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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4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비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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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비결
오늘 복음의 시작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그리고 끝은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심판이니 단죄니 용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비결은
아버지로부터 자비를 받아서 되는 것인데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심판과 단죄는 하지 않고 용서할 때
그만큼 자비를 주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복음 말씀을 저는 수없이 묵상을 했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묵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저는 이번에 보게 됐습니다.
전에는 단죄나 심판이나 용서를 사람끼리 주고받는 그런 차원에서
오늘 말씀을 주로 묵상했는데 이번에 더 명확히 성찰하게 된 것은
사람끼리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에게 줄 때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는 것은 이웃에게이고
받는 것은 하느님에게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하는데
저뿐 아니라 우리는 인간끼리 주고받으며 살고,
그러는 가운데서 조금 더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조금 현명한 사람은 떼 먹히는 일이 있을지라도
주는 사람이 받고 주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많이 줄수록 많이 받고 적게 주면 적게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받기 위해 주고 그래서 떼 먹힐 경우 상처를 받습니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이 싫어서 아예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삽니다.
그런데 진정 현명하고 신앙적인 사람은 줘버리고 맙니다.
아예 받을 생각이 없고 그래서 떼 먹히지도 않고
하느님께로부터 받기에 하나의 사랑 라인이 형성됩니다.
사랑 라인이란 이번에 제가 만들어낸 말인데
영어로 하면 Love-Line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말의 내리사랑이라는 말과 비슷하고요.
사랑에는 기울기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끼리는 기울기가 없어서 준만큼 받으려고 하는데
줘버리고 받지 않으려는 사랑은 기울기가 있는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을 닮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내리사랑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그리고 그 자녀가 부모가 되어 또 자녀에게 이어지듯
신적인 내리사랑도 아버지인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그리고 우리가 다시 사랑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다시 명심해야할 것은
받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인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주는 것은 내가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가 되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녀에서
사랑하는 아비가 되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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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14일 월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7-38)
자비 실천
자비 실천은 복수심을 없애는 것과 가없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 둘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둘을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
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훈련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한계가 많은 이승에서도, 순결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불변하는 실재를 뵐 수 있게 합니다. 이 일을 못하도록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뿌리치고 곧장 빛을 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여섯 번째인 다음 단계는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텍스트, 컨텍스트, 계기
바로 이런 텍스트에 대해 우리의 삶은 그 절대적인 고유함과 여러 차원을 지닌 총체성과 함께 불가피하고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문맥의 구실을 한다. 텍스트는 우리의 삶을 설명하고 우리의 삶 역시 끊임없이 텍스트를 설명하며 명백하게 밝힌다. 이는 말씀과 우리 삶이 풀 수 없이 뒤섞여 있음을 말한다. “내 내장 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 40.9), 바로 이 생생하고도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 그러니까 순전히 두뇌 위주의 사변성 안에서만이 아니라 - 우리 정신의 각 기능들의 협력에 힘입어서, 텍스트는 모든 의미를 드러내 보이며 우리는 또 그 의미를 얻어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문맥은 또한 성경의 각 구절들이 신적 계시가 지닌
심오하고도 내적인 응집력으로 말미암아 그 해석에 필요한 다른 모든 부분들과 서로 같은 문맥을 이룬다는 사실도 뜻한다.(93)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2주간 용서/화해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 1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마태 18,1-14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구하러 왔기 때문이다.
되찾은 양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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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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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신은 뒤끝이 없는 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마주 보고 다퉜습니다.
한참을 언쟁하다가, 상대방은 말이 안 통한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뒤 이 형제님의 마음은 너무 불편했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뒤끝 없다고 했는데, 자기를 비판하고 또 다퉜던 그 사람을 쿨하게 다시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 화가 나고 얼굴도 보기 싫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자신이 얼마나 뒤끝 많은 사람인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좋은 성격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성격이 진짜로 좋은 성격이 아닐까요? 이는 무엇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상대의 잘못을 보고서 나도 그런 잘못을 할 수 있는 부족한 인간임을 인정할 때, 진정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살지 않고 남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하나가 자기 눈에 너무 잘 보이는 남의 잘못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의 잘한 일을 인정할 때는 주의 깊은 관찰과 분석을 통해서 가능하면서도, 남의 잘못은 왜 이렇게 빨리 자기 눈에 비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상대방에게는 남이 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나의 잘못이 너무 쉽게 보일 것입니다.
정말로 고치기 힘든 우리의 악습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에 걸쳐서 이 악습을 버리라는 말들이 많습니다. 중국 고전 전한서는 ‘남의 공은 기억하고 과실은 잊어라.’라고 했으며, 서양의 격언은 ‘남을 고쳐 준다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열 번 더 낫다’라고 전해줍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에 온전하게 들어갈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도 치료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남을 탓하고 교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대신 남의 잘못을 보고, 그 잘못이 내 잘못도 되지 않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의 겉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법’이 할 일이고, 속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입니다. 따라서 남의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 먼저 자기 잘못을 고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용서하고, 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께 더 커다란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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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배워 그런 사람이 되어라(핀다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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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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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뒤의 둘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곧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0,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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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받는다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을 할때 원고를 보고하면“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하고 원고 없이 하면“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하고 예화를 안 하면“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않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하며 부자와 가까이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누구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자기 역할과 관계없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의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부 푀멘은“비판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뒷담화를 하시나요?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실 자비는 미흡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회개를 일으키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를 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상대를 너그럽게 받아준다면 그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자비를 간구하는 삶의 여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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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0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한국 교회가 교황님의 요청으로 시노드를 준비하면서 제시한 용어입니다. 한국말로 번역할 수 있지만 원어인 시노달리타스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시노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라면, 시노달리타스는 회의를 통해서 마련하는 ‘공동합의’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월 20일 기사에 시노달리타스를 얻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에 주목하자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시노달리타스와 신약성경의 관계에 대해서 신문에 나온 기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시노달리타스를 얻기 위한 밭은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교회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초대교회의 성찰과 실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성찰과 실천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 전해졌지만 온 세상에 전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서간은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규범과 실천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묵시록은 우리는 현실이라는 땅에 서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였습니다. 태어나신 구유에서도, 죽음의 십자가에서도 늘 가난하였습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첫 번째 합의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선교에 대한 기록입니다. 선교는 3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온전하게 응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화입니다. 둘째,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이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되찾는 회개, 복음대로 살려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 복음화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사도행전은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에 있는 교회에 먼저 구성원부터 복음화 할 것을 권고합니다. 아울러 모든 이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서간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로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입니다. 서간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사랑’ 곧 윤리 덕목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새로운 삶이고,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약성경의 서간들은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비와 용서의 삶’ 그리고 ‘일치의 삶’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시노달리타스는 진실한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의 준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유배지에서 돌아 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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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로운 사람
-우리 인생의 궁극목표-
인생의 궁극목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도 당신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도 날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최후심판도 우리가 얼마나 자비로운 삶을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사실 살다보면 점점 똑같아집니다. 죽을 때는 완전히 똑같아 집니다. 단 하나 차이는 좋은 사람인가 자비로운 사람인가 믿음의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의 사람이었는가 하나만 남을 것입니다.
“봄비
젖은
촉촉한 대지
언제나
거기
그 자리
위로와
치유의
산같은 하느님이시다”-2022.3.13.
어제 봄비 내린 아침에 썼던 글입니다. 메마른 온누리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같은 차별없이 누구나에게 자비하신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산같이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대자대비하신 연민의 하느님이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랑, 측은히 여기는 사랑, 가엾이 여기는 사랑이 바로 연민의 사랑,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복잡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실천의 수행입니다. 주님은 바로 구체적 실천의 처방을 제시하십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3.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모두가 실천해야 할 동사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애매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실천의 사람이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알면 이대로 합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이기에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의 한계와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결코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용서할 것이며 줄 것입니다.
이래서 진정성 가득한 회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겸손과 자비를 닮아갑니다. 다니엘 예언자가 이런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진솔하고 겸손한 회개의 기도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일부만 인용했습니다만, 이스라엘인들을 대표한 다니엘의 기도가 진정성이 넘칩니다.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회개의 기도가 무지에서 벗어나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자비하신 하느님뿐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기도를 통해 겸손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비로소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자비의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산상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회개한 우리 모두가 날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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