동윤의 집에 찾아갑니다.
동윤은 기태에게 그냥 가라고 말합니다.
기태는 이제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친구 동윤에게 한 번 더 진심 어린 사과를 합니다.
동윤은 이렇게 비수가 꽂히는 말을 합니다.
“내가 네 진정한 친구다.
이해해 줄 사람은 나뿐이라고 지껄일 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는 줄 알아?
네가 역겨우니까 네 주변 애들이 다 너 떠나는 거야.”
“그래? 그게 내 모습이야?”
“어!”
결국,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을 모두 떠나가자 기태는 자살하게 되고 결국 동윤은 그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청소년의 성장 이야깃거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까지 자신이 힘이 세다는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친구들에게는 역겹게 보인다는 사실을 누구도 기태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기태는 항상 “이만큼 머리 숙이고 사과했으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자기 주도적인 관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힘과 권력, 명예나 교만함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없음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한 적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태는 원인도 모른 채 그냥 자신이 죽어야 마땅한 존재라 믿게 된 것입니다.
기태는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게라사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얼 포인트’(2004)는 베트남 전쟁 당시 군인들이 귀신과 싸우는 내용입니다.
사실 귀신과 싸우기보다는 자신 안의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 더 옳은 이야기입니다.
귀신을 보느라 자신 안의 두려움을 보지 못한 이들은 다 죽어갑니다.
귀신은 결국 우리 안의 자아와 결탁하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를 이기는 자는 귀신을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꼭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까지 우리 안에 있는 자아가, 그리고 그 자아가 만들어내는 삼구라는 욕구가 마귀에 들리는 것보다 더 무서움을 자녀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마귀는 쫓아낼 줄 알면서 그것보다 더 무서운 자아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귀는, 그것이 군단으로 있을지라도, 한 마디로 쫓아낼 수 있으셨지만 게라사인들의 탐욕에는 아무 힘도 쓰실 수 없으셨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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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상지종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사람으로>
사람은
사람이고
사람이어야지요
사람은
사람답지 못해도
여전히 사람이랍니다
사람답지 못한
사람도
사람이고 싶을 테지요
사람이고 싶은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해요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 너머
사람이고 싶은 사람을
다만 보아주고
다만 품어주고
다만 살려야 해요
사람은
사람다울 수 없어도
여전히 사람이랍니다
사람다울 수 없는
사람도
사람이고 싶을 테지요
사람이고 싶은
사람다울 수 없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말아야 해요
사람다울 수 없게 하는
그 무엇 너머
사람이고 싶은 사람을
다만 보아주고
다만 품어주고
다만 살려야 해요
사람은
사람이고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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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묵상과 기도
성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재능과 은사를 끌어내야 합니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고 어머니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습니다. 청소년을 사랑하고 젊은이들의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1859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습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만큼 19세기의 탁월한 교육자, 1888년에 선종, 1934년에 시성되었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전령 하나가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쏠렸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어서들 달아납시다.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압살롬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서둘러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서둘러 우리를 따라잡아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고, 칼날로 이 도성을 칠 것이오.”
다윗은 올리브 고개를 오르며 울었다. 그는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었다.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제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계속 올라갔다.
다윗 임금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울 집안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그곳에서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그는 나오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온 백성과 모든 용사가 임금 좌우에 있는데도, 그는 다윗과 다윗 임금의 모든 신하에게 돌을 던졌다. 시므이는 이렇게 말하며 저주하였다. “꺼져라, 꺼져! 이 살인자야, 이 무뢰한아!
사울의 왕위를 차지한 너에게 주님께서 그 집안의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돌리시고, 그 왕위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다. 너는 살인자다. 이제 재앙이 너에게 닥쳤구나.”
그때 츠루야의 아들 아비사이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이 죽은 개가 어찌 감히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을 저주합니까? 가서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임금은 “츠루야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 주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시어 저자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어찌하여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말할 수 있겠소?”
그러면서 다윗이 아비사이와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다윗과 그 부하들은 길을 걸었다. 2사무 15,13-14.30; 16,5-13ㄱ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마르 5,1-20
실천
어둠과 세력에 눌려있던 사람이 온전히 해방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어느 시기부터 더러운 영이 그를 속박하고 구속하였습니다. 더러운 영은 그를 사로 잡아 조종하였습니다. 그의 안에서 힘과 세력을 부렸고 그의 정서와 성품을 묶어 놓았으며 마음와 입을 마구 놀려대었습니다. 그의 인격과 가치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인격이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러운 영이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왔을 때,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신원을 알아 보고는 그분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 외쳤습니다. "저와 상관하지 마시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괴롭히지 마시오."
더러운 영은 그 사람을 속박하고 구속하고 조정하였고, 예수님의 신원을 알고 또한 예수님의 역사에 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더러운 영에게 "나가라"하였습니다. 그 더러운 영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 사람에게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서 산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들어가 구속하고 속박하고, 그를 소외시켰던 더러운 영들을 추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통해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시는 주님이십니다. 또한 그리스도 제자 모두도 그런 힘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성령께 의탁하고 그 힘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주위의 어둠과 영들에 영향을 받는 이들을 돕고 자유와 해방을 선포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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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2사무15,13-14.30; 16,5-13ㄱ)
"다윗은 올리브 고개를 오르며 울었다. 그는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었다. 그와 함께 있더 이들도 모두 제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계속 올라갔다." (2사무15,30)
사무엘서 하권 15장 30절부터 37절까지는 반란자 압살롬을 피하여 합법적인 통치자 다윗이 비참한 모습으로 요르단으로 도망친 사실과 예전에 다윗의 고문이었던 길로 사람 아히토펠이 정권을 탈취한 압살롬의 편에 가담한 반면(2사무15,12), 에렉사람 후사이(2사무15,32)는 모든 권력을 잃어버린 다윗을 위해 헌신을 결단한 사실이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무엘서 하권 저자는 다윗이 그의 고문인 아히토펠의 배반 소식을 들은 것과 후사이를 만나 그에게 첩자의 임무를 부여한 사실을 동시에 말하면서 다윗이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며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는 고문인 아히토펠에게 배반을 당한 대신에 후사이라는 충실한 일꾼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후사이는 그 이전부터 다윗의 좋은 벗이었지만(2사무15,37),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위해 더없이 훌륭한 고문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 나오는 '올리브'에 해당하는 '핫제팀'(hazethim; the Mount of Olive)는 키드론 시내 동쪽 언덕편에 있는 작은 산으로서,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곳을 말한다.
또한 '고개를'로 번역된 '베마알레'(bemaalle)의 원형 '마알레'(malle)는 '올라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알라'(alla)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오르막', '고개', '언덕'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올리브 고개'에 해당하는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올리브산 언덕'이라는 뜻이다.
키드론 시내를 건너자마자 동편으로 오르막이 있고, 그 정상에는 올리브 산이 있기 때문에 원문이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나타내어 묘사한 것이다.
이제 다윗은 그곳을 '오르며 울었고,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었다'고 묘사된다. 다윗이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올리브산 언덕을 세 가지 행동을 하면서 오르고 있다.
첫째, '머리를 가리고'에 해당하는 '웨로쉬 로 하푸이'(werosh lo hapui; and his head was covered)는 '그리고 그의 머리를 뒤집어 쓴 채'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머리를 감싸는 모습'과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는 모습'이 있다.
전자는 몹시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번뇌하는 모습을 나타내며(에스테르6,12), 후자는 몹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나타낸다(2사무13,19; 느헤9,1).
여기 본문에서 다윗은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지는 않았지만, 그가 보인 행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나타내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피해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가 처량하고 수치스러워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둘째, 다윗은 '맨발로 걸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웨후 홀레크 야헤프'(wehu hollek yahep; and he went barefoot)는 '그리고 그가 맨발로 걷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는 행위는 노예들만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면, 거룩하신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죄를 회개하며 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추는 상징적인 행동이 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을 때 발에서 신을 벗었는데(탈출3,5), 그것은 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었던 반면에 자신은 거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성에서 요르단으로 도망치면서 자신의 현 상황이 범죄한 자신에 대한 거룩하신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다윗은 거룩하신 분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할 만한 어떤 명분도 찾지 못하여 발에서 신을 벗은 채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자신을 더없이 비참한 상황에까지 이끌고 가신 하느님 대전에 다윗이 어떤 항의도 하지 않고, 다만 참회하는 심정으로 섰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원문에서 '그'를 뜻하는 인칭 대명사 '후'(hu)가 사용된 것은 다윗이 임금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맨발로 걸었다는 사실을 다른 두 행동과 구별해서 강조하고 있다.
세째, 다윗은 울었다.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는 '우보케'(uboke; and wept)의 원형 '빠카'(baka)는 소리내어 크게 우는 모습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이것은 다윗이 비참한 형편에 처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한탄했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절 후반부에는 다윗을 함께 따랐던 백성들도 다윗과 같은 행동을 취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 임금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을 임금과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로 여겼음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신정(神政) 왕국의 합법적 통치자 다윗이 반역자 압살롬을 피하여 왕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국가적 재난에 대해 다윗의 추종자들은 크게 슬퍼했던 것이다.
2021년 2월 1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더러운 영(퓨뉴마다이몬)에 들렸다는 것은 더럽게, 거짓되게 하는 영의 말을 듣고 그 거짓말에 매여 사는 것을 말한다. 곧 하느님의 말씀(뜻)을 인간의 말(뜻), 욕망을 위해 살게하는 뱀이 속였던 그 거짓말, 가르침을 먹은 것이다.
(마르5,1-20)
1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 앞 節에서 돌풍 같은 호수(세상)의 물이 배(교회)에 들이쳐 사람을 두려움에 빠트렸고, 그 물은 뱀의 거짓말에 의한 우리 삶의 풍랑, 바람이었음을 묵상했다. 곧 하늘의 대속, 그 진리의 말씀을 인간들의 계명으로 받아 하늘의 용서(생명)도 모르고 사람을 힘들게, 죽이려는 거짓 영의 말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호수의 거짓 풍랑을 말씀으로 복종 시키고 제자들과 함께 로마의 속국(屬國)인 게리사인들의 지방으로, 또 다른 뱀의 거짓말을 듣고 힘들어 하는 그 더러운 영(말)이 들린 사람을 구하시러 들어가신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 빛이 켜지면 더러운 것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리고 빛을 피해 도망가는 법인데, 이 사람은 빛이신 예수님께 적개심은 품었지만 다가온다. 주님께서 자비(慈悲)의 마음으로 그를 이끄신 것이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 무덤 - 그의 靈이 거짓에 묶여 죽어 있다는 것이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 하느님의 말씀을 眞理로 받으면 밤으로 낮을 만나 곧 어둠에서 빛을 배워 쉼, 기쁨을 살게 되지만, 인간들의 말(계명, 법) 로 받으면 밤과 낮 모두가 苦痛뿐이다. 그래서 돌로 제 몸을 친다. 法의 罪의식으로 자신을 해친다는 것이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인간의 말로,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하는 信仰은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이 되어 하늘의 쉼(安息)을 주지 못해 죄의식으로 괴롭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망스러워 안식을 살지 못한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軍隊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군대 - 하는 나라 백성도 군대(軍隊)로 말씀하신다. 곧 신앙생활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거짓과 진실의 싸움, 그 전쟁(戰爭)을 말한다. (에페6,11참조)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 로마의 속국 이였기에 그들이 먹었던 돼지를 키웠다.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이스라엘은 키우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율법 때문이다.
(레위11,7) 7 돼지는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 갈라지고(파라스 - 구별되어 갈라지다),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것에서 갈라져 구별되어 지는 것, 그리고 양식을 새김질하는 것이 깨끗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으로, 구원, 말씀의 양식으로 묵상하고 되새기는 것, 그것이 깨끗한 것이다. 그 의미(意味)로 돼지를 부정하다. 먹지마라. 하신 것인데, 그 율법을 잘 키는 자시 열성, 열심, 의로움이 참 이라고 거짓 영의 말을 들었기에 오늘날까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들은 큰 착각,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부정한 것, 더러운 말에 매어 사는 것이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 더러운 것은 부정한 것, 더러운 곳을 찾는다. 빛이 있는 곳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11,28) 28 믿음으로써, 모세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피를 뿌려, 맏아들과 맏배의 파괴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 새 계약의 피 가 있는 곳, 믿는 그 사람에게는 파괴하는 더러운 말(靈)이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 예수님의 고치심을 보고 겁이 났다는 것은 그들 안에도 더러운 영(말)이 있다는 것이다. 곧 게리사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 성당에 잘 다니다가 재산, 건강 등을 잃으면 떠나는 경우와 같다. 다른 말로- 돈, 명예, 건강을 위해 성당을 다녔다는 것이다. 더러운 영의 말로 신앙을 살았기 때문이다. 떠나지는 않더라도 실망으로~ 말씀으로 용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 다른 이들에게는 “나를 따르라” 하시고는 왜? - 그 사람이 더러운 영이 들렸던 것은 그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더러운 말(영)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가정(교회, 성당)으로 파견하신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알려라’ 하신다.
주님의 자비- 어둠(죄)을 드러내시고 그 어둠에서 갈라(구별)내시어 빛을 주시는 것, 주님의 慈悲다. 자비(慈悲), 여자의 子宮을 뜻하니, 자신의 생명으로 키우는 그 母性愛, 그 사랑으로 생명을 키워내시는 그 자비다.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 데카폴리스 - 열(10)개의 도시라는 뜻, 로마의 속국들을 말한다. 로마의 힘, 곧 세상의 힘, 그 말로 세상의 재물, 명예를 위해 모두가 산다. 더러운 말(영)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이웃, 가족이 모두(전부, 다) 그 세상 것을 위해 일치를 이루고 있기에 분열시키려 하신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시고 구별하시어 구원하려 하신다.
거룩(쎄퍼렛-다르다, 구별하다).
(루가12,51-52)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천주의 성령님! 부족한 저희를 충만하게 하시어, 주님의 분열, 구별하심이 더러운 나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한 자비임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마르5,1-20)
병행구절인 (마태8,28~34) 중에서 묵상글을 올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29) 예수님께서 "가라."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2)
영적 존재로서 영적 지각력이 뛰어난 존재인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의 아드님'에 해당하는 '휘에 투 테우'(hye tou theu; the son of God)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람들에 의해 고백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명칭은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적 명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데, 이러한 사람들의 고백 이전에 더 먼저 마귀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지하였고, 예수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티 헤민 카이 소이' (Ti hemin kai soi; what do you want with us)에서 '당신'으로 번역된 '소이'(soi)와 '저희'로 번역된 '헤민'(hemin)은 여격의 형태인데, 직역하면 '저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이것은 '당신께서 저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또는 '저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는 뜻으로서 자신들의 주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사적 질문이다.
그리고 '때가 되기도 전에'로 번역된 '프로 카이루'(pro kairou; before the time; before the appointed time)라는 표현은 먼저 마귀도 종말론적 심판과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권세의 종말이 올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임했지만 그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과 마지막 도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구약에서 돼지는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기짐을 하지 않으므로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어(레위11,7; 신명14,8) 그것을 먹는 일이 가증스런 일로 여겨졌다(이사65,4).
하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 있어서 돼지는 주요 음식이었고, 돼지 사육은 주요 수입원이었다.
본 사건의 배경이 되는 가다라인들의 지방은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이었으므로 돼지를 사육할 수 있었다.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 5장 11절에는 2천 마리라는 구체적인 수가 제시된 반면에, 마태오 복음사가는 능력을 행하시는 그리스도께만 초점을 맞추기 위해 구체적인 보도를 단순화시켜 '많은'에 해당하는 '폴론'(pollon; many)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마태오 복음 8장 22절에서 호수로 빠져들어간 주체인 '돼지 떼'를 단수형으로 취급했지만, 물에 빠져 죽은 존재에 대해서는 복수형으로 취급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기에서 '돼지 떼'로 하여금 내리 달려 호수로 들어가게 만든 내면적 동인은 '마귀'가 제공했지만, 실제 죽은 것은 '돼지 떼'였음을 나타내는 문학적 기법을 썼다.
그렇다면, 왜 마귀는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였을까?
이것은 그곳 사람들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원인을 예수님께로 돌려 예수님을 경계하게 하고, 그 지방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마태8,34).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셨지만, 사람의 영혼 생명이 물질적인 재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마귀가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셨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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