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발 광장에서 알게 된 퐁발 후작의 정치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은 1945년 건축가 프란시스코 아마랄(Francisco Keil do Amaral)의 설계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원의 남쪽 끝 퐁발(Marquês de Pombal: 1699~1782) 광장에는 퐁발 후작 동상이 세워져 있다. 퐁발은 개혁군주인 주세(José) 1세가 통치하던 1755년부터 1777년까지 장관과 수상을 지낸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1755년 지진이 일어나자 구조활동을 벌이고, 폐허가 된 리스보아를 복구하는데 앞장 섰다. 그는 또한 행정, 경제, 종교 관련 조직을 개혁해 포르투갈 계몽시대를 이끌었다. 그래서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상으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는 독재권력을 휘둘러 시민권을 제한하고 정적을 제거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그는 코임브라대학 졸업 후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고, 1733년 귀족 가문의 조카와 결혼하면서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었다. 그 덕에 1738년 주앙 5세에 의해 영국대사로 임명되었다. 1745년 오스트리아 대사로 옮겨가 1749년까지 재직했다. 1750년 주세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외교 사령탑이 되었고, 1755년에는 왕의 신임을 얻어 선임장관이 되었다.
1757년 국무장관이 되었고, 1758년 타보라(Távora) 가문이 왕을 시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퐁발은 1759년 이 사건을 수습하면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777년 주세 1세가 죽고 마리아(Maria) 1세가 즉위하면서 퐁발이 실각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1781년 타보라 가문은 복권되었다. 1759년에는 또 제수이트 교단의 핵심인사들을 제거하면서 종교계의 힘도 약화시켰다. 그 결과 퐁발은 1759년 백작이 되었고, 1769년 퐁발 후작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퐁발 후작은 포르투갈어로 이스트랑제이라두쉬(Estrangeirados)라 불린다. 이 말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해 국민을 계몽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운동에 앞장선 지도자를 말한다. 퐁발 후작은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 선진국의 대사를 하면서 계몽주의 사조와 상공업의 발전을 목격했고, 이를 자신의 나라에서 실천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모든 산업을 지배하는 왕립 회사를 만들고, 상업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대표적으로 포르투 와인의 생산과 교역을 통제해 가격안정을 꾀했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영국과 동맹을 이용해 7년전쟁(1756~1763)에서 에스파냐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흑인노예의 포르투갈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는 또한 유대교나 이슬람교로부터 개종한 사람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내치에서는 독재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검열을 강화하고 시민계급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했다. 그러나 1777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마리아 1세가 등극하면서 제수이트교를 탄압한 퐁발을 꺼리게 되었다. 그녀는 퐁발이 자신이 있는 곳에서 20마일 이내로 접근할 수 없도록 접근제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성난 시민들이 리스보아에 있는 퐁발의 저택을 불태우려고 할 정도였다.
그는 모든 직위를 잃고, 퐁발 근처에 저택을 마련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1782년 죽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긍정과 부정 양면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지하철역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시내 곳곳의 관광안내소나 기념품점에서는 바스쿠 다 가마와 마르케스 드 퐁발의 실물 모형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퐁발광장에 설치된 그의 동상은 1934년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한계가 있다. 당시 일부 지성인들은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리스보아에서 신트라 가는 길
에두아르드 7세 공원 인근 식당에서 우리는 바칼라우로 점심식사를 한다. 바칼라우는 소금에 절인 반건조 대구를 말한다. 생선을 취급하는 식당이라 그런지 벽에 멋진 생선 그림이 걸려 있다. 바칼라우를 이용한 음식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이를 줄여 그냥 바칼라우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구를 스테이크 형식으로 구운 뒤 밥을 곁들여 제공하는 가장 간단한 음식이다. 일종의 볶음밥으로 좀 뻑뻑한 편이다. 샐러드를 좀 곁들이면 훨씬 맛있을 것 같다.
우리 일행은 식사 후 버스를 신트라로 향한다. 신트라 가는 길에 벤피카(Benfica)팀의 홈구장인 이스타디우 다 루스(Estádio da Ruz)를 만난다. 붉은색 철골 구조물이 인상적인 구장으로, 2003년 10월 개장되어 64,642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벤피카의 상징동물은 독수리고, 상징색은 빨간색이다. 1904년 만들어졌으니 그 역사가 무려 120년이나 된다. 이 구단 출신의 가장 유명한 축구선수는 에우제비우(Eusébio da Silva Ferreira)다. 그는 1965년 발롱도르상을 수상했고, 1966년 포르투갈을 월드컵 3위에 올려놓았다.
한편으로는 알칸타라 계곡에 놓여 있는 수도교(Aqueduto)를 볼 수 있었다. 18세기 리스보아에 만들어진 상수도 공급시설로 그 길이가 18㎞나 된다. 1731년 사업이 시작되었고, 1744년 알칸타라 계곡에 941m의 아치형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 35개의 아치가 세워졌고, 가장 높은 곳의 교각은 65m나 되었다. 1748년에는 이 수도교를 통해 리스본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고, 1755년 지진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았다.
1880년대 들어 알비엘라(Alviela) 강물을 상수원으로 사용하면서 그 중요성이 감소했고, 1968년 그 사용이 중단되었다. 현재는 물박물관(Museu da Água)이 되어 역사와 관광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도교와 다른 쪽 저 멀리로는 4월 25일 다리와 두 개의 현수교 주탑이 보인다. 그 너머로 테주강 건너 예수상도 보인다. 우리는 신트라와 카보 다 호카를 관광한 다음 테주강 하구로 돌아와서 다리와 예수상을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