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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 신영복 저 / 돌베개
책을 읽기 시작한지가 족히 한달은 된 것 같습니다.
제목처럼 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강의를 듣는 기분으로 읽다보니,
줄줄 읽기보다는 그날그날 한단원씩 공부하듯 읽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책소개를 위한 제목이 의도한것도 아닌데,
'읽으며...'가 아닌 '들으며...'로 쓰여집니다.
<강의>는,
먼저 고전의 원문을 싣고 이를 풀이한 뒤,
저자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강의>는 굳이 제 사족을 달 필요가 없을만큼 너무도 친절한 책입니다.
ㅎㅎㅎ 사족을 달래야 아는게 없어서도 못달지만요.
그래서 읽다가 공감이 많이 가는 한 부분을,
복습도 할겸 책에 있는 그대로 옮겨보려고 합니다.
좋은책을 추천해준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함께 실어서요.^^
저자가 논리정연하고 명쾌함으로 인해 극찬을 아끼지 않은 <孟子>에서 골라 보았습니다.
(한자 원문은 옮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관계로 뺐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신은 호흘이라는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고 물으시자,
그사람은 "흔종에 쓰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 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 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맹자가 齊선왕에게 왕도를 실천할 자질이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 한 질문입니다.
먼저 제선왕의 신하인 호흘한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제선왕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질문에 대한
선왕의 답변과 맹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왕 :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 :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왕 :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 :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
선왕 : (웃으면서)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건 아닌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 :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금수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줏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만나고(友),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중략)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곡속장을 통하여 반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맹자는 제선왕이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사실을 통해 제선왕에게서 보민의 덕을 보았던 것입니다.
첫댓글 신영복님의 글을 읽으면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관계는 '만남'이라는 그의 생각이 어느새 내 생각과 동일해 진다는 것 바로 그의 능력인 것 같습니다.그의 수필 중 대학때 우연히 사귀게 된 소년들과의 오랜 인연이 자신이 갇히게 되면서 겪는 아픔이 진하던 글이 생각납니다.초록님, 서재에 불켜느라 수고^^
맹자 말씀에 `惻慇之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기가 물가에 기어가는 것을 보고도 측은하게 여기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는말 그런데 내 생각엔 요사힌 그 측은지심도 없는것 같아요 초록님 좋은글 배우고 갑니다
생각이 많아 집니다..요즘은 인터넷을 만나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요...기계?를 향해서는 `惻慇之心 이 절대로 생기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이제서야 봅니다... 저도 강의 후평 준비해볼까요?^^
부탁해요~~~ 이제 좀 한가해 지셨다니~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