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3.25) 말씀/ 고후 5:15 날 대신 죽으신 예수님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사순절을 기념했습니다. 부활절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주일을 뺀 40일을 경건하게 보냈는데 이 기간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이 주 한 주간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은혜의 시간을 보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날 대신 죽으신 예수님’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세상엥 않은 은혜의 이야기가 있겠지만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의 이야기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까요? 내가 많은 빚으로 인해 짓눌릴 때 나를 대신 빚을 값아주고, 내가 대신 고난을 당할 것을 대신 당해주고, 내 대신 죽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이보다 더 고맙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까요? 미국 남북 전쟁이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할 때에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들을 제비뽑았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전쟁에 나가야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친구 가운데, 부모도 안 계시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아니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대신 자원해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했습니다. 그 책임자는 너무 감격해서 대신 그 젊은이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대신 나간 친구에 대해서 얼마나 감격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 뉴우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았습니다.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우다 전사를 하였습니다. 신문 전사자 명단에 그 친구의 이름을 본 이 사람은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 묘지에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 이렇게 묘비를 세웠습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3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지만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을까요?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면 얼만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이런 친구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친구입니다. 고린도 후서 5: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형벌인 십자가에의 형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대신 죄를 알지도 못한 예수님께 죄를 삼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되려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자인가요? 에베소서 2;3절에 보면 전에 우리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근본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땅히 죽을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냥 육체만 죽습니까? 사람은 죽으면 육체(흙)은 땅으로 돌아가지만 우리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면 믿지 않고 죄 가운데 죽은 자는 지옥의 심판을 받게 딥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2:7절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믿지 않고 죄 가운데 살다가 믿음 없이 하나님께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8,절은 불신자의 심판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베드로 후서 3:10,12에서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그냥 지옥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옥에 들어가서 체질이 불에 녹아지는 고통을 받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 든 곳인지 아시나요? 가스불 위에 손가락을 올려 놓으면 알 수 있다는데 절대로 그렇게는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미운 자식이라도 그런 지옥의 고통 속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죄에 대한 벌을 주시지만 근본 본심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처음처럼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벌써 심판을 받은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면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벌을 받고 대신 죽는 것입니다. 누군가 대신 고난 당하면 우리는 고난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대신 죽으면 나는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누가 대신 죽을 수 있습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죽은 일을? 그런데 이 세상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14세기 영국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포위당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1년 가까이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항복을 하게 되었고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항복사절단이 왔습니다. 그 때 점령자가 제시한 항복조건은 누군가 그동안 반항의 책임을 진다면 모든 칼레 시민의 생명을 보장한다는 그런 것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도시에서 가장 명망이 높던 대표적인 시민 대표를 골라 목에 밧줄을 묶은 다음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영국군 진영으로 가서 도시의 열쇠를 건넨 후 목을 매 처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광장에 모여 소식을 전해들은 칼레의 시민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과연 누가 죽을 것인가? 다 살고 싶은데... 참으로 어렵고 힘든 문제였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대신 죽을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천천히 일어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 여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겠소”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드 생피에르 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다음에 뒤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 부유한 귀족들 다섯 사람이 교수형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렇게 여섯 명의 자원자들이 칼레시민을 구하기 위해서 목에 밧줄을 걸고 무거운 몸으로 교수형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처형소에서 목을 매려던 순간, 당시 임신 중이던 영국왕 Edward 3세 여왕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왕비는 이정도 했으면 됐으니 살려주라고 간청했습니다. 에드워드 3세 왕은 그 시민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로댕이 용감하게 자원한 6명의 칼레시 인질들을 대가다운 솜씨로 표현하여 10년에 걸쳐 ‘칼레시민’ 동상을 조각 했고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작품이 지금도 칼레시 시청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여전히 감동으로 전해지는 ‘노블리스 오블리즈’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 이 노블리스 오블리즈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높은 신분 지식인이 갖는 의무라는 뜻 입니다. 남보다 많이 배우고 안다는 것, 많은 책을 읽고 유식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책임을 지닌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낮은 자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높은 신분의 사람이 책임을 진는 것입니다. 정말 맞는 말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노블리즈 오블리즈에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대신 죽어도 육체를 위할뿐 영혼까지 위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불심판을 받아 죽을 자를 위해 대신 죽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죄 없으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초고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 죽으시기 위해 순종하여 이땅에 교수형을 당하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 이사야는 53:4-5절에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임을 예언 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정말 그런가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죽으실 것으로 예정이 되어 있으셨습니다. 이미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여자의 후손’ ‘짐승의 가죽’, ‘생명나무’ 모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구원 역사를 시작하시고, bc 700년 경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셨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오셔서 우리의 허물을 인해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해 십자가에 달려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렇게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단지 구원을 위해서? 아닙니다. 죄로 인해 죽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님을 인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일순간이지만 삶을 영원한 진행형입니다. 이제는 목적도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목적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벧전 2:24) 우리는 구원에 그치면 안됩니다. 삶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닏. 고후 5:14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이유는 이제는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의를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목적 없는 인생이 아니라 목적 있는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애당초 죽을 자라면 최후의 날까지 잘 먹고 잘 살면 됩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야할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 육신의 떡을 구하는 무리들에게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목적대로 살라고 살라는 것입니다. 생육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생명의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롬 7:3-4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 세상에 우리가 해야 할 많은 일이 있지만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의 가치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의미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합니다. 그저 크로노스 시간 속에 휩슬려 세월을 허송하면 안됩니다. 이제 생명의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으니 카이로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하루를 천년처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피값을 치루고 사신 바된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아멘! 1865년, 아주 추군 겨울날, 한 젊은 어머니가 사우스 웨일스의 언덕을 지나가고 었습니다. 품 안에 어린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을 가리는 심한 눈보라가 치고 었습니다.그 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습니다. 얼마 후 눈보라가 그치고 난 후 그녀의 시체가 눈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탐색단은 그녀가 죽기 전에 그녀의 겉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싸 놓았음을 발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아이는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버려 아이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그 아이는 커서 1916년 영국의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어렸을 적부터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내 대신 알 몸으로 죽었다고.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고 한평생 부모 없이 살았으나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벌겨벗겨진채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온 것처럼 날마다 나를 대신 죽으신 예수니므이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잘 살아야 합니다. 아벤!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대신 해서 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삶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이 예수님이 사랑과 은혜가 우리 삶속에 절절히 스며들어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 물질 생명을 써서 의의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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