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5일 ‘외보’란에는 흥미 있는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제목이 ‘자동차 수효’라고 붙어있다. 프랑스의 자동차 잡지에 나와 있는 세계 각국의 자동차 대수를 인용 보도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미국은 13만대, 영국은 8만 4841대, 법국(프랑스)은 4만 6114대, 덕국(독일)은 24600대다. 동양에서는 일본에만 10여대의 자동차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한 대의 자동차도 없던 때였다.
물론 외국의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에 관한 소식은 훨씬 이전부터 눈에 띈다. 황성신문의 ‘파리의 자동차’(1907. 6.19) 라는 기사는, 프랑스 파리에 자동차가 가장 유행하고 있는데, 번화한 거리에서는 30분내에 자동차가 40대 이상 통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전한다.
그 가격도 한 대에 2만~5만법(법:프랑)으로 아주 비싸다고 한다. 신보는 프랑스에서 개최된 자동차 경주대횡서 독일의 멀쎄트스(메르세데스)에서 제조한 자동차가 우승했다는 소식(1908. 7. 15)을 전하기도 하고, 독일에서 개최된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 원동력을 전달하는 그릇(엔진)이 터져서 네 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1909. 7. 27)도 보도한다.
순종 어차
자동차의 기능과 모형에 대한 새로운 소식도 이어진다. 구라파의 몇몇 나라들은 자동차를 frns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연구 중이라는 소식과 함께 일본 육군도 2만 3000원(元)으로 군용자동차 2대를 구입하여 그 사용방법을 연구 중이라는 소식(황성신문, 1910. 3. 2)도 있다.
자동차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공기 저항을 줄이도록 물고기 모양으로 자동차를 제조하게 되었다는 기사(대한매일신보,1910. 6. 15)도 나온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3년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고종의 황제 격상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준비하면서 고종 황제를 모실 자동차를 수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공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미국으로부터 들여왔다는 이 승용차가 어떤 차종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이 새로운 문명 이기의 도입에 관한 어떤 공식적인 기록도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동차마저 전해오지 않는다. 1908년 프랑스 공사가 자동차를 타고 서울 거리에 등장하여 백성들을 모두 놀라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던 영국인 알프레드 맨험이 1909년 2월 20일 영국 화보지인 ’런던 그래픽 뉴스‘에 실었던 사진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일본 강점 직후 데라우치가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후 1911년 자동차 2대를수입하였다는 사실이 처음 공식문건(‘조선총람’)에 등장한다. 고종이 타다가 순종에게 물려주었다는 어차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당시 전국에 하우차(소달구지)가 3만337대, 하마차(말수레)가 1804대, 인력거가 1217대뿐이었다고 하니, 거리 풍경을 짐작할 만하다.
[권영민 서울대교수·한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