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보아 공원에서 만난 호드리게쉬
리스보아 움베르투 델가두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시내로 이동한다. 20분도 걸리지 않아 아말리아 호드리게쉬(Amália Rodrigues: 1920~1999) 기념공원 앞에 차가 선다. 그곳에는 호드리게쉬 공원이라는 표지석만 서 있지 특별한 구조물이나 안내문이 보이질 않는다. 자료를 보니 1996년 (Alto do Parque)로 문을 열었고, 2000년 아말리아 호르리게쉬 공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환경을 고려해서 원형의 호수를 만들고, 그 뒤로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 겸 바를 운영하고 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쉬는 포르투갈 파두 최고의 파디스타(Fadista)다. 아말리아는 리스보아 페나(Pena) 지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가난하게 자랐고, 리스보아 부둣가에서 과일장수를 하기도 했다. 노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35년 경이다. 1939년에는 무대에 게스트로 초대받아 전문적으로 파두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때 고전음악을 공부한 작곡가 페데리쿠 발레리우(Frederico Valério)를 만났다. 그는 그녀의 음악적 잠재력을 알아보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춘 곡들을 작곡해 주었다.
‘질투나는 파두(Fado do Ciúme)’, ‘오 모라리아(Ai Mouraria)’, ‘신이여 저를 용서해 주소서(Que Deus Me Perdoe)’, ‘당신이 떠난 이유를 모르겠어요(Não Sei Porque Te Foste Embora)’ 등이다. 1940년대 초반 그녀는 이미 유명한 파디스타가 되어 있었다. 1946년에는 파두를 소재로 한 영화 《검은 외투(Capas Negras)》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그녀는 라디오 스타에서 무비 스타로 발전했고, 그녀의 자전적 스토리영화 《파두: 어떤 가수의 이야기》(1947)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녀의 명성은 에스파냐와 브라질까지 알려졌고, 1949년에는 파리에 거주하기도 했다. 1950년 국제적인 자선쇼를 하면서 그녀의 노래 ‘포르투갈의 4월(Avril au Portugal)’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노래는 주세 갈랴르두(José Galhardo)가 작시하고, 하울 페랑(Raul Ferrão)이 작곡했다. 1950년대 초에는 포르투갈 유명시인이 그녀를 위해 가사를 써줄 정도였다. 1953년에는 미국의 ABC-TV에 출연했고, 1954년에는 할리우드 클럽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
나는 4월에 당신과 포르투갈에서 보내는 꿈을 이뤘어.
그때 우리는 결코 해보지 못한 사랑을 했지.
몸이 구름 위로 둥둥 뜨는 것처럼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나는 미친 듯이 말했지: 당신을 사랑한다고.
1957년에는 파리 올랭피아 홀 공연실황이 앨범으로 제작되어 배포되기도 했다. 그녀는 50년대와 60년대 파리의 유명한 아티스트가 되었고, 1992년까지 10시즌을 공연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1974년 4월 25일 혁명 이후 국가보안국 비밀요원이었다는 이유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녀는 실제로 포르투갈 공산당을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독재자 살라자르를 찬양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로 해서 그녀는 심적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7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어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70년대 말 건강이 나빠져 잠시 무대를 떠났고, 80년대 들어 그녀의 자작시 또는 발레리우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작품이 크게 히트했다. 대표작이 ‘눈물(Lágrima, 1983)’이다. 이 앨범은 몇 달 만에 120만 장이나 팔렸다고 한다. 1985년부터 1994년까지 그녀는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해 큰 성공을 거뒀다. 1994년 리스보아가 유럽의 문화수도가 된 것을 축하 하는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은퇴했다.
이듬해 폐수술을 받았고, 그 후에는 방송 출연과 기고 등을 하며 살았다. 그리고 과거 앨범들을 리바이벌해 앨범을 발매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세그레두(Segredo, 1997)’가 있다. 1998년 리스보아 엑스포에서는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1999년에는 1974년 민주화 이후 가장 중요한 포르투갈인(25명)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해 10월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포르투갈 국립묘지에 묻혔다.
호드리게쉬 공원 뒤로는 교도소가 있다고 하는데, 가이드는 이곳을 국립호텔이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호드리게쉬 공원 대신 그 건너편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을 찾아간다. 에두아르두 7세는 영국왕 에드워드 7세를 가리킨다. 1903년 포르투갈을 방문해 포르투갈과 영국의 동맹을 확고히 했다. 에드워드의 방문 이전, 이 공원은 자유공원으로 불렸다. 그래서 공원 남쪽으로 뻗은 대로가 자유로(Avenida da Liberdade)다.
공원 북쪽 길옆에 독특한 구조물이 있다. 이것은 주앙 쿠딜레이루(João Cutileiro)가 1974년 4월 25일 무혈혁명을 기념해서 2004년에 만든 기념탑이다. 혁명을 통한 파괴와 건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념탑 남쪽으로 조경이 잘 된 녹지가 펼쳐진다. 그 면적이 무려 26ha나 된다고 한다. 공원 북서쪽에는 세 개의 온실로 이루어진 식물원이 있다. 1933년 문을 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