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묵상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 땅에는 이미 하나님이 계셨다!"
이렇게 자명한 생각을 그 동안에는 왜 하지 못했을까? 선교사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와서 우리들에게 전해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고 왔다. 그 복음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우리 가운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한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래서 우리가 그분께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지를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이 전도다.
그러면 설교는 어떨까? 설교도 청중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일깨워주고 그분께 반응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미 청중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일하고 계신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이미 자기 곁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올바른 반응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동안 메시지 속에 하나님이 전달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전도나 설교는 무엇인가? 내가 믿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내가 전하는 메시지 속에 갇힌 분이 아니다. 그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고 충만하시다. 나의 메시지는 그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 방식은 나의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들려줌으로 그들도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들려줌으로 그들도 이미 자신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것이 전도요 설교가 아닐까?
아니면 이런 방식은 어떨까? 선교사나 전도자가 그 대상자들 사이에 들어가서 그들 가운데 이미 계시고 이미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소개하는 방식은 어떨까? 결국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그들이 자신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라면 이것도 중요한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들어가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분에 대하여 소개함으로써 복음을 전했던 것도 이런 방식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아테네에 계셨고 그들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잘 몰랐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 중에 계신 하나님을 일깨워준 것이다. 아레오바고에서 사도 바울이 설교한 것은 그런 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나에게 선교의 방법론이나 설교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일깨워준다. 그것은 어떤 지식의 전달을 통해서 믿음을 전하는 것에서 공감과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중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들어가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지 않고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설교가 그토록 공허하게 들린 이유다. 울림과 공감이 없는 바로 그 이유다!
이 새벽에 나는 다시 태어나는 사람처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진리와 인간을 대하고자 한다. <끝>.
참고: 성동구청 기독신우회 수요예배 설교 중에서...
https://youtu.be/mVYyDa3eLmM?si=XVmIfxAqhoVC7N8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