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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 12. 16. 수요공부방]
성해영 교수 _ 세계의 종교, 심층에서 서로 만나다
설 법 : 성해영 교수님
타이핑 : 임도운, 배성해, 김법준
반갑습니다. <세계의 종교, 심층에서 서로 만나다>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에 관해서 간략히 6가지로 말하려고 합니다.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종교를 필요로 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넷째, 인간은 종교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데, 요즘 들어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왜 많아졌을까요? 또한 종교에 대한 비난, 비판이 왜 많아질까요? 에 관련된 이야기를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라는 개념으로 다루겠습니다.
다섯째, 제가 종교학 중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를 전공했기 때문에,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의 관점에서 여러 종교들을 바라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천국 혹은 극락 등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향은 무엇인지, 제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정리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챕터>
첫째,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굉장히 복잡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복잡한 존재라고 하는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를 보겠습니다. 예수, 부처님의 경우를 먼저 보면,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이고 부처님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부처님은 아들이 태어나자, 아들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는데요, 장애물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깨닫겠다며 가족을 버리셨어요. 이런 분들은 돌아가신지 2000여년이 지났는데도, 불교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예수와 석가모니의 삶을 본받으려고 하는 분이니, 굉장한 인간이셨습니다. 반면에, 히틀러는 어떨까요.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습니다. 또, 인간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만든 핵폭탄으로 일본을 공격한 존재입니다. 핵폭탄은 한 지역의 군인, 민간인, 동물, 식물 전부를 다 죽이겠다는 의도로 쏘는 폭탄이라는 말이에요.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일을 했단 말입니다. 인간이 대단히 복잡한 존재임을 알 수 있지요.
예수와 히틀러가 똑같은 DNA로 유전하는 인간일텐데, 두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의 차이를 보이는 건가요? 이것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태어날 때 붙어 있는 콘택트 렌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고기가 어디서 태어나죠? 물고기는 물 속에서 태어나고 물 속에서 죽습니다.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알 때는 언제일 것 같습니까? 물 밖에 나올 때겠죠. 그물에 걸려서 물 밖에 나가기 전에는 영원히 물 밖을 모르고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세계관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계관은 세상을, 다른 인간을,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태어날 때부터 내 눈에 붙어 있는 콘텍트 렌즈와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관 자체를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내 세계관이 무엇인지조차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그 세계관이 인간 행동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걸리버 여행기 읽으셨나요? 걸리버가 소행국에 갔는데, 소행국이 두 나라로 나뉘어서 전쟁하고 있었어요. 왜 싸우는지 아시는 분 계시나요? ‘삶은 달걀을 넓은 쪽으로 깨는가, 날카로운 쪽으로 깨는가’의 이유로 전쟁을 했습니다. 우습지요?
[ppt – 화장지 뽑는 방법 사진]
‘인간의 영원한 논쟁거리’라는 글로 인터넷을 떠도는 사진인데요, ‘화장지를 벽쪽에서 뽑도록 거느냐, 바깥쪽으로 뽑도록 거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벽쪽에서 뽑도록 거는 분 손들어보세요. 바깥쪽으로 뽑도록 거는 분 손들어보세요. 어느 쪽으로 걸든 상관없는 분 손들어보세요. 이게 세계관입니다 (웃음). 벽쪽에서 뽑도록 거는 이유가 뭔가요? 화장지를 접기가 편하지요. 그러면 바깥쪽으로 뽑도록 거는 이유는 뭐지요? 화장지를 뜯기가 편합니다. 여러 분이 같은 종교를 가지고 사이가 좋으셨기 때문에 안 싸우고 있지만, 세 분단 나눠서 분쟁을 붙이면 분명히 싸움 일어납니다. 남편이랑 아내가 다른 쪽이라 쳐봐요. 전쟁납니다. 이것이 세계관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인간은 이럴 수밖에 없는 걸까요?
[ppt – The meaning of life is quiet simply ????]
인간은 화장지를 어느 쪽에 거는지에 대해서조차 삶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본능과 본성에 따라서만은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계관을 갖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ㅡ삶은 달걀을 넓은 쪽으로 깨는가 날카로운 쪽으로 깨느냐부터, 공산주의가 좋은가 나쁜가까지ㅡ 모든 행동에 대해 의미체계를 부여하며 선택해야 합니다. 세계관 이야기를 제가 왜 자꾸하냐면, 종교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 챕터>
이제, 종교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종교란 무엇일까요? 사실 한 학기 동안 강연해야 할 주제인데, 오늘은 10분 안에 마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릴 때, 제가 두 가지 정의를 자주 인용합니다. 첫째, 윌리엄 제임스라는 실용주의 철학자가 종교에 대해 정의를 내렸는데, 종교는 물질적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맺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전제로 해야지 종교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윌리엄 제임스의 정의에 따르면, 북한의 주체사상은 종교일까요?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임스의 정의에 따르면, 유교는 종교일까요? 유교에는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지요. 유교에서 돌아가신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잖아요. 그런데 유교는, 보이지 않는 차원을 얘기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유교라는 종교가 특이해서, 제사하는 날 외의 나머지 날에는 조상이 어디서 뭘 하시는지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웃음). 불교에서는 지옥에 대해 얘기할 때도 바늘로 찌르는 지옥 등 묘사를 생생하게 하는데요. 유교에서는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 없잖아요. 유교에서는 죽은 자의 세계와 살아있는 자의 세계를 철저히 나눕니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세상에 충실하라고 하고요. 죽어 있는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간의 접촉을 최소화해서, 1년에 하루 제사하는 날에만 문 열어서 모셔서 제사지내고 마는 것이지요. 무덤을 만들 때도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곳과는 멀리 무덤을 만들고요. 기독교 유럽 사회에서 성당 앞에다가 무덤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요. 기독교 문화에는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이 겹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교는 나누어져 있지요. 어쨌거나, 윌리엄 제임스의 관점에서 유교는 종교가 맞긴합니다.
두 번째 정의는 폴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라는 독일 출신 신학자가 내린 정의입니다. 종교는 인간들이 만드는 문화체계, 문화현상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해답 체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과 의문이 무엇이겠습니까? 왜 태어났는지, 왜 살고 있는지, 왜 죽는지, 죽은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왜 없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것이 궁극적인 관심입니다. 이것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출가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유일하게 답을 하는 분야가 종교라는 것입니다.
두 정의를 합해 보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삶의 궁극적인 의문에 해답을 주는 것인데 이 해답 체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이뤄진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가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있어서 종교가 궁극적인 의문에 대해 답을 주기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종교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세계관의 핵심입니다. 예수는 인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류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유대인이 만악의 근원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을 없애는 것이 자신의 세계관에서 옳은 일이었지요.
9 11 테러는, 무슬림이 성전이라고 생각해서 일으킨 일입니다. 종교가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녀재판은 종교적인 확신에 차서 마녀로 지목된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이지요. 탈레반이라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다음, 3박 4일에 걸쳐서 ‘바미얀 석불’이라는 거대한 불상을 로켓으로 쏴서 없앴습니다. 바미안 석불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 이교도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파괴한 것입니다. 그리고 탈레반 정권이, 여자들이 아버지, 남편 외 남자에게 얼굴을 보여줘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공무원 교사 기업인 등을 불문하고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종교적 교리 때문이라는 이유로요.
이런 사태가 왜 벌어질까요? 문자주의적 경전 해석 때문입니다. 표층종교의 가장 큰 특징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ppt 만화>
여기 만화를 보시면, 공룡이 노아의 방주를 놓치는 바람에 멸종을 당했다는 만화가 나옵니다. 제가 중학교 때 미션스쿨을 다녔는데 전도사 선생님한테 노아의 방주에 대해서 “물고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었던 적이 있어요. 이해가 안되서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 해석하면, 중학생이 보기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지요.
종교가 너무 커졌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난폭한 행위들을 보고서, “종교가 있어서 사람들이 더 불행해진다” 종교가 인간 삶에서 없어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등등 종교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50%가 종교가 없으신 분입니다. 저는 종교학자인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종교학과가 없어지고, 저는 참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걸까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2007년도 조사인데, 세계 인구 중에서 무신론자는 100분의 2 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어떤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더라도 유물론자는 아닌 사람입니다. 강한 유물론자는 인간이 죽으면 물질로 돌아갈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계 인구 중에 100명 중에 2명 뿐입니다. 한국 사람들 조사하면 100명 중에 50명이 종교가 없다고 하지만, 강력한 유물론자는 한국에서도 100명 중에 2명 밖에 안될 겁니다.
그래서 종교학자가 굶어 죽을 일은 없다라고 정리하면서 챕터 2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챕터 ㅡ 종교가 주는 위안>
세 번째 챕터는 종교가 주는 위안입니다. 종교가 현대 세계에 안 맞는 부분들이 있고, 여러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100명 중에 98명이 종교적 세계관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요? 종교적 세계관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가 주는 강력한 위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종교는 다른 분야와는 달리, 인간이 물어볼 수밖에 없는 삶의 궁극적 의문에 대해 답을 주는 유일한 체계라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수지만 사실, 20대 초반 학생들은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종교 강연을 가보면 50~60대에 좋아하십니다. 그 시점이 되면,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절실해집니다. 인간이 호기심을 가지면 호기심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호기심 중에서, ‘사람이 왜 사느냐’, ‘왜 죽느냐’, ‘죽은 다음 어떻게 되는가’ 보다 우리 영혼을 뛰게 하는 의문이 없습니다.
<ppt – 고양이가 전선줄 씹어 먹는 장면>
그림은 고양이가 전선줄을 씹어 먹는 장면입니다. 다음 장면은 무엇이겠습니까? 감전당해서 죽겠지요.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고양이조차도 호기심이 있는데,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붓다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을 다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호기심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기꺼이 마신 이유는 뭐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가 찾아와서 도망가라고 애걸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답했습니다. “죽어서 아무 것도 안 남으면, 죽은 주체가 없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죽어서 무언가가 남는다면, 남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나는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얘기 듣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죽음 이후에 대한 믿음체계가 있으면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알려 줍니다. 독일 나치 정권에서,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이라는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유대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가족들은 전부 죽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이 사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뭘 봤냐 하면, 어떤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의 극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구사하고 어떤 사람은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달라서 그럴까요? 빅터 프랭클이 보기에는 “삶을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안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다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 중에서도 종교적 차원에서 오는 삶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를 다녀온 후에,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로고테라피’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종교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로고스)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는 없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 종교는 인간이 독립되고 작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큰 무엇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 다음, 내면의 지혜탐구입니다. 도(道)이든, 공(空)이든, 불성(佛性)이든, 종교라는 것은 내 육체와 심리라는 작은 존재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속의 깊은 마음의 차원에 들어가서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더 넓고 광활한 차원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줘서,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크고 무한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셋째, 종교는, 인간이 불성을 갖춘 존재이기 때문이든,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어서이든, 이웃이 서로가 존중해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줍니다. 종교가 이 점을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기 때문에 삶의 위안을 준다는 것입니다.
넷째, 종교는 삶의 궁극적 의문에 대해 해답을 줄 뿐만 아니라, 옆 존재와 내가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정서적 만족감을 주게 됩니다. 정서적 만족감이 굉장히 큽니다. 사랑이라 표현하든, 자비라 표현하든, 서로서로가 돕고 보살피고 함께 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을 헬(hell)조선이라 부르는 신조어가 있는데, 이런 신조어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가 스스로 무한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성이 다 사라지고나니까, 다들 힘들어진 것입니다. 종교인이 수명이 깁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이 수명을 길게 해주는 것입니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것인데요, 실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불교로 치면, 대종사님께서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실천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따라한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을 뵌 분이 계시고, 대종사님 뵌 분을 뵌 분이 있잖아요. 종교의 교리가 말로만 있고 실천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어땠겠어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와중에 도망을 갔다면, 기독교가 없었겠지요.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관청에 투항했다면, 동학이 유지되지 않았겠지요. 종교가 계속 되는 이유는, 예수를 본받고 붓다를 본받아, 예수와 붓다가 살았던 삶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 계속해서 실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걸 보면서 사람들이 강력한 위안을 얻습니다. 실천하는 종교인이 없으면 종교가 존속할 수 없습니다.
다섯가지를 보면, 종교가 굉장히 파워풀하지요. 그래서 세계인구 중에 100명 중 98명이 종교적 세계관을 갖는 것이고, 저같은 종교학자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요.
<네 번째 챕터 ㅡ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표층종교, 심층종교라는 말은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쓰신 오강남 교수님께서 만드신 말입니다. 제 종교학과 스승님이신데요. 제가 유학 마치고 와서 오강남 교수님과 함께 책을 썼는데, 저 말이 이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표층이라는 말은 껍데기라는 뜻이고, 심층은 알맹이라는 뜻이지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지요.
왜 사람들이 종교가 주는 위안 때문에 종교를 갖고 싶어하는데, 종교가 왜 비난받는지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오강남 교수님과 쓴 책이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입니다. 제가 책 제목을 잘못 정했습니다 (웃음). 기독교 신자들은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까 안 사고요. 불교 신자들은 ‘깨달음’에 대해 이미 안다고 생각해서 책을 안 사요 (웃음).
오늘 강연에서 안 나온 내용도 있으니까, 한번 읽어보세요.
이 책의 요점은 표층종교와 심층종교가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을 갖고 하는 것이 표층종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믿습니다.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보고요. 이 부분이 저희가 잘 이해가 안가요. 동양 종교에서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본성에 대해 깨달아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지요. ‘믿음’과 ‘깨달음’이라는 용어가 굉장히 다르지요.
다른 용어로 말씀드리자면, 심층종교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종교라면, 표층종교는 머물러 있는 종교입니다. 표층종교에서는 이미 다 알고, 이미 구원받았으니까요.
양파의 껍질처럼, 까도 까도 새롭게 나오면, ‘내가 이 순간에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되지요. 단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2월에 졸업을 하고 3월에 대학을 가면, 대학 한달다니고는 길가에 고등학생들을 보면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들이 보기엔 1학년들이 어린아이 같아 보여요.
고등학교 3학년이 대학생들에 대해 어떻게 알겠어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결혼한 사람들을 어떻게 알겠어요. 나이 든 사람이 “너가 한번 살아보고 겪어보라”고 말합니다. 양파의 껍질처럼 까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경험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본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발달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겸손해야 합니다. 겪어야지 알게 되는 것이 지혜입니다.
종교가 망가지는 이유가 변화하고 발전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본주의 종교, 표층종교의 특징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반면, 심층 종교의 특징은 내가 변화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변화와 발전은, 나는 나라고 하는 아주 조그마하고 육체에 머물러 있는 작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불교의 전통,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 속에는 우주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단지, 내가 모를 뿐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대학교 1학년을 모르듯이, 결혼 안 한 사람이 결혼한 사람을 모르듯이요. 이미 거기 있지만 모를 뿐입니다.
종교란, 원래 내 속에 있지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다시 알아서 그것과 합치가 되는 것입니다. ‘재결합’이라고 부릅니다. 재결합이 모든 종교의 특징입니다.
재겹합의 특징 중 가장 큰 특징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인간이 바깥으로 가지 않고 자기 속으로 가면 자기가 자기가 아닌 경지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슷하게 얘기하는 학문이, 종교 심리학 중에 심층 심리학입니다. 나(ego)라는 것에 의식이 있다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가 그린 그림입니다. 의식(ego)은 빙산 중에서 수면 위에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빙산 아래, 개인무의식, 집단 무의식 등 완전히 알 수가 없는 어떤 부분이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쉽게 들어드리겠습니다. 태몽 꾸신 분 계시죠. 프로이트나 융 같은 심리학자가 가장 관심 가졌던 인간 심리현상 중 하나가 꿈입니다. 태몽은 태기를 느끼기도 전에, 내가 꾸는 것도 아니고 친정엄마가 꾸는거 잖아요. 친정 엄마가 태몽을 꾸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꾸지 않아요. 내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내 에고가 통제하는 일은 아닙니다.
프로이트가 관심 가졌던 주제가 텔레파시입니다. 이런 얘기 들어보셨나요? 어느 환자가 얘기를 하는데, 꿈에 삼촌이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꿨는데, 아침에 전화를 받았는데 삼촌이 그때 죽었다는 이야기요. 주변에서 숱하게 들어보신 이야기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꿈에 와서 인사하고 가신 겁니다. 그런 게 텔레파시지요.
인간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모르는 마음의 층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층위가, 궁극적인 실제, 신(神), 불성 신성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동양에 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글자인데, 사람이 소매를 나풀거리는 때, 즉 제정신이 아닐 때 하늘과 땅이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엑스타시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자기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유체이탈이라고 해서, 육체를 벗어나서 들여다본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벗어나는 것이지요. 내가 나를 벗어나는 일이 극단적으로 일어나면,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사건, 천지인이 합일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물 안에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청 큰 우물 안에 개구리들이 수백 마리가 사는데,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의 크기가 어쩌니 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개구리 한 마리가 우물을 벗어나서 하늘을 바라볼 일이 생겼습니다. 그 개구리가 우물로 돌아와서 다른 개구리들이 하늘 크기에 대해 논쟁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고 합니다.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살아봐야 알고 겪어봐야 합니다. 우물 밖으로 개구리가 나가야한다는 뜻입니다. 우물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건을 동양에서는 깨달음, 체험이라고 말하고, 서양에서는 신비적 합일체험이라고 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생불멸함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고(ego)의 나, 옛날의 나가 죽고 더 큰 내가 태어나면 영생불멸하는 존재가 됩니다. 거듭 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영생을 얻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표층 종교, 심층 종교의 차원이 있습니다. 자기 내면의 깊은 곳으로 가서, 내가 한계 지워진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존재여서, 그것을 수행하든 신의 은총을 받아서 알든 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생명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고, 속에 영원히 죽지않는 삶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불성이나 신성이라고 표현합니다.
문 _ 20세기 철학에서 탈영토화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내용과 같은 개념인지요?
답 _ 20세기 철학에서 ‘탈(post-)’이라는 말이 붙은 개념은, 신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탈’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경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순간 고정불변의 것이 없어집니다. 20세기에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나왔는데, 신비주의가 앞서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무아(無我)라는 개념은, 내가 다른 나로 끊임없이 변할 수 있다는 내용이지요. 신비주의 설명하면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섯 째 챕터 : 신비주의>
천지인 합일이 언제 이루어지나요? 제정신이 아닐 때 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무당입니다. 제정신이 아니게 되면, 놀라운 체험을 해서, 우리가 몰랐던 차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 전공이 신비주의 입니다. 신비주의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이상한 종교라고 오해하지요. 하지만, 신비주의는 엄청나게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서양철학의 아버지인데, 플라톤이 사실 신비주의자입니다. 플라톤은 윤회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 천상세계에 있다가 지상의 물질적 세계로 흘러들어왔고, 지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천상의 세계에서 봤던 아름다움을 기억하면, 이 땅에 안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천상의 기억을,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빨리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철학자라고 했습니다. 지상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를 본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플라톤의 철학을 뒷받침한 사람이 플로티누스라는 로마시대 철학자입니다. 신플라톤주의라는 사조를 만들었습니다. 플라톤 철학을 신비주의 철학으로 해석한 사람입니다. 플로티누스는 궁극적 실제를 “일자(The One)”이라고 불렀는데 궁극적 실제와 하나가 되는 사건이 인간 영혼의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면, 천상의 세게와 연결된 다리를 기억하게 된다고 했고요. 이러한 천상의 세계, 일자와 하나가 되는 사건이 철학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이지요. 서양의 고대철학자 중에서 자기 저작을 완전하게 남긴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입니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가 아랍어로 번역되었는데, 서양의 르네상스 때 그 아랍어 본을 다시 번역해서 읽었습니다.
신비주의 전통은 로마 카톨릭에서 뿐만 아니라 동방정교회에서도 강력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신비주의 전통의 시작이 플라톤인 것입니다. 플라톤은 서양 철학의 아버지이고,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의 아버지면서도, 이슬람 신비주의 전통,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서양 신비주의 전통의 아버지인 셈입니다. 플라톤은 윤회론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인간이 몸을 계속 바꿔서 거듭 태어나고, 철학자만 윤회 사이클을 가장 빨리 마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슬람 신비주의에는 수피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과 하나가 되면 자아가 소멸하고 불멸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방법이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수행법 중에서 몸을 많이 움직이는 수행법 중에 하나입니다.
유대교 신비주의에는 카발라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전차에 대한 메르카바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는 내용은 무(巫) 자와 똑같지요? 카발라에서 하시디즘이라는 유명한 신비주의가 나오고, 유대의 현대 철학자들이 하시디즘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카발라에서 ‘세피로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피로트가 물질적인 세계에서 무한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통로를 얘기해주는데, 인간이 수행을 하고 신의 은총을 받아서 무한의 세계로 되돌아가면 신과 다시 합일한다는 생각입니다. 세피로트를 ‘생명의 나무’라고 부릅니다.
힌두교에도 신비주의 전통이 있습니다. 힌두교의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다’라는 말이 너가 곧 궁극적 실재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한국 19세기, 20세기 신종교에도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동학, 증산교, 원불교의 공통점이 ‘신비적 깨달음’, ‘후천개벽 사상’입니다. 후천개벽 사상은 천국의 시대가 지상에서 열린다는 의미이지요. 한국 신종교의 독특한 점입니다.
마지막 챕터로 이어집니다.
<여섯째 챕터 : 천국/극락은 어디에??
종교의 목적은 지상에서 천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나, 신비주의적 종교의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원불교, 천도교, 증산계통의 여러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후천개벽입니다. 후천개벽은 ‘한국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외국에서 보기에, 우리나라 같은 나라가 없어요.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삼대세습이 있고, 남한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전세계 갈등 중에서 안 갖고 있는 갈등이 없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놀라운 나라입니다.
후천개벽이라는 사상이 한국이 세계를 평정하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인류가 해결못한 문제를 한국이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난이도 초고급 갈등을 여러 개 한꺼번에 풀고 있습니다. 세대갈등, 지역갈등, 남북갈등, 정치경제에서의 갈등 등등.
지금 이 시기에 태어나는 영혼은 엄청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번 생애에 모든 것을 한번에 경험하겠다는 선택을 한 영혼이지요 (웃음)
월드컵 응원 사진 보십시오. 다른 나라에서는 이 정도 사람 모이면, 폭동으로 끝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정도로 모여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도, 쓰레기를 다 치우고 가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출근해요. 엄청난 집단적 엑스터시를 보이고요.
결론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세계 인류가 가야할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웃는 세계입니다. 종교에는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즐겁고 행복하고 깔깔 웃는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기 힘든 세계에서, 종교가 희망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21세기 종교는 깔깔 웃는 종교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종교가 많으면 저도 불려다닐 일이 많아져서 좋겠네요. (웃음).
감사합니다.
<질문>
문 _
우리나라에는 근본주의적 개신교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유독 그런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_
우리나라에 오면 뭐든 극성적이게 됩니다. 명당이라는 곳이 그렇잖아요. 명당은 농도와 사이즈를 같이 키워줍니다. 우리나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시킵니다. 유교도 그렇잖아요. 교통사고 나서 시비 붙으면, “너 몇살이냐” 그러잖아요 (웃음). 불교도 우리나라에서 엄청 세고요. 개신교도 그렇고요. 공산주의도 그렇고, 자본주의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점이,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종교가 극단적으로 발전됐는데, 종교끼리 싸움을 안 하지요. 평화를 극단적으로 애호하는 사회지요. 전세계 종교가 한국에서 엄첨 들어왔는데도, 무속인이 여전히 많습니다. 내림굿을 통해서 무속인이 계속 배출됩니다. 한국이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나라이지요.
문_
종교의 신비적인 면이 진리적으로 밝혀진다면, 종교의 의미 자체가 바뀌어서, 불교/개신교 식으로 분류하는 좁은 의미의 종교 개념이 없어지지는 않을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21세기에 종교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교가 있기는 한데, 종교가 21세기에 맞게 변화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여성에 대한 태도입니다. 여성을 차별하는 종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웃음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에, ‘삶이 고(苦)’라고 강조하면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새로운 형태의 종교성이 구현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종교별 차이를 쉽게 비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세계 종교, 심층에서 만나다’라는 제목의 의미처럼, 개별 종교가 심층적 차원에서는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형태의 종교성을 개별 종교가 구현해야만, 21세기에 선택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존 종교들이 없어지지는 않고요, 기존 종교가 가진 고유성 독특성에다가 21세기에 맞는 보편성을 반영하면서 변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종교의 독특성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하게 되고요. 종교가 없는 사람이 한국에서 48퍼센트입니다. 종교 입장에서는 시장이 굉장히 넓다는 말입니다. 이웃종교와 싸울 필요가 없지요. 종교가 다양한 한국에서는 특히나, 종교가 자기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안 그런 종교는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문_
동양 신비주의 전통의 원류는 무엇인지요?
답_
서양에서는 신비주의가 소수였다면, 동양에서는 신비주의가 주류였습니다. 동양은 심층종교끼리 서로 통하는 사회였지요. 유교 중에서 양명학의 태도도 그랬고요, 한국의 유학자 정약용 선생이 천주교인이 되기도 했잖아요. 다만, 무속인은 심층종교의 측면이 약간 약합니다만, 동양 종교 전체에서 보자면, 비범한 체험을 통해 궁극적인 실제나 불성을 직접 알자는 내용이 동양 종교의 주된 특성이었지요. 19세기 말에 동양 민족종교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것 또한, 동양 종교의 특성이 넓었다는 점에서 가능했지요.
문_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신비주의를 전공하신 학자로서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답_
대종사님처럼 사시면 됩니다. 영육쌍전하시고, 현실 속에서 종교 교리를 구현하는 삶을 사십시오. 대종사님의 후천개벽 사상은 지상에서 천국을 만드는 것이니까, 그런 삶을 사셔야지요. 실천하는 삶을 사시면 됩니다. 좋은 삶을 실천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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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상도 못 봐서 아쉬웠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정신개벽으로 갈등을 해결할 역사적 사명을 이뤄야겠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