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古忠臣 동계 정온, 滅門之禍를 피하게 하다
동계 정온의 지조와 절개를 기리다
정온선생가옥은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년)선생을 가문의 중시조로 모시고 불천위제사를 받들고 있는 고택으로 초계 정씨 가문의 후손들이 15대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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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광해, 인조의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한 정온선생은 만고충신(萬古忠臣)으로 이름이 높았다. 광해군이 어린나이의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강화도로 귀향 보냈다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한 폐륜적인 행위에 대해 좌우 대신들이 나서지 못할 때, 동계는 직접적인 상소문을 올려 광해군을 규탄하였다. 광해군은 이에 크게 진노하였지만 이덕형 등 원로대신들이 동계의 충절을 아껴 그를 위해 변호하였고 주위의 여론을 인식하여 동계를 10년간 제주도 유배형을 명한다. 인조반정이후 다시 벼슬길에 오른 정온선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37)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척화론을 주장하며 인조에게 오랑캐는 청과 화의를 맺지 않아야 함을 4번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상소한다. 산성차자(山城箚子)라 불리는 이 상소문에서 4번째의 상소에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하자 이를 볼 수 없어 자결을 시도하였으며 신하된 도리로 끝까지 임금을 보필하지 못한 것을 죄스럽게 여기며 마지막까지 청과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전의(典醫)와 광주목사의 손에 의해 겨울 살아나게 되었고 더 이상 벼슬에 여한이 없음을 밝히고 이후 덕유산의 모리(某里)라는 곳에 은거하다 인조19년(1641)에 동생의 집에서일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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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재 화엽루(花葉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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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재 문간공 동계정온선생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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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선생은 사후 효종3년(1652)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효종8년(1657)에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온선생의 충절을 기린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는 정려 역시 이 당시에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고택의 솟을대문에 걸려있다. 숙종 때에는 다시 한 번 동계의 절개를 높이 사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또한 동계가 낙향한 후 죽을 때까지 은거했던 모리라는 곳을 기념하여 유림들이 모리재(某里齋)라는 재사(齋舍)를 건립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충절을 기리며 추모하였다. 지금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사당?모리재?서무?화엽루(花葉樓)?내삼문?협문 등과 유허비 1기가 남아있어 정온선생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멸문지화를 모면한 동계 가문
지조와 절개를 지킨 만고충신(萬古忠臣)의 집안으로 명성을 떨치던 동계가문은 일순간에 멸문지화(滅門之禍)의 대위기를 맡게 된다.
그것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또는 이인좌의 난(李麟佐 亂)이라 불리는 반란이 계기가 되었다. 무신란(戊申亂)은 소론이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박필현(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한 사건이었다. 이 무신란의 주동자에 동계 정온의 고손(高孫)인 정희량(鄭希亮 ?~ 1728)이 포함되어 있음으로 해서 일순간에 역적의 집안이 되어 버린다. 정희량은 당시 경상도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여 일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당시 조정(朝廷)에서는 무신거사의 10역적을 김일경, 목호룡, 이인좌, 이웅보, 박필현, 이사성, 정희량, 박필몽, 남태징, 민관효로 결정하여 이들의 집안과 일족이 참수형을 당하거나 해당 지역을 떠나서 피신, 유배 등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정희량에 관한 사실은 초계 정씨 족보에서부터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 이르러 나라에서 불천위로써 정온의 봉사를 허락하기에 이른다. 대역죄라는 가문의 멍에를 지는 사건 속에서도 집안이 멸문지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대부의 여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는 정희량에 대한 반역으로 선대의 충절과 기개의 상징이었던 동계 정온선생의 정신이 묻히는 것이 나라의더욱 큰 손해라고 여겼기에 그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구헌(反求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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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죽여 지내던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킨 인물은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鄭夔弼, 1800~1860)선생으로 피폐한 강동마을을 거의 복구하였다. 야옹 선생은 헌종에서 철종년간에 영양현감을 지낸 동계의 후손이다. 야옹선생은 목민관 재임시 청렴한 인품과 덕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재산과 거처가 없자 당시 안의현감의 도움으로 ‘반구헌(反求軒)’을 건립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구헌의 의미는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을 지닌 “반구어제심(反求於諸心)”에서 유래한다.
이후 점차 과거에 합격하는 인물이 배출되며 옛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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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동계고택의 15대 종손은 정완수(鄭完秀)씨이고, 차종부는 안동의 전주 류씨 유치명 선생의 직계 후손이다. 종부는 12대 만석꾼을 지낸 것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의 딸로 14대 종손 古정우순(鄭禹淳)선생의 부인이다.
고택에 남겨진 영조의 시와 의친왕의 친필 편액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의 사당을 모시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종택, 정온선생가옥(鄭蘊先生家屋)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과 곳간채, 안채, 아래채, 사당, 토석 담장 등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솟을대문에는 효종 임금이 동계 정온에게 내린 시호인 문간(文簡)공을 지칭하여 내려진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가 걸려 있다. 대문을 지나면 인공으로 만들어진 사랑마당 정원과 함께 고택의 사랑채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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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누마루와 누마루의 눈썹지붕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특색이 있다. 하지만 가옥구조 보다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두 분 임금의 친필이다. 정조임금의 친필과 조선왕조 26대 왕이었던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의 친필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채 마루벽에 옮겨진 현판에는 정조임금이 정온 선생의 충절을 기려서 내린 시가 걸려 있다. 원래 안채 후원에 위치한 사당의 문 위에 걸려 있는 것이었으나 지금의 위치로 옮기었다.
日長山色碧嵯峨 種得乾坤正氣多 (일장산색벽차아 종득건곤정기다)
北去南來同一義 精金堅石不曾磨 (북거남래동일의 정금견석부증마)
(崇禎四庚午 居昌府使臣金麟淳謹書) (숭정사경오 거창부사신금린순근서))」
세월은 흘러도 산은 푸르고 높으며,
정의로운 기운은 온 천지에 가득하네.
북으로 가거나(金尙憲이 심양에 간 것)
남으로 오거나(정온을 모시로 온 것) 의리는 매 한지,
금석같이 정결하고 굳은 절개는 아직도 삭아 없어지질 않았네.
숭정사경오(崇禎四庚午)는 고종(高宗)7년(1870)에 해당하니 시가 지어진 뒤 70여년 후에 새겨진 것이다.
시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라는 인물은 병자호란 때 판서로서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는데 화의를 극력반대하고 끝내 청과의 화의를 반대했던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낙향을 했던 척화론자였다. 그로 말미암아 중국 선양(瀋陽)에 잡혀가 3년간이나 있었는데 심문에도 끝내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그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귀국 후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위의 시조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북쪽으로는 김상헌, 남쪽으로는 경상도의 동계 정온의 나라를 향한 충절과 지조를 읊은 것으로 두 인물의 의로움을 이르는 말로 정온의 의리를 칭송한 정조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정온선생가옥 사랑채의 큰사랑을 들어가는 입구, 처마 아래에는 의친왕의 친필로 쓰여진 모와(某窩)라는 편액이 있었다. 지금은 안타깝게 도난을 당해 그 흔적을 대신한 현판을 마련하여 같은 장소에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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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義親王, 1877~1955)은 의왕(義王)·의화군(義和君)이라고도 하며,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장씨(貴人張氏)이다. 1909년 의친왕 이강(李堈)공이 거창의 정온선생가옥 사랑채에서 약 두 달 간 머문 적이 있었다. 이는 구한말 승지를 지낸 이 집 종손 정태균(鄭泰均)과 한양에서 친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이 집을 찾아왔으며, 그때 남긴 친필이 ‘모와某窩’라는 글씨였다. 이는 ‘모리의 집’이라는 뜻과 ‘매화나무 집’이라는 의미로 전해진다.
모와라는 글씨의 모(某)는 본래 매화내무 매(梅)를 지칭하는 것으로 매화나무가 본디 뜻이다. 모와의 와(窩)는 집을 뜻하는 것이니 매화나무 집이라는 뜻인데, 매화란 원래 한해의 가장 빨리 피는 꽃으로 가장 추운 입춘을 전후로 열린다. 이러한 뜻에서 매화는 선비의 굳은 의지와 신하의 충의?절의의 표상으로써 비유되어 왔다.
그러니 ‘매화나무 집’ 모와(某窩)란 충의와 절의가 있는 집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리의 집’을 뜻하는 ‘모와’는 바로 문간공 동계 정온이 낙향한 후 머물렀던 곳인 덕유산의 ‘모리’이다.
즉, 모와란 영조의 시조에서와 같이 충의와 지조로써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동계 정온의 집을 일컫는다.
14대 종손 古정우순(鄭禹淳)씨와 종부 최희(崔熙) 여사가 의친왕 ‘某窩’친필과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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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가의 맏며느리 종부 최희(崔熙, 84세)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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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댁의 장녀로 초계정씨와 혼인을 맺으신 정온선생가옥을 지키고 있는 종부 최희 할머니는 올해 84세이다. 이분은 그 음식맛이 일품이라는 평이다. 수란, 전복찜, 육포, 법주 등 사대부가의 음식에 있어서 그 전통을 유지하고 계신다.
16세에 시집을 오셨다. 당시 이곳 거창부근까지 2틀에 걸쳐 오셨다. 대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또 다시 택시를 타고 거창까지 오셨다한다. 그리고 당시 시아버님께서 동래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보내주셨다. 흐뭇해하신다.
당시 혼례행차 때 가져온 각종 혼수물품의 목록인 혼수물목, 신랑의 사주(四柱)를 적은 사성, 신부집에서 혼례 날짜를 택일해 신랑집으로 보낸 연길(涓吉), 혼인의 문서라 할 수 있는 혼서(婚書) 등이 있었는데, 최근에 그 중 일부가 도난당했다고 한다. 많은 종가의 대부분 종부들은 시집을 온지 오래되기도 하였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혼례 때의 물품들이 남아 있지 않아 개화기의 혼례풍속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흔치 않다.
종부의 남편이자 종가의 14대 종손이신 古정우순(鄭禹淳)선생께서는 거창교육장, 함양교육장을 지내신 지역 교육계의 원로셨다. 약 13년 전에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종부는 남편이 돌아가시고 1년 상을 치러내는데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살아계실 때와 같이 상을 차리고 봄/여름/가을/겨울에 맞는 옷을 항상 준비하여 방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선친께서 끽연을 하시는데 이용했던 곰방대와 커피를 상을 내어온 후에 올려야 했다.
남편이 돌아가신 이듬해 꽃이 피는 시기에 최희 할머니가 지은 ‘가사’가 있어 눈에 띤다. '회심곡'이라는 가사로 먼저 떠나보낸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표현한 차분하면서도 품격 있는 어조로 노래한 가사이다. 가느다란 붓을 이용한 세필로 전통시대의 규방가사라 할 수 있다.
정온선생가옥 종부 최희(崔熙)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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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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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