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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묵상글 들 ( 연중 제6주간 금요일. -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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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어제 믿음의 부자에 대해서 얘기한 야고보서는
오늘 죽은 믿음, 쓸모없는 믿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 생각을 시작하자 즉시 떠오른 것이
여호와 증인을 믿는 청년들의 양심적인 병역 거부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믿음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였고
그래서 그에 따른 불이익과 박해와 고통을 감수합니다.
그러니 이들의 믿음은 그들의 삶과 실천에 있어서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으며 작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믿음이 옳은 믿음이냐 아니냐를 떠나서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그들의 믿음보다 옳다고 믿는데
그렇게 믿으면서도 그 믿음의 작동이 그들보다 못하다면
우리의 믿음이 그들의 믿음보다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우리의 믿음이 그들보다 나은 믿음이고 옳은 믿음일지라도
고장 난 기계처럼 우리의 삶과 행위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옳은 믿음인지 몰라도 살아있는 믿음은 아닙니다.
이것을 요즘 신학의 실천적 무신론과 연결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믿기는 하는데
실천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 실천적 무신론이지요.
다시 말해서 주일 성당에서는 믿는다고 하지만
성당을 나와 살면서는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래서 하느님이 없는 듯이 사는 것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는 돈과 욕망을 쫓아 살지 하느님 뜻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지 하느님을 믿어서 행복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하지 하느님이 안 계셔서 불행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행복에 하느님이 전혀 상관이 없으면
하느님 계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느님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죽은 믿음이란 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믿음을 왜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까?
마음의 위안을 위해?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아니고 죽고 난 뒤를 위해?
그러므로 살아있는 믿음이란
'믿는 사람이 왜 저래'라거나
'믿는 사람이 우리와 다를 거 없네'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우리의 삶과 실천에 하느님이 살아있고,
그래서 믿음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하며,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지금 우리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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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는지,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비워질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비우는 일은 결코 스스로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진 분에 의해 비워지기 때문입니다. 곧 받아들여 진 분이 중심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시어, 우리를 짊어지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십자가로 지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주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도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고통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사랑의 십자가를 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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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혹 십자가를 생각한다 해도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그들은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섬김보다는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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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믿음과 실천으로 얻는 목숨
믿음과 실천으로 얻는 새 목숨이 부활 신앙의 은총입니다. 오늘 말씀의 맥락입니다.
모처럼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는 스승의 질문에 제자들이 우물쭈물 하는 동안에 베드로는 용기를 내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용감한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엄중한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고 십자가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해 강조하심으로써 구도의 죽비를 내리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오늘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가 강조하는 바, 믿음과 실천이 한데 만나야 가능한 부활의 조건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질 리가 없고, 실천하는 않고 머릿속이나 입으로만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믿음이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짊어지는 십자가는 정직하게 우리네 영혼을 착실하게 성장시키고 성숙시킵니다.
백 번의 넘어짐 끝에 또 다시 시도한 일어남으로 인간이 비로소 성취를 해 냅니다. 성취를 위해 필요했던 백 번의 넘어짐은 허사가 아닙니다. 무릇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는 이 넘어짐과 일어남의 교훈을 줍니다. 그 넘어짐 속에는 갈등도 있고, 번뇌도 숨어 있으며, 시행착오와 실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모든 실패의 넘어짐이 우리를 착실하게 성장시키고 성숙시킵니다. 믿음의 키를 성장시키고 영성의 깊이를 숙성시킵니다. 이를 합해서 내공(內功)이라 합니다.
이 내공은 정신의 의식이 성장하고 영혼의 영성이 성숙하는 데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하며 다른 사람들과 맺는 인간관계에서도 얻어지고 또 발휘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또는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성령께서는 일과 인간관계에서 모두,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성찰하고 통회하는 작은 연옥 체험을 주십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작은 심판을 받으며 우리가 정화되고 또 성화되는 은총을 받습니다. 실천이 가져다주는 영적 유익이 이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이 위대한 고백을 예수님께 바치고 나서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졌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힘드셨던 순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심장이 요동치고 허파가 짓눌리는 순간이 아니라, 가장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던 그 순간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가장 먼저 신앙을 고백하며 충성을 다짐했던 수제자가 스승을 제일 먼저 배신하였습니다. 어쩌면 용감했던 신앙 고백보다도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비겁한 체험이 더 베드로의 신앙을 키워준 십자가가 였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에 갈랠래아로 그를 찾아가서 다시 한 번 신앙 고백을 다짐받으심으로써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다시는 제자 노릇을 하지 않을 것처럼 도망치다시피 스스로 쫓겨간 그 호숫가로 쫓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엄한 심판자로서 그를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코 베드로를 당신의 수제자로 쓰시려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자로서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 번의 부인 횟수만큼 세 번의 질문을 던지셨고, 이때마다 그는 매우 괴롭고 부끄러웠겠지만, 사랑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로써 아픈 만큼 배신의 상처는 아물었고 나았습니다. 신앙 고백의 부족함을 십자가 발언으로 보충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실제 행동으로도 스승은 수제자를 가르치셨다고 하겠습니다. 고해성사의 백미를 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께 대하여, 혹시 십자가도 짊어지지 못하는 또 다른 실패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라는 계시 진리의 복음성은 바로 이 대목에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분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몸소 겪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상 숭배로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한, 당신이 먼저 나약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일어나서 당신의 십자가를 따라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아니, 함께 짊어지자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갈등에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번뇌를 뿌리칠 필요도 없습니다. 시행착오도, 실패도 다 우리의 신앙 농사를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거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다시 얻는 새 목숨으로 부활을 약속하는 희망의 종교이면서도 또한 십자가의 지렛대로 헌 목숨을 버리게 함으로써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현실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세상에 나가 실천을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시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야고보의 권고를 들려 드립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르 8,36) .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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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어떤 분으로부터 ‘난’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워낙 무엇을 키우는데 재주가 없어서 각종 화초를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제대로 키워보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책을 사서 난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배운 대로 난이 좋아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서 매일 관심을 두고 바라보았습니다. 특히 정성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에, 매일 닦아주면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정성을 기울이다 보니, 난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만 변화도 금방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잎이 자라는 것도 보였고, 잎에 약간의 이상이 보이면 마치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알기 위해 노력하고 정성을 기울이자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난이 제게 무엇을 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도 무엇을 줘야지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데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정성을 다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려면 먼저 알기 위해 노력하고 여기에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로만 외치는 공허한 사랑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잘 따르려면 어떤 조건을 채워야 했습니다. 첫째,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희망과 계획보다 제자 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가져야 제대로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따를 때 세상의 목숨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부와 명예를 좇아서 하느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데 더 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의 뜻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과연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미워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입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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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는 것이 재능입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뛰지도 않으니까(이마무라 쇼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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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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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카이스트(KAIST)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원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입니다.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있고,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대학입니다.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인정받는 대학입니다. 그런데 이 대학에 합격해 놓고도 어찌된 일인지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뉴스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카이스트의 학생처장은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야하는데 원인을 모르니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카이스트에 들어오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열심히 공부해서 막상 들어오니 새로운 목표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생처장은 신입생들에게 입학하기 전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시하였습니다. 그것은 ‘꽃동네’ 체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꽃동네에서도 학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였습니다. 학생들은 누군가에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카이스트에서 공부해야 하는 목적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노력으로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야한다는 목표였습니다. 카이스트에서 공부해야 하는 목표가 생겼기에 학생들은 더 이상 자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목표 2가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고통과 두려움의 상징인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구원의 방주가 된다고 하십니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될 수 있듯이,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는 삶의 목표이며,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에게 십자가는 가난한 이웃들이었습니다. 이태석 요한 신부님에게 십자가는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이었습니다. 오웅진 요한 신부님에게 십자가는 얻어먹을 힘만 있었던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이었습니다. 제게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빨간불이 들어오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빨간불이 있기에 더욱 조심하게 되고,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신문사의 일과 함께 병행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일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문홍보를 가게 되면 부득이 성당 미사를 다른 신부님께 부탁해야 합니다. 시간이 허락되고, 건강이 허락된다면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려고 합니다.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목표 두 번째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십자가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이 있는 십자가는 희망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등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인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맺어지는 인연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지고 가려는 사람, 그러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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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 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 -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 피정 5일차-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래야 존엄한 삶이요 인간다움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끝까지 남는 것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랫동안 인용했던 말마디 둘도 다시 생각납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반드시 지켜져야하는 우선 순위요 우선 순위가 바뀌면 삶은 주객전도의 혼란스런 삶이 될 수 있고, 하느님 믿음의 중심이 실종되면 건강과 돈은 절대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혈연도 탐욕 앞에는 무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믿음이 중심이 되어야 탐욕도 절제되어 서로간의 형제애나 참된 우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유산문제로 파탄나는 가족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후손에 내려 줄 가장 소중한 자산은 하느님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의 강론 제목은 ‘믿음의 여정-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입니다. 순례 여정 내내 ‘여정’이 주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하루의 여정은 주로 성지 순례 여정으로 믿음의 여정과 직결되는 하루였습니다.
오전 처음에는 세계 7대 경관중의 하나라는 주상절리 중문 전망대를 감상했고 이어 산방산 곁을 지나면서는 산방굴사 절에 대한 초의 선사와 추사 김정희와의 감동적인 우정에 대한 일화도 들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8여년의 제주도 유배중 초의 선사가 방문하여 6개월간 산방굴사 절에 머물면서 추사를 방문하여 위로하며 우정을 돈독히 했다는 일화입니다. 아마 전무후무한 두 분간의 우정의 사랑일 것입니다.
이어 도착한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였습니다. 참으로 눈물겹고도 아름다운 신앙의 일화 가득한 분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소개된 전설적인 분입니다. 정약현의 딸이자 다산 정약용의 조카로 장부는 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황사영이었고, 제주도에 유배되어 관비로 생애를 마친 그러나 시종일관 신앙에 충실했던 분입니다.
제주도 유배시 2살짜리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 어부에 맡겨졌고 그 후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전설적인 일화는 언제 들어도 가슴 먹먹하게 합니다. 참으로 현세에서는 어떤 희망도 없이 하느님께만 신뢰와 희망을 두고 기도와 믿음 만으로 평생 한많은 생을 살았을 정난주 마리아입니다.
오후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에 들렸습니다. 바다를 전경으로 한 참 아담하게 마련된 성당이요 기념관이었습니다. 제주도의 천주교 역사는 물론 26세에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갖춰진 기념관이었습니다.
참으로 정난주 마리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두 분의 믿음이 가슴 깊은 감동으로 와 닿았던 어제의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오늘로서 5박6일의 제주도 순례 여정은 끝납니다. 얼마나 무궁무진의 깊이를 지닌 보물섬 제주도 인지, 아마 제대로 보려면 한 달은 커녕 평생을 봐도 다 못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제 오늘 오전 일정만 마치면 오후에는 수도원에 돌아갑니다. 끝은 시작이듯 믿음의 순례 여정은 다시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의 순례 여정이 끝나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하기까지 한결같은 믿음의 삶으로 주님과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 역시 줄기차게 실천과 함께 가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그대도 보다시피,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믿음이 답입니다. 늘 실천과 하나된 믿음으로 하느님의 벗이 된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이어 야고보 사도의 결론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우리 마음을 두드립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실천적 믿음에 대한 구체적 결정적 답을 주십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새삼 믿음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자 버림과 비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늘 읽어도 새로운, 믿음을 새롭게 하는 좌우명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게 하루하루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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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제1독서에서 ‘야고보 서간’을 읽고 있습니다.
이 서간은 무엇보다 신앙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데,
행동과 실천이 붙따라야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주제의 핵심 단락이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오늘 말씀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지금껏 이웃을 향한 자비와 사랑에 관한
수많은 말을 늘어놓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을 참으로 실천하며 살았는지 돌이켜 보면,
적지 않은 경우 그저 허울 좋은 말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을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초주검이 된 사람을 온 정성으로
돌본 착한 사마리아인처럼(루카 10,29-37 참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나’와, 정작 길에서 비슷한 처지의 궁핍한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나쳐 버리는
‘나’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하신 당신의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됨’이란 결국 말과 행동의
거리를 줄이는 삶, 곧 행동하는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이
하나가 되는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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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제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된 꾸중을 들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사람의 배척을 받고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주님으로 모시고 내 입으로 부르는 주님이 진정 나에게는 누구이며, 내가 그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기대하며 그분을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활 태도가 바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그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절)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뜻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아이다. 이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의 길은 이제 우리가 더욱 당신을 닮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습을,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버릴 수 있고, 끊을 수 있고, 죽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을 닮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항상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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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 35)
꽃도
꽃망울로
시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피 흘리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십자가의
목숨이다.
참된 사랑에는
십자가의
목숨이 있다.
이것밖에는
길이 없다.
목숨으로
목숨을
구하는
복음이다.
목숨의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복음의 길이다.
목숨을 바친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를 돌보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된다.
누군가의
사랑에 빚진
우리들
목숨이다.
목숨은
십자가를
만난다.
참된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알게되는
사랑의
복음이다.
사랑은
꽃길이 아니라
끝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의 길이다.
목숨을 내놓는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
십자가 없이는
목숨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서로를 구하는
변화의 시작에는
언제나
목숨을 내놓는
삶이 있었다.
십자가는
삶의 변화이며
목숨은 목숨에
갇혀있지 않는
하느님의
생명이다.
힘겹게
밀어 올리는
십자가의 삶에서
다시 삶을 만나고
다시 사랑을 찾는
빚진 목숨들의
기도가 있다.
길을 잃은
목숨들에게
예수님과 복음은
목숨의
길을 알려준다.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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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4ㄴ-38).”
이 말씀을 단순하게 “살겠느냐? 죽겠느냐? 하나를 선택하여라.”,
또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여라.” 라고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둘 중 하나를 마음대로 선택하여라.”가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라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살리려고(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마태 18,12-14).
따라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사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에 관한 ‘단순한 지침’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사느냐, 죽느냐?’에 관한 가르침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비장한 각오’를 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아무도 이 말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 뒤를 따르려면”은 “나의 제자가 되려면”인데,
뜻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뜻으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말리다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혼나는 이야기가 있는데(마르 8,33),
우리는 편안하고 쉬운 길만 찾으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내 안에서’ 나 자신의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는 ‘다른 법’을(로마 7,23)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버리는 일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로마 7,25).
즉,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마음 수행’만으로는 자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온갖 고통들과 어려움들을 감내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에 항상 십자가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쁨, 행복’과 ‘십자가’가 교대로 찾아오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에 편하고 쉬울 때에만 신앙생활을 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중단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목적지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으니 십자가를 피해서 갈 수도 없습니다.
힘든 일이 닥치면 정면 돌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세속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는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는 것은 허무한 일이 될 뿐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제 목숨을 잃으면’이라는 표현 때문에,
‘온 세상도 얻고, 제 목숨을 잃지도 않는’ 경우도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온 세상’과 ‘제 목숨’은 대립 관계입니다.
세상 것을 욕심내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세상 것에 대한 미련과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둘 다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마태 6,24).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목숨(영원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 살 것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한 인생을 살 것인가?” 라는 갈림길에서,
고민하지 말고 ‘허무’를 버리고 ‘영원’을 선택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면”이고,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버림받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
이 말씀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이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종말과 재림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죽기 전에 그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말씀 때문에,
종말과 재림의 날에 관한 말씀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기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천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언제 이루어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뜻하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지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은총입니다.
물론 평소에 회개하면서, 준비를 잘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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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우리의 성소는 기쁨입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기쁨을 찾아가는 여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과정입니다. 이 여정이 바로 제자뿐 아니라 군중까지도 행복으로 이끄는 예수님 추종의 길이지요. 오늘의 말씀들은 왜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8,3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데 필요한 조건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포기 이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그나마 자신 좀 더 잘 버리려면, ‘버려야 하는 자신’을 먼저 잘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알지 못하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자신의 어둠과 죄악을 알아차리는 순간, 주님 친히 빛을 비추시어 나를 비워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들 가운데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으로 인식했던 바오로 사도나, ‘가장 보잘것없는 종’이라 했던 성 프란치스코야말로 자신을 알아차려, 온전히 자신을 버린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지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바램, 시기와 질투, 미움과 차별, 탐욕과 거짓 등 이기적 자아를 비워낸 사람입니다. 결국 ‘자신을 버리는 것’은 자신이 누군인가를 분명히 깨달아 자기중심에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로 향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환란과 시련은 물론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라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요 복음 자체이신 주님과의 깊은 유대 안에서, 현세의 소유에 기대지 말고 오직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처지와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과 대인관계, 사건들, 현재 겪고 있는 일들, 내 안의 갈등과 욕구 등 모든 것을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놓는 자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내놓기보다는 살리려 애쓰기 십상이지요.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것이 바로 ‘동기’입니다. 버리고 고통을 견디며 삶의 십자가를 질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8,35)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마음이 내켜서,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른다면 위선이요, 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과 행복은 바란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빈그릇을 준비하고 일부가 아니라 ‘전존재’(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의 어둠을 똑바로 알아보게 하시고, 죽음을 호흡하듯 절박하고 진지하게 매 순간 내 생명을 내놓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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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꼭 끌어안으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는 예수님의 강력한 권고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제 가슴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르는 사람’ 즉 당신의 제자(弟子)가 되기 위한다면,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①자신을 버리고. 40년 가까이 버리고 또 버린다고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산더미 같습니다. 징글징글한 악습,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무력감과 우울감, 끝까지 남아 괴롭히는 깊은 상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자만심...
버리는 일, 말은 쉽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고, 나 자신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린 어느 날, 그토록 염원했던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리라 확신합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기꺼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토록 염원했던 주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②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떤 것들인가? 생각해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니게 되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큰 십자가입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현실 또한 만만치 않은 십자가입니다. 매일 백번 천번도 더 탈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달픈 삶의 현실 역시 큰 십자가입니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는 십자가 중의 왕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십자가들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보다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십자가들을 짊어지라 하십니다. 주어진 십자가들을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라 하십니다. 꼭 끌어안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십자가는 점차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성장과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선물 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③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매일 새롭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한 고을에 오래 머무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셨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이동도 이동이지만, 영적인 이동 역시 거듭되었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삶으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어찌 그리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 다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런 순간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참했던 순간들, 죽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깊은 상처,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 큼지막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흑역사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들, 부단히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어제의 나를 딛고 기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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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결국 죽는 사람은 미지근한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죽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생존’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죽으려 하지 않으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면 사탄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말은 이웃의 생존을 위해 내 생존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하시는 말씀이 이 뜻입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제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은 삽니다. 록펠러는 인생의 절반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자신의 돈으로 이름 모를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대줌으로써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몸도 건강해져서 90세 넘게 살았습니다.
죽으려 한다는 말은 나의 생존을 위해 모으는 것을 다른 이의 생존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록펠러에게 수술비를 지원받은 여자아이가 쓴 장문의 감사 편지가 그의 인생과 건강을 되찾아준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받게 되어있습니다. 사랑은 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 위해 죽으면 오히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1987년 ‘로버트 네렘’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 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표준 토끼 모델’이라는 간단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환경에서 토끼들에게 고지방 식단의 사료를 먹이고 마지막 단계에서 토끼들의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박동수, 혈압 등을 측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콜레스테롤 수치는 모두 같이 높았습니다. 심장마비나 뇌졸중을 일으킬 확률이 높아진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별 기대 없이 토끼들의 미세혈관을 관찰하였습니다. 네렘 박사는 토끼들의 동맥 안쪽에 비슷한 지방 성분이 쌓여있으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토끼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한 무리의 토끼들은 다른 토끼들보다 혈관에 쌓인 지방 성분이 60%나 적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라며 원인을 찾았지만 이 결과를 설명할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네렘 박사와 팀원들은 단서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방이 덜 쌓인 토끼들은 최근 그의 연구에 합류한 ‘무리나 레베스끄’가 돌본 토끼들임이 밝혀졌습니다. 레베스끄가 토끼들에게 사료를 줄 때 다른 연구원들이 주는 것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토끼들에게 사료를 주며 말도 걸었고 종종 껴안고 쓰다듬었으며 토끼들을 귀여워해 줬습니다. 사랑을 준 것입니다.
네렘 박사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애정이 어떻게 물질적인 육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것은 과학자로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실험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실험 조건을 더 엄격하게 통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레베스끄가 돌보는 토끼들과 그냥 사료만 준 토끼들의 동맥을 다시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네렘 박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힘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이 결과를 세계적 권위의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등재하였습니다.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식습관 토끼들에게 말을 걸어주고 안아주고 애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식단에 따른 많은 부작용이 사라졌습니다. 사람과 토끼가 맺은 관계가 이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물질은 물질이고 애정은 애정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의사와 과학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랑은 분명 있고 이것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받아야 하는 실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줄 때 받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은 레베스끄라고 하더라도 징그러운 파충류를 두고 실험했다면 그만한 사랑을 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인데 내가 먼저 사랑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웃을 모기처럼 빨아먹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죽어가고 죽어서는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죽는 법을 배워 영원히 사는 천국으로 향해야 합니다. 구원의 길은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이 죽어 사랑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랑으로 죽기를 거부할까요? 왜 스스로 죄 많은 사람이 되어 죽는 길로 가는 것일까요? 왜 남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주면 바보 소리 듣는 세상이 되어버렸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우리는 사랑으로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고 전해야 합니다. 두 방향밖에 없습니다. 살려고 하든, 죽으려고 하든.
이 단순한 진리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살려고 하면 결국 죽는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보통 그런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방향을 잡으려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가만있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 위에 가만히 있으면 바다로 흘러가 영원한 미아가 됩니다.
현재 유튜브판 ‘골목 식당’을 운영하는 ‘장사의 신’이란 채널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주인공은 은현창 대표입니다. 그는 가난한 반지하 단칸방에서 여러 식구와 함께 살았습니다. 비가 오면 언제 물이 집으로 흘러들어올지 몰라 항상 망을 보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항상 돈이 없어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자장면 배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하고는 곱창집을 하였습니다. 당시 곱창을 배달하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곱창을 배달하겠다는 아이디어로 대박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한 가게에서 버는 돈은 한정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프랜차이즈를 하자니 곱창을 표준화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랜차이즈가 쉬운 치킨집에 도전합니다. 처음엔 손님이 너무 없었습니다. 혼자 튀기고 전화 받고 배달하며 단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점점 입소문이 나고 많은 수의 프랜차이즈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 한 가게도 망하지 않고 다 잘 팔리는 치킨 프랜차이즈를 만든 것입니다.
대신 그가 얻은 것은 병이었습니다. 비만 오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온종일 누워만 있어야 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이때 프랜차이즈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팔 생각이 없었지만, 몸이 망가져서 어쩔 수 없이 팔았습니다. 그의 통장에 찍힌 액수는 ‘200억’이었습니다. 이 숫자를 보는 순간 그가 기뻤을까요?
“이게 다야?”
대부분 성공만 바라며 뛰어온 사람들이 느끼는 허탈감입니다. 모래성을 공들여 평생 쌓은 것입니다. 그는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백종원’ 씨가 하던 골목식당과 같은 프로를 자신의 장사 경험으로 무료로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자신에게 더는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장사가 안되는 집들의 코치도 해 주고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가게에서는 수백만 원어치를 팔아줍니다. 그는 웃으며 말합니다.
“유튜브 수입, 내가 이래서 맨날 적자야!”
장사꾼이 적자를 낼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내가 살기 위해서 끝까지 가보았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안 사람입니다. 돈을 벌었다가, ‘아, 이건 아니지!’라고 하며 다시 남을 위해 살려고 했다가, ‘아, 이러면 우리가 굶어 죽겠다!’라고 하며 왔다 갔다 한다면 나만을 위한 삶이 나를 죽인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어떻게 죽던지 죽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벌든지 이웃을 위해 살든지 해야합니다. 그래야 다시 뒤로 돌아가는 일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려고 했다가 평생 그것이 자신을 죽이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방향을 확실히 정합시다. 나 자신을 위해 살려고 죽도록 일하던지, 아니면 사랑을 위해 죽으려고 살던지. 결국, 죽는 사람은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람이 아니라 미지근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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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6 주간 금요일-묵상과 기도
야고보 사도는 믿음이 있다.는 이는 실천하라.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것 처럼 실천하라. 그렇게 하여 그는 의롭게 되었다. 하느님의 벗이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떤 이가 당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구한다. 그러기에 세상의 자기를 버리라. 그리고 복음의 자기를 따라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 2,14-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마르 8,34―9.1
실천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지 않고 그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믿음은 실천에 동등한 자리에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곧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합니다. 농사를 짓고자 하는 이는 농사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과 함께 씨를 뿌려 많은 열매를 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하늘에서만 말씀하지 않고,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구원의 열매를 내게 하셨습니다. 믿음은 마음의 희망에만 두고 또 바라기만 하지 않고 믿음의 실제, 그 참됨을 실천합니다. 그 실천으로 그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면서 그 따름은 자기를 버리는 것. 그가 걸어가야 할 당연의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따르는 것이다. 실천이다. 하였습니다. 실천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어려운 결단.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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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십자가는 짐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대화를 할 때 특히나 고민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당연히 신앙생활을 할 때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대부분 이 말을 하면서 빼먹는 게 있습니다. 복음이나 강론 때 듣는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대화 중에 언급을 단 한 번도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질 때 그 전제조건으로 자기부인을 언급하셨는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자기부인이 전제되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씀과 같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자기부인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십자가는 마치 소의 코에 다는 코두레와 같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소코두레를 소에게 달아주는 이유는 원래는 힘이 센 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코두레를 당기면 소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그 고통으로 인해 제어가 되기 때문에 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는 본능적으로 자기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마음에는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또는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좋게 발현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후자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도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것도 다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보면 주종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예속관계입니다. 종속과 예속은 조금 다릅니다. 다 같은 의미이지만 상대적으로 종속은 힘의 논리가 적용되지만 예속은 힘의 논리로 본다면 수평관계입니다. 다만 그게 수평이지만 구속력은 있습니다. 마치 직장에서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직급상은 수직관계이지만 한 인간대 인간으로서는 동일한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바라볼 때는 수평관계가 되어야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만약 우리를 로봇처럼 창조를 하셨다면 우리는 비참한 존재가 될지 모를 일입니다. 예속도 매인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이건 강제가 아니고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거부도 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에 스스로 순응하는 것입니다. 사실 겉모습은 매인 것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예속관계라고 해도 그 속에는 한계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은 소에게 어떤 고통을 가해서 그 힘으로 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코두레를 하지만 하느님께서도 단순히 그런 수단으로 십자가라는 것을 인간에게 허용하셨을 거라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십자가가 하나의 고통과도 같고 짐과도 같은 존재로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짐과 고통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가 코두레로 제어되듯이 인간의 자아를 통제해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등산을 할 때 우리는 배냥을 메고 갑니다. 마치 베낭과도 같을 겁니다. 베낭은 무게가 있어서 버거울 수도 있지만 베낭은 단순히 짐을 넣기 위한 가방인 도구가 아니라 비상시에 사고가 일어날 때 허리의 부상을 예방하는 수단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원래 누구나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거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데 그마저도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남용하며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자기부인이 될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모순과도 같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애시당초 왜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고 그냥 하느님께 무조건 순종하는 피조물을 창조하셨더라면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로봇을 만들어 단순히 로봇을 조종하는 존재이시라면 그런 하느님의 존재가 얼마나 우스운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인 몸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우스운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매일이라는 말씀이 생략됐지만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는 십자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겠지만 그걸 피하면 또 다른 십자가가 오는 것을 짧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이 하느님께로 잘 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형구로 생각한다면 그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무거운 십자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걸 그렇게 인식하고 가도록 노력을 한다면 지금은 이 십자가를 잘 이해를 할 수도 없겠지만 언젠가 우리는 그 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걸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저도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날이 오기를 희망만 할 뿐입니다.
지금은 그걸 깨닫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은 확신합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만의 십자가가 다 있을 건데 그건 하느님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을 하면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무엇 때문에 신앙의 길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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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야고2,14~24.26)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4-17)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외모로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사실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거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런 측면에서 야고보는 1장 1~13절 단락에 이어지는 14~26절 단락에서 믿음은 반드시 실천(행함,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사실과 실천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윤리적 실천 의무를 모든 성경가운데 가장 명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본 서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가 바로 오늘 독서이다.
믿음을 통한 의로움(구원) 즉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강조하는 바오로의 주장 (로마3,21.22; 갈라2,16)과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야고보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행동'(행위, 행함, 실천)에 해당하는 '에르가'(erga)란 용어를 바오로와 야고보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오로와 야고보가 사용하는 '에르가'의 의미를 규명한다면, 이러한 오해가 풀리며 결코 두 사람의 메시지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바오로는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행위는 할례의 준수와 같은 '율법적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구원이 결코 율법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공로를 제쳐놓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선행이나 공로도 하느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행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지 못한 자로서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에게 있어서의 '행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거듭난) 자가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행위(실천)를 의미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은혜로 믿었다면 믿고 난 후에는 당연히 믿음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위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웃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구체적인 행위등은 참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나 야고보는 모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고, 다만 야고보가 그 믿음이 거짓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실천(행위)으로써 증명된다는 사실을 보다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강조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에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5~16)
야고보서 2장 15~16절은 야고보가 이 서간을 쓰던 당시초대 교회내의 실제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본문의 '형제'에 해당하는 '아델포스'(adelphos)와 '자매'에 해당하는 '아델페'(adelphe)란 표현은 그리스도로 맺어진 공동체, 즉 교회의 일원으로서 남자와 여자 교인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이다(1코린12,12~27).
그리고 '헐벗고'로 번역된 '귐노이 휘파르코신'(gymnoi hyparchosin)은 문자적으로는 벌거벗은 상태(be naked)이지만, 사실은 거의 옷을 입지 못한, 또는 남루하여 적절한 의복을 입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날 먹을 양식'으로 번역된 '에페메루 트로페스'(ephemeru trophes)는 '매일의 양식'을 의미한다. 또한 '없는데'로 번역된 '레이포메노이'(leiphomenoi)의 원형 '레이포'(leipho)는 '결핍하다', '없다'란 뜻으로서 음식의 결핍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속한 교회내의 지체들 가운데는 충분한 의복 뿐만 아니라 음식 또한 먹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던 형제, 자매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교회 안에서도 인간으로서 생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갖추지 못한 채 극도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비극적 상황을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이제 야고보는 2장 15절에서 제시한 비참한 상황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실제적으로 돕지 않고, 그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아무 유익도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평안히 가서'에 해당하는 '휘파게테 엔 에이레네'(hypagete en eirene)는 서로 헤어질 때 유다인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말이다.
이것은 원래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의 행복을 소망하는 깊은 사랑의 의미가 담긴 인사였다( 마르5,34; 루카7,50).
여기서는 헐벗고 굶주린 형제들에게 '하느님께서 너를 평안하게, 즉 결핍에서 채워주실 것이니 그냥 가라'고 하는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여기서 스스로 돕지 않고, 단지 입술로 평안함을 빌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잠언 3장 28절에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고 했다.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보내면서 평안함을 비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몸을 따뜻이 녹이고'에 해당하는 '테르마이네스데'(thermainesthe)는 '테르마이노'(thermaino)의 중간태 명령형으로 '스스로를 덥게 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배불리 먹으시오'에 해당하는 '코르타제스테'(chortazesthe)도 중간태 명령형으로 '스스로를 배부르게 하라'는 의미이다.
이런 단어들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대책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교회 공동체 내에 가난한 자들이 궁핍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교인들이 그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공급해 주기보다는 값싼 동정의 무책임한 말로만 떠들어대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고 말로만 반응하는 그들의 반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나 자매에게 베풀어 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행위조차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태도이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은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58,6~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
이 구절은 실천(행동,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구절로서 본 서간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야고보는 2장 15절과 16절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 사실에 대해 이제 중간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죽은'으로 번역된 '네크라'(nekra)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나타내고 있다(루카15,24.32).
즉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본인과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측면에서 해롭기까지 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만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7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8~10절에서도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 하셨습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19)
야고보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멸망할 마귀들이 가진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헛된 믿음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야고보는 신앙 문답과 같은 양식으로서 유일신론을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마귀들'(타 다이모니아; ta daimonia)도 유일신론을 인정하고 있다. '떱니다'로 번역된 '프릿수신'(phrisusin)의 원형 '프릿소'(phriso)는 '떨다','극한 공포에 사로잡히다','소름끼치다'란 뜻으로서 마귀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매우 크게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나타내주고 있다.
결국 이 구절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마귀처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도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실천(행동,행함)이 배제된 믿음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1)
야고보는 이제 실천있는 믿음만이 하느님 대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유다인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한다(요한8,39).
본문에서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파테르 헤몬; pater hemon)이라고 언급한 것은본 서간 수신자들의 대부분이 유다계 그리스도인이거나 유다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23)
여기서 야고보는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한 창세기 15장 6절을 이용하고 있다. 야고보는 먼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었다'는 사실에 대해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후사가 없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그의 씨로 하늘의 무수한 별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다(창세15,5). 그리고 그 믿음을 하느님께서는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그러나 그 후 이사악을 기꺼이 제물로 드린 <'아네넥카스'(anenegkas)의 원형은 '아나페로'(anaphero)로 '제단에 놓다', '제단에 가져가다'는 뜻> 사건을 통해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순종의 행위일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을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산 제물로 드릴지라도죽음으로부터 하느님께서 능히 그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히브11,19).아브라함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아들을 제물로 드렸다는 것은 그 약속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야고보는 이처럼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는 구약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이 증거하는 믿음과 행함(실천)의 일치를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의 그의 순종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표현이다.
'이루어졌고'로 번역된 '에플레오데'(eplerothe)의 원형 '플레로오'(pleroo)는 '충만하게 하다', '완성하다', '온전하게 하다'는 뜻이다.
즉 창세기 15장 6절의 '칭의'(의로움의 선언)도 법정적 선언이고(로마4,3) 창세기 22장은 그 '의로움의 선언'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는 명백한 증거 사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본절을 통해 아브라함이 행위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로써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26)
야고보는 서간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행위(실천)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결론을 2장 26절에서 맺고 있다. 실천(행함, 행동, 행위)없는 믿음은 영이 없는 몸과 같은 것이라 비유한다. 이것은 2장 17절의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한 말이다.
즉 야고보는 실천없는 믿음은 숨을 쉬지 않는 육체에 비교하면서 믿음을 육체에, 그리고 실천(행함)을 영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영'으로 번역된 '프뉴마토스'(pneumatos)의 원형 '프뉴마'(pneuma)는 '호흡','숨', '생명'이란 일차적인 뜻이 있으나 구약에서부터 보편적으로 '호흡이 있는 생명'이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인간 생명의 삼중 구조(1테살5,23)에 입각해서 새 성경은 '영혼'안에 있는 '영혼의 핵'인 '심령'(영)으로 번역되어 있다.
숨쉬지 않는 육체는 시체일 뿐이다. 이처럼 행동(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호흡이 끊긴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육체와 영이 하나이듯이 믿음과 실천(행함)도 하나이다.
육체와 영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영이 없는 몸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믿음은 실천 없이는 아무런 구원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2020년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당신의 피신처가 ‘십자가’ 맞습니까?
(마르 8,34―9.1)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자신을 버린다는 것, 자신의 생각, 뜻 그 말이 구원의 십자가 없는 헛것임을 깨닫는 그 자기 부인(否認)하는 것입니다. 곧 제자나 군중이나 누구든지 구원의 파멸로 이끄는 인간의 지혜로 따르지 말라 하십니다.
어제 우리는 베드로가 사람의 지혜로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잘못(죄)을 봤습니다. 지혜는 구원으로 이끄는 신비롭고 감추어져있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1고린2,9)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 사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그 사람의 생각, 뜻, 그 마음, 그 길이 구원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는 그 자기 의로움의 否認- 자기 부인이며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 하시는 하느님의 방법, 곧 구원의 길은~ 인간은 생각할 수도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그런 길이라 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길입니다.
(요한 14,6)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그래서~
(1베드2,24)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십자가)로 여러분은 병(죄)이 나았습니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의로움으로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의 의로움을 받지 못한다면, 곧 믿지 못한다면 누구든지 구원은 없습니다.
(로마10,3)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용서, 의로움은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이 이루신 신비이며 기적입니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도덕과 윤리의 그 사람의 의로움은 이 세상의 것입니다. 그 자기 의로움의 자신(목숨)을 고집한다면 이 세상의 칭찬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에게는 끝(죽음)이 있을 뿐 구원-새 생명을 위한 부활(시작)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로움이 참 진리임을 깨닫고 자기 의로움을 부인하는 그 자기 목숨을 버리면, 잃으면~ 십자가가 거저 주는 하늘의 의로움으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로움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십자가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억울해서 어려울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난합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주는 용서, 의로움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1코린2,8-9)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 세상의 의로움 그 자기 부인이 된 사람은 그 비난 주님의 복음 때문이니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비난 받아 보지도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자기의 의로움 그 명예로 온 세상의 칭찬, 영광을 받아 산다 한들~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하십니다.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세상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늘의 의로움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해 부끄럽게 여기면~
그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하면, 심판권을 가진 그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못 알아 보십니다.
오늘은 빛이신 예수님이 어둠을 찾아 오셨지만~ 빛의 나라, 그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어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어둠)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어둠임을 깨달아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는 기회의 땅인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기회이지 죽어서는 기회가 없습니다.
(루가16,26)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 서 있는 사람-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나라의 의로움(십자가)을 향해 서 있는 사람입니다.
곧 십자가의 대속을 진리로 믿어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지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부터 하느님의 라라를 사는 하늘으 자유,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마테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 아멘 -*^ㅇ^*-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8,34- 9,1)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6-37)
'목숨을'로 번역된 '프쉬켄'(psychen)의 원형 '프쉬케'(psche)는 '숨쉬다', '바람불다' 라는 뜻을 가진 '프쉬코'(psycho)에서 유래한 명사인데, '목숨'(life; 요한10,17)이라는 뜻 뿐만 아니라 '영혼'(soul; 마태10,28)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 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영혼도 가리키는 이중적인 용어이다.
마르코 복음 8장 35절에 나오는 역설적인 교훈은 이러한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 간의 대조 관계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즉 자신의 육적인 생명에 대한 애착만을 갖고 이것을 지키려는(히브2,15) 자는 끝내는 육적인 목숨과 더불어 영적 목숨까지 잃게 되지만(루카12,20),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자신의 육적인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자 하는 헌신된 삶을 살 때, 오히려 그의 영혼이 살 뿐 아니라 종말에 그 육체 또한 주님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임을 뜻한다(야고1,19; 묵시21,4).
또한 '얻고도'에 해당하는 '케르데세'(kerdese; he gains)는 능동태인데 반해, '잃으면'에 해당하는 '제미오테'(zemiothe; lose)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태'(voice)는 본문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전달해 준다.
즉 이 문장은 사람이 온 세상(천하)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힘쓰는 노력은 자발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하느님께서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심은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이 구절을 직역하면,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위한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이다.
한글 새 성경에서 '제 목숨을' 다음에 '주고'에 해당하는 '도세이'(dosei; shall give)가 빠져 있는데, 이것은 미래형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일이 관습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격언적 미래형'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인간 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생명의 단(일)회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앞절인 마르코 복음 8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유한한 육적인 생명보다 훨씬 소중한 영생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영생의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그토록 소중한 목숨까지도 권능의 예수님께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각오를 촉구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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