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1905년 하와이로 이민간 성인 중 여성은 10% 정도였고 그들은 모두 남편과 함께 갔다. 하와이의 한인 독신 남자는 결혼할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중매쟁이를 통해 교환한 사진을 보고 한국의 신부가 미국으로 시집가는 제도가 생겼다.
1910~1924 년간 약 1000명의사진신부가 미국에 갔다. 그래서 한인 이민사회는 남녀성비가 균형에 접근하여 안정된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사진신부들은 거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한 회상을 들면 “그녀의 가족은 외할머니집 뒤뜰의 오두막에서 살아야 했다. 때로는 그녀의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주고 곡식이나 채소를 얻어왔다. 그런 일조차 없을 때는 굶어야 했다.” 사진신부들은 중매쟁이이의 말을 듣고 “나는 조선에서 하와이가 천국이라고 들었다. 옷이 나무에 걸려 있어서 누구나 가져갈 수 있으며 그곳에는 온갖 과일과 음식이 풍부하다고 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와이의 풍요로운 삶을 기대했으나 그것은 헛된 꿈이기 일쑤였다. 대부분 경제적 동기로 미국으로 갔으나 기독교와의 인연, 유교적 인습으로부터의 탈출, 식민지 통치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동기를 가진 사진신부도 있었다. 부모들이 대개 강하게 반대를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중매쟁이는 감언이설로 부모를 설득하였다.
한 신랑의 회상을 들어보자. “우리는 조선에서 신부를 데려온다는 말을 듣고 매우 흥분했다. 돈을 더 많이 저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되기까지 수개월 또는 수년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당장 신청서를 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일요일 교회에 갈 때 입는 양복을 꺼내 입고 사진관으로 갔다. 내가 사진을 중매인에게 내밀었을 때 손이 떨렸다.”
신랑은 신부 여비 약 70 달러, 중매쟁이 소개비 약 30달러, 사진값 약 20달러 등을 준비해야 했다. (웨인 페터슨 ‘하와이 한인이민1세’)
사진신부 제1호로 23세인 최사라가 1910년 11월 2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가구공인 38세의 이내수와 결혼하였다. 사진신부와 신랑의 나이 차가 이 정도 나는 것은 보통이었으며 스무살이 넘게 차이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신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채 혹은 속은 채 태평양을 건너왔다. 신랑들이 양복을 빌려 입고 까만 얼굴에 분을 바르기도 하여 촬영하였고, 오래전에 찍은 사진을 보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진신부들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상대방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나 되돌아갈 여비가 없었다. 게다가 기대와 달리 힘든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진신부들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였다. 결혼생활은 심한 경제적 어려움에서 출발하였다. 늙은 남편이 은퇴하거나 사망하면 가정의 부양은 사진신부의 몫이었다
그들은 남성처럼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거나 미혼 남성의 옷을 세탁하는 일도 하면서 가사일을 하고 자녀 교육에 힘썼다. 이들은 여성 단체를 꾸려 독립기금을 마련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남성 못지않게 힘썼다.
[이헌창 고려대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