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째 가을
2014. 11. 금계
인생을 80년으로 치면 40년이 꼭 절반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결혼해서 살아온 40년은 어쩌면 인생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우리가 1974년 11월 10일 목포예식장에서 웨딩마치를 올렸으니까 어느덧 40주년이 되었다. 기념으로 어디 여행이라도 한 번 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궁리 끝에 부여를 골랐다. 거기는 40년 전에 신혼여행을 갔던 곳이고 또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되짚어 갔던 곳이니까. 세 번째 방문인 셈이었다. 20년 전에는 기차를 타고 논산에서 내려 버스 타고 유성온천에서 하룻밤 묵고 또 버스와 택시를 타고 부소산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아내가 소나타를 운전하고 고속도로를 달려 세 시간 만에 닿았다.
우리의 결혼생활 40년에는 ‘전교조’라는 험난한 다리가 걸려 있었다. 전반부 십몇 년은 전교조 태동기였고 한가운데에는 해직이라는 출렁다리가 휘청거렸고 복직 이후에도 전교조라는 꼬리표는 이날 이때까지 따라다녔다.
그러잖아도 경제관념이 희박한 남편이라는 사람이 교사 봉급이 얼마나 된다고 그나마 해직으로 4년 반 동안이나 허방을 짚었으니 복직 후로도 살림살이가 허덕였을 것은 불 보듯 빤한 이치였다. 그 40년 동안에 집안 살림을 맡은 안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물어보나 마나였다. 게다가 전교조 말고도 나는 아내한테 부끄럽고 미안한 점이 한두 가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집 대문을 들어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행 날을 참 잘 받았다. 옛날 같으면 무시로 서리가 내리고 금방이라도 첫눈이 쏟아질 듯 날씨가 꾸무럭거릴 계절인데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늦가을 햇볕이 짱짱하고 숲 그늘 짙은 부소산 길녘에는 곱게 물든 단풍잎이 시나브로 떨어져 내렸다.
흙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시멘트보다는 흙길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신혼여행지로 부여를 택한 이유도 오로지 부소산의 흙길 때문이었다. 같은 고적지라도 관광객이 엄청 몰려다니는 경주는 시멘트 일색이라서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뜸한 부소산은 조용하기도 하려니와 흙길에다 정자에다 낙화암 바위에다 고란사 약수에다 고요히 흐르는 백마강이 모두 입맛에 맞았다.
그러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는 강산이 변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전에는 분명히 흙길이었던 것 같은데 부소산 오르는 길이 시멘트로 굳어져 있어서 실망스러웠다. 아쉬움에 못 이겨 나는 짐짓 시멘트 길 가장자리로 난 비좁은 흙길을 밟아보기도 한다.
낙화암 조룡대
우리는 삼천궁녀가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렸다든지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든지 백제가 멸망한 사실을 애써 애달파할 필요가 없다. 하필이면 백제뿐이겠는가. 개인의 역사도 그렇고 나라의 흥망성쇠도 그렇고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모두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소멸해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부소산에 오르면 삼천궁녀가 생각나 어딘지 모르게 애잔하고 스산한 느낌이 들기 십상인데 산골짜기 어디에선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유행가 가락이 은근히 사람의 가슴을 찡하니 후벼 판다.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려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림구나.”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 우물에서 약수를 마시고 나루터로 내려가 유람선을 기다린다. 나루터 바로 옆에 솟은 바위가 바로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전설의 조룡대란다. 그래서 백마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던가.
유람선을 타고 올려다보는 낙화암 절벽은 천 년 전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평범한 바위 언덕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조룡대를 출발한 유람선은 채 5분도 안 된 것 같은데 굿뜨래 나루에 도착하여 내리라 한다. 4000원이나 낸 관광객들이 너무 허망하다고 투덜거린다. 그래도 나는 20년 만에 다시 돌아보는 백마강이 너무나 정겹고 애틋하다.
백마강 유람을 마치고 ‘궁남지’ 구경에 나섰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인공호수라 하던가.
궁남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백제 무왕(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모형이 관광객을 반긴다.
“선화공주님은 서동을 남 몰래 거시기하고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어떤 영화를 보니 황산벌 싸움에서 신라 군사와 대적하는 백제 군사들이 창으로 땅을 두들기며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전의를 불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거기에서 ‘거시기’라는 말이 얼마나 통쾌하고 재미났는지 배를 쥐고 웃었다.
거시기가 참 다양하게 감칠맛 나게 쓸 수 있는 말이다. 우리말 욕설 중에 거시기할 놈, 거시기할 년이 상당히 큰 욕인데 살다 보니 그 말이 꼭 욕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았다. 거시기 못할 놈이 큰 욕이지 거시기할 놈은 오히려 욕이라기보다는 덕담에 가깝지 않겠는가. 우리 어렸을 적에는 누가 누구하고 거시기했다는 놀림이 억울해서 눈물바람을 하며 놀린 녀석을 쫓아다니는 일이 흔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거시기를 못 한다면 어찌 가족이 이루어질 것이며 어찌 인류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단 말인가. 서동과 선화공주가 거시기해서 두고두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인류 역사의 기본 얼개를 보여주는 전설이라고나 할 만하다.
궁남지 상공에는 '제11회 굿뜨래 국화전시회‘를 축하하는 풍선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굿뜨래는 부여를 상징하는 신조어인 모양이다. 낙화암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내린 나루도 굿뜨래 공원, 부여의 농산품 이름도 굿뜨래, 전시회 명칭도 굿뜨래였다.
굿은 최고라는 뜻이고 뜨래는 좋은 뜰이라는 뜻이란다.
세상에, 국화처럼 색깔이나 종류도 다양하고 향기도 좋고 아늑하고 넉넉한 꽃이 또 있을까. 여러 곳의 국화 축제를 다녀보았지만 궁남지의 꽃 잔치도 다른 곳에 전혀 빠지지 않게 화려하고 푸짐했다. 차라리 구경하기 귀한 무궁화보다 예전부터 우리의 울타리 언저리에 흔하고 소담스럽게 피어났던 국화를 국화로 정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늦가을이라 시들기는 했지만 궁남지 연못에는 가는 곳마다 찌들어진 연줄기와 잎사귀가 메말라가고 있었다. 연꽃이 필 때 오면 장관이겠다. 우리 무안 백련지도 이 궁남지처럼 연꽃 필 때뿐이 아니라 사시사철 언제든지 관광객들이 방문하도록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에서 하룻밤 묵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모텔도 깨끗하고, 모텔에서 추천해준 3대째 손뚜부 집의 얼큰한 굴 순두부탕도 맛이 썩 좋았다.
공주에서 서산 해미읍성으로 갔다. 읍성을 지키는 수문장은 새파란 총각인데 사진 모델이 주요 업무인 모양이었다. 해미읍성은 성안에 옛 건물 말고는 텅 비어서 언제 보아도 차분하고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다만 옛날 천주교 신도들이 많이 순교한 곳이라는 역사가 조금 섬뜩하다. 원님의 내아 위쪽 하늘도 새파랗고 빨간 감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도 눈이 시리게 푸르렀다. 가을이 깊을 대로 깊었다. 우리 부부가 함께 한 세월도 40년을 넘길 만큼 깊어졌다. 부디 남은 세월이 순조롭고 평탄하기를.......
목포로 돌아오는 서해안 고속도로는 평일이라 그런지 비교적 한산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