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 교수는 고구려사는 고구려사일 뿐이지 한국사가 아니다 이런 소리를 읊어 댔는데, 그 말에 대한 평가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그가 한 말 중에 취할 말은 하나 있기에 인용해 옵니다.
>1930년경에 폴란드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의 기록을 보면, 지금의 벨로루시와 접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폴란드 사람입니까, 벨로루시 사람입니까?’ 라고 물은 대목이 나옵니다. 질문자가 들은 답변이 걸작입니다. 그냥 ‘우리는 여기 사는 사람들이다’였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19세기 말에 프랑스 농민들에 대한 사회사적인 조사가 있었는데 제목이 'Peasant being into French man'입니다. 해석하면 '프랑스 사람이 된 농민들' 정도가 되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19세기 말의 노르망디 지역의 농민들은 대부분 평생 동안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4km 넘는 곳을 여행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프랑스라는 실체를 모르는 것이죠.
>그런데 의무교육을 시키고,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같은 걸 읽히고, 사투리 못쓰게 하고 프랑스 표준어를 쓰게 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들이 ‘나는 프랑스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취득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수입된 거죠.
>연구는 19세기 말의 프랑스 농민들이 어떻게 ‘프랑스인’으로 변모하는가를 그리고 있는데, 그 당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때에요.
>국민국가가 만들어지고,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만들어진지 100년이 지난 사회의 농민들의 의식세계가 그랬다면, 2천년 전의 고구려에 살았던 사람들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심지어는 고구려 사람이라는 의식도 안 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냥 나는 ‘여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겠죠. 그런데 그들을 중국사의 일부, 한국사의 주역으로 끌어들이는 건 근대의 국민국가와 그것을 지탱하는 권력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전유해버리는 겁니다. 그들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 문제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사료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 한 의병장이 남긴 기록 중에 쇄미록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 보면 이런 한탄이 나옵니다.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저 아랫것들이 의병 모이라면 하나도 안 모이고, 일본군 환영해서 걱정이라는 것이지요. 그 때 일본군 점령정책이 동네마다 쌀 나눠주고 먹을 것 나눠주는 것이었거든요.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민족의식이 투철한’ 민중들이었다면 일본군에 저항하고 게릴라전을 벌여야 했을 텐데, 그 의병장에 따르면 오히려 환영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나라도 그랬을 거 같습니다. (자신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고 하고 착취나 하는 양반들이 물러가고, 갑자기 쌀 나눠주겠다는 놈이 들어온 건데 굳이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민족이 쳐들어올 때마다 관민이 일치단결해서 싸웠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서울에 궁성 불태운 건 노비들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요. 이런 것들이 지킬 것이 있는 집단과 지킬 것이 없는 집단의 차이입니다.
>이건 다른 나라의 '국사'도 마찬가집니다. 폴란드의 예만 들어볼까요. 19세기 폴란드 민족봉기에서도 쇄미록의 경우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830년에 한국 의병처럼 폴란드 양반인 슐라흐타(szlachta)들이 봉기를 일으켰어요.
>그런데 당시에 농민들이 어떻게 했냐 하면, 장원에 불지르고, 그 ‘양반’ 지도자를 붙잡아서 오스트리아 점령군에게 넘겨버렸거든요. 우리 식으로 따지면 일본 관헌이 진압하기 전에 농민이 먼저 진압해 버린 거죠.
>폴란드 농민들은 독립을 무서워했거든요. 왜냐하면 러시아의 짜르가 농노해방을 해 줬는데, 그 ‘양반’들이 지배하던 세상이 다시 오면 다시 농노제로 돌아갈 것 같잖아요. 당시 폴란드 농민운동 지도자였던 사람의 회고록을 보면, 농민들은 독립을 두려워했다고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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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제가 늘 주장해 오던 바와 똑같군요.
민초라는 것들은, 등만 따시고 배만 부르게 해 주면, 어떤 지배자가 오든 쫄랑쫄랑 따라가고,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잡아다 바치고 이런 추하고 천한, 본능밖에 모르는 의식없는 것들입니다.
민초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린 훌륭한 지도자가 하나도 없는 이유를 알 만 합니다.
노예근성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차피 자주성을 가진 사람들은 몇 명 되지 않는 법. 이들이 어리석은 민초놈들을 그냥 채찍으로 다스리고 약간의 당근을 주어서 반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인 것 같군요.
민초놈들이 정권을 잡아도 오래지 않아서 다 들어먹고 결국 옛 귀족들이 재집권하는 것은 수많은 혁명들의 종착역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역시 훌륭한 영웅이나 장군 중에 '민초' 들은 찾아볼 수가 없군요. 농민반란군 수장이란 것들은 까불다가 자기 '편'에게 잡혀서 목이나 잘리고 다니죠.
이런 것들은 대의란 없고 그저 지 배만 부르면 다인 것들이니까요.
역시 큰 일을 하려면 '대중'의 지지는 필요 없습니다. 대중이야 어차피 선동하면 이길 것 같은 놈에게로 붙게 마련이니까요.
처음에만 돈 많은 놈들 것 뺏어서 잠깐 잘 먹게 해 주고, 일 끝나면 다시 뺏어내면 그만입니다.
어리석은 민중들에게 희망이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