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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미르얌은 어느 날 가까운 벗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생애를 닮아 내야 하는데, 과연 무엇을 닮는 것일까요?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이 땅과 하늘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늘 장인’으로서의 삶,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스러운 ‘하늘 예인藝人’,
곧 아리따운 ‘하늘 연인戀人’들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깨달으면
확신하게 되고, 확신하면 본받게 되지요. 그리고 이러한 마음에서 사랑이 시작되는데, 이 사랑은 서로를 닮아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하는 이와 항상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인생의 이치라면, 예수님과는 더욱 그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늘 연인 / [Audio]
“성녀 미르얌은 어느 날 가까운 벗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생애를 닮아 내야 하는데, 과연 무엇을 닮는 것일까요?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이 땅과 하늘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늘 장인'으로서의 삶,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스러운 '하늘 예인藝人', 곧 아리따운 '하늘 연인戀人'들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가는 과정 가운데 그분의 생애를 닮아 내야 하는데, 그분의 삶의 노정이 있지 않습니까? 태어나서 승천하실 때까지의 그 노정을 닮아 내야 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무엇을 가장 핵심적으로 닮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지요.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성령님을 모시고 이 땅과 하늘에서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의 ‘하늘 장인’으로서의 생애, 삶의 장인으로서의 생애, 바로 그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스러운 ‘하늘 예인藝人’”, “하늘의 인생은 예술과도 같다”하는 말씀을 전에 해 드린 적이 있지요? 그와 같은 맥락의 ‘하늘의 예인’입니다. 아리따운 하늘의 연인들, ‘연인戀人’, 서로 연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의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성령님과 우리 사이에 하늘 우주의 위도와 경도라는 그림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북극이 하나님, 남극이 성령님, 그리고 그 구상의 어느 좌표 위에 서 있는 우리 자신, 이 세 점을 연결하면, 하늘 우주에서 삼각형이 형성되지요? ‘하나님과 성령님과 나’라고 하는 하늘과의 사랑의 삼각기대가 형성되고, 수평적으로는 내 앞의 형제, 내 앞의 자매, 또는 천사도 될 수 있고, 그들과도 더불어 사랑의 삼각기대가 형성됩니다.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와 나’, 이렇게 대입할 수도 있고, ‘아브라함과 사라와 나’, 이렇게 대입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어렸을 때는 먼저 ‘하늘과 나’의 사랑에 관하여 배우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성령님과 나’의 사랑이 무르익으려면,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평화와 안식의 세계로 이어지고 영원한 평안의 세계로 이어지려면, 결국 옆에 있는 형제와 자매와 내가 평화와 사랑과 안식의 삼각기대, 평안의 삼각기대를 이루어야,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이 수평적인 형제자매 관계에서도 평화로운 삶의 결실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야 교회에 가도 평안하고 재미가 있어요. 이처럼 하늘과 나의 사랑은 반드시 나와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실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늘과 나와 형제자매’라고 하는 삼각기대 안에서 저마다 하늘의 예인藝人, 사람을 대하는 삶의 터치가 예술가의 경지에 이른, 사랑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장인의 경지에 이른 예인들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사랑을 하는데 거칠면, 분명 저분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대하는 것인데 손길과 마음길이 거칠면, 좀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음식의 짜기와 달기가 입에 맞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의 정도 역시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그것을 맞추어서 대하는 것이 결국 인생의 궁극적 공부입니다. 그러한 삶의 장인의 경지에서 사랑을 다루어야, 그 사랑이 하늘 사랑의 경지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인성적 사랑으로 남는 거예요. 왜? 내 감정이 거기에 과도하게 섞이니까, 상대가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나는 잘해 주려고 한 것인데, 상대는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하늘의 장인, 하늘 예인들이 되지 않으면, 하늘 연인들이 되어 가는 노정이 길어지게 되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장인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마태복음 7:21-23 “나에게 ‘주님, 주님’하고 말하는 이가 모두 하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가 그리 할 것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할 것이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대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선언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예전 1970-80년대에 기독교에서 성령운동을 하던 현신애 권사라는 유명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성령님의 은혜, 우리 한국교회에서 성령운동이 굉장하던 때가 있었잖아요? 그때 성령의 불을 받고 기도원에서 신유의 능력, 환상, 방언의 능력, 이러한 것들을 베풀어 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그분이 병상에 누워 있다가 영계를 들어가서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뵈었는데, 반가운 나머지 예수님께 “어머~ 예수님, 저 신애예요. 신애가 왔어요” 하면서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슥~ 쳐다보시더니,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이거 덜컥 심장 내려앉는 소리 아닙니까? ‘예수님이 나를 모르신다고?’ “그러면 저는 그렇다 치고, 조용기 목사님은 아시지요?” 하였답니다. “조용기? 그도 나는 모른다”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분이 와들와들 떨리는 거예요. 그 당시에 유명하던 부흥강사 가운데 이천석 목사라고 있었습니다. 한얼산기도원에서 엄청난 불의 사자라고 불리던. “그럼 예수님, 이천석 목사님은 아시지요?” “그도 나는 모른다.” 그래서 이제 이분이 아는 사람 이름을 다 댄 거예요. “그러면, 한경직 목사님은요?” 그랬더니, “경직이는 내가 안다”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이 이 일화를 기독교 목사들 집회에서 간증하셨나 봐요. 그랬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천석 목사가 “무슨 개소리를~!”, 이렇게 혼잣말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옆에서, 그 당시에 부흥사로 유명하던 신현균 목사가 듣고, “아니, 저분이 어찌 되시려고 말씀을 저렇게 하시나?” 하며 혼자 걱정했다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자기는 자기 확신이 너무나 넘친 나머지, 현신애 권사가 보았다는 그 환상에 관하여 “무슨 개소리냐?”고 무시했던 그 이천석 목사가 결국 풍을 맞습니다. 중풍에 걸려서 쓰러지고, 부흥강사 활동을 더 이상 못하고 한얼산기도원을 며느리에게 인계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관하여, “네가 네 일을 했지, 내 일을 했느냐?”하는 심정으로 그리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때 조용기 목사는 그 말씀을 전해 듣고, ‘엘림복지타운’이라는 것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와 노인들의 요양기관으로 활용을 했어요. 1980년대에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던 일화입니다. 마태복음 7:23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이 말씀이 바로 그러한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조용기도 아시고, 현신애도 아시고, 이천석도 다 아시는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하는 심정이셨던 것이지요.
21절, “나에게 ‘주님, 주님’하고 말하는 이가 모두 하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의 한 강도는 “주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네가 오늘 나와 더불어 (하늘의) 정원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낙원’이라고 번역되어 있지요. “나와 더불어 내 정원에 들어갈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거기가 예수님 세계의 ‘지성소’는 아니라는 말씀을 언젠가 해 드린 적이 있지요? 그러한 예수님 심정의 지성소, 그 세계에는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2절, “설령 그가 나에게서 능력을 받아 대언을 하고 말씀을 전하고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심정적 지성소에까지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가 그리 할 것이다”하는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자신의 삶과 마음과 심성을 예수님의 마음에 맞게 무르익히고 길러 가고 성장시켜 가는 인물이 그 심정적 지성소에 이르는 ‘좁은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문자 그대로 “내가 너희를 모른다”하는 말씀이 아니고. 이처럼 그분의 생애를 닮아 내야 하는데, 결국 예수님의 그러한 삶의 장인의 경지, 곧 하늘 사랑의 장인의 경지에 우리가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은사
아래 단락에 보시면, “깨달으면 확신하게 되고, 확신하면 본받게 되지요. 그리고 이러한 마음에서 사랑이 시작되는데, 이 사랑은 서로를 닮아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사랑이 무르익으면, 서로 닮아 가게 되지요. 인격과 성품이 서로 어우러져 닮아 갑니다. 그러한 사랑의 원동력, 나도 저와 같고 싶고 저도 나와 같고 싶고, 나도 저 안에 들어가고 싶고 그도 내 안에 들이고 싶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요한복음 17:21의 예수님 표현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고 하나 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사랑이 서로를 닮아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하는 이와 항상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인생의 이치라면, 예수님과는 더욱 그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고린도전서 12:4-11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로 구분되지만,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로 구분되지만, 같은 주님이십니다. 능력은 여러 가지로 구분되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온갖 능력을 베푸시는 분은 같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저마다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유익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주어지고,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또한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다른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다른 이에게는 능력을 행하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대언이, 다른 이에게는 영들을 분별하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이, 다른 이에게는 방언들을 통역하는 것이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으로서, 그분께서 몸소 원하시는 대로 저마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보세요, “그분께서 몸소 원하시는 대로 저마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 사랑하는 심정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 그것이 성서적인 용어로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성령님의 사랑을 ‘은혜’라고 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은혜’와 유사한 구약성서의 표현으로는 ‘호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너희에게 호의가 베풀어지도록 제물을 이렇게 잘 바쳐야 한다”라는 말씀들에 많이 쓰인 그 ‘호의’, ‘은혜’, ‘사랑’,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 이것을 ‘은사’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성령님의 12가지의 은사를 받아서 역사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병을 고쳐 주고, 꿈도 잘 해석해 주고, 방언도 하고, 방언을 통역해 주기도 하고, 미래를 내다보기도 하고, 영적인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대언해 주기도 하고, 설교도 잘하고, 강의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고, 이러한 것들이 ‘능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태복음 7:22 말씀과 연결 지어 본다면, “설령 내 이름으로 병을 고친다 할지라도”, 이 말씀 속에 다 들어가는 ‘은사’들입니다.
은혜 공부
성령님과 우리가 더불어 삶을 영위해 가는 노정 속에서, 이러한 12가지 은사는 ‘체험적 은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체험을 통하여 경험하는 은사들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먼저 공부해야 하는 ‘은혜 공부’가 있습니다. 성령님과 더불어 행하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우리가 성령님 속으로, 내가 성령님의 심상 속으로 들어가고, 성령님께서도 내 안에 사랑하는 연인의 심상으로 쏙 들어오실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 기본적인 9가지 과목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6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너그러움, 착함,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하는 율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아,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나는 육적인 인생이 아닌 거로구나~!’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렇게 읽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정욕과 욕망을, 육체적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제대로 속한 인물이 된다”고 하는 내용인 거예요. 바울은 자기가 나름대로 그러한 경지를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선 인물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이미 육체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다.” 자기는 이미 그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이 쉽게 나온 것인데, 그러한 바울의 경지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육체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이런 말씀을 할 수 있는 바울의 경지에 올라선다는 것입니다.
25절,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산다면, 성령을 따라 계속 걸어갑시다. 허영에 들뜨거나 서로 시비하거나 서로 질투하지 맙시다.” 이처럼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9가지의 과목이 있는데, 뭐냐? 22절, “사랑, 기쁨, 평화, 인내, 너그러움, 착함, 성실, 온유, 절제”, 이 성령의 열매 9가지에 관한 깊은 명상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평생 죽음의 순간까지 공부해 가야 하는 과목들입니다. 그래야 성령님께서도 “어, 너? 나는 너를 모르겠는데~?”, 이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성령님께서는 예수님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고 심오하신 분 아니십니까? 아니, 예수님도 그리 말씀하셨는데, 더욱 깊으신 성령님께서 그냥 헐값에요~?
체현적 성령시대
신앙이 어렸을 때는 살리기 위해서 은사도 주시고 은혜도 베푸시고 능력도 베푸십니다. 그러나 성장하여 어느 능선에 이르면,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성령님의 은사를 받아서, 앞에서 말씀 드린 현신애 권사처럼 병도 고쳐 주고 능력을 베푸는 일을 하는 ‘일꾼’으로 계속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지성소 속으로, 섬세한 사랑의 세계로 공부해 들어가는 하늘 연인들이 되어 갈 것인가? 이러한 갈림길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섭리를 가면서, 사명은 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해 갈 수 있습니다. 그 역시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평생에 천직으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들입니다. 그러나 현신애 권사처럼 ‘능력자’로서 ‘일’만 하다 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것도 예수님이 그녀를 사랑해서 그러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겠지요.
“깨달으면 확신하게 되고, 확신하면 본받게 되지요. 그리고 이러한 마음에서 사랑이 시작되는데, 이 사랑은 서로를 닮아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성령님을 사랑하십니까? 네, 우리 모두가 성령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서 체험하고, “아, 오늘 성령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역사를 베풀어 주셨어~! 할렐루~야!”, 이러한 것이 체험적 신앙입니다. 날마다 성령님을 체험하는! 그러나 앞으로의 천년은 성령님을 닮아 가는 ‘체현적 성령시대’가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닮아서, 우리 삶 속에 성령님의 자태가 이루어지는, 우리가 성령님을 닮은 하늘의 성녀들이 되어 가는, 성령님 속으로 닮아 들어가는, 성령님이 내 안에 내가 성령님 안에 스며들어 가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야흐로 성령님을 체현하여 무르익어 가는 성녀들의 시대인 것이지요. (Hong,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