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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처럼 살기
마태복음 6:9-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11번째 주일이다. 이젠 무더위에 익숙해졌다. 사람의 몸이 어렵게 적응하고 나면, 그 다음에 포기한 듯 마음이 적응한다. 모레는 어느새 입추이다. 곧 가을바람이 불어온다는 생각이 실감나지 않는다.
지난 주간에 새벽기도회를 한 주간 쉬었다. 문제는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몸과 마음이 깨어난다는 사실이다. 처음 목회를 할 때에는 새벽이 두려웠다. 제 때 일어나지 못해 종종 실수하다보니 새벽시간 그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한동안 어머니가 전화로 나를 깨워주기도 하셨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를 열기도 전에 이미 하루의 책임을 다 한듯하다.
다음 주일은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이다. 올해도 남북한과 세계교회가 함께 나눌 공동기도문의 초안을 내가 작성하였다. 어느새 6년 연속으로 썼다. 예전에 부활절 기도문 초안 작성까지 합하면 벌써 10번째이다. 초안을 쓰면 남북교회가 팩스로 오가며 수정을 한다. 예민할 때는 한 단어 한 단어에 촉각을 세운다.
올해 기도문 초안 작성은 이전과 달리 무척 홀가분하였다. 그동안 기도문을 쓸 때는 늘 남북관계가 불안하고, 적대적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그런데 올해는 판문점 선언 이후 희망적인 내용을 담아낼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올해에 북쪽의 수정 제안이 가장 많았다고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도는 평안할 때 보다, 어렵고 힘들 때 제대로 하는 것이구나!
사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 해마다 특별한 기도문을 도맡아 쓰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아마 내가 첫 목회지인 문수산성교회 때부터 주보에 공동체기도문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도의 언어를 사랑하였다. 1986년 여름에 주보에 쓴 기도문이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사랑의 하나님/
7월의 푸르름은 여름을 더욱 윤기 있게 했고 긴 장마 끝의 하늘은 오히려 파랗습니다/
넓고 푸른 들에는 성큼 자란 벼가 출렁거리고 농부들의 일손은 여전히 바쁩니다/
들풀과 해바라기는 한참이나 자라나 벌써 여름이 깊어졌음을 실감나게 합니다/
주여, 이 무더위 속에서도 생명의 여름을 마시고, 빛나는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먹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힘을 얻게 하소서/
저희들의 연약한 마음을 굳게 잡아주시고 흔들리기 쉬운 신앙을 꼭 붙들어 주시옵소서/
뙤약볕에서 힘들어 일하는 농부들의 땀과 수고를 기억하시고 풍요로운 결실을 허락하시며, 양담배 수입, 쇠고기 수입, 돼지파동 등 농민을 괴롭히는 경제정책이 더 이상 없게 하소서/
이 여름, 시원한 꿈을 꾸게 하소서/
부지런히 일하는 농민이 주인 되는 꿈,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 되는 꿈/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1)
지난 주일에 ‘나는 빕니다’란 제목으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다. ‘주님의 기도’를 나누었는데, 한 번 더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일까? 네가 기도한 대로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은 바로 주기도문대로 살 마음을 결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은 ‘주기도문처럼 살기’이다.
정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그들은 주기도문을 함부로 암송하지 않는다. 크리소스토무스 예전에 따르면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에 먼저 이렇게 선언한다.
“오 주님, 우리를 용납하옵소서. 우리가 기쁘고 담대하게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기도를 암송하는 것을 받아 주옵소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한다. 마틴 루터는 “주기도문처럼 순교를 많이 당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주기도문을 반복해 암송했지만, 주기도문처럼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생활화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따라서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기도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 체코 사람 코메니우스는“주기도문은 아버지의 마음을 여는 최상의 열쇠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언약 가운데 머무르려고 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기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 기도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 바른 기도를 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참 좋은 기도의 모범답안이다.
내가 첫 목회지에서 매주 공동체기도문을 작성한 이유는 그때 회중을 대표해서 기도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공동체기도문을 고백하였다. 나중에 회중 기도를 하게 된 분들은 이미 했던 공동체기도문을 인용하였고, 그대로 따라 배웠다. 그 당시에도 시골 사람들은 기도를 문장으로 만들어서 정성껏 기도하였다.
내가 공동체기도문에 농부들의 일상적인 삶과 세상의 염려와 시대의 아픔을 담으려고 노력했더니, 대체로 교인들이 그렇게 기도하였다. 그 분들은 자신의 기도 안에 벼가 수해로 잠기든지, 동네사람이 교통사고로 입원하든지,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든지, 나라 경제가 어렵든지, 이를 모두 세세히 하나님께 아뢰었다.
문수산성교회의 기도 스타일은 늘 솔직한 것이다. 자신의 기도 속에 아주 소소한 일상을 빌었고 또 세계를 부둥켜안았다. 구체적인 현실을 낱낱이 하나님께 고해 바쳤다. 나는 문수산성교회에서 기도하는 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앵커맨’이란 별명을 붙여 드렸다. 비록 9시 뉴스 진행자가 세상의 소식을 다 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일과 세상의 일을 다 알려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적어도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신다. 나는 기도할 때 가장 친밀한 하나님의 이름인 ‘우리 아버지’를 부른다. 마치 세상의 주인공이 된 양 하늘의 기도와 땅의 기도를 종합적으로 드린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과 나를 기도로 연결하고, 부족한 내 기도를 온전히 완성시키며, 온 세계 그리스도인과 연대하게 한다.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주어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한다. 주기도문에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가득하다. 주기도문을 온전히 내 기도로 삼는 것은 그동안 내가 주어이고, 중심이었던 내 삶에 다시 주님을 모시어 들이는 내면적 개혁을 단행하는 일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일이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든지, 그 모든 기도의 삶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
기도는 그 얼굴을 하나님을 향해 드는 것이다. 흔히 얼굴의 어원은 ‘얼이 통하는 굴’이라고 한다. 얼은 정신, 영혼으로 통한다. 어리벙벙은 얼이 제 자리를 못 잡은 상태이고, 어리석다는 얼이 썩었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예수님의 얼이 그 얼굴에, 그 가슴에, 그 삶에 제대로 박혀야 한다.
그래서 기도 중의 기도는 주기도문이다. 우리는 이 기도로 날마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다. 주기도문만큼 위대한 기도가 또 있을까?
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그렇게 살라고 하신다.
먼저, 기도에는 삶이 담겨있다. 만약 구체적인 현실이나 삶의 요구와 동떨어진 기도는 예수님이 지적하신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마 6:7) 하는 것이다. 즉 “일용할 양식”과 같은 내용이 빠진 실속 없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이다.
나 자신의 현실과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세계의 평화와 우주적 구원에 기도를 매일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일용할 양식’으로부터 가장 넓은 범위의 기도인 ‘하나님 나라’까지 모두 담겨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내 삶과 역사 모두이다.
또한, 기도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기도는 홀로 하는 독백이 아니다.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말은 많이 하면서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전통은 그저 기도문을 읽는 것이었다.
처음에 엘리야가 드린 기도는 원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점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기도를 하늘로 올려 보냈다면, 이젠 마음을 열고 그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 한다. 주기도문에 하늘을 향한 기도와 땅을 향한 기도가 골고루 담긴 이유이다.
그리고, 기도에는 내 미래가 담겨있다. 기도의 명품은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년에 겨우 몇 번 회중을 대표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내 생활스타일에 맞고, 시도 때도 없이 드릴 수 있는 그런 기도를 내 삶에 적용해야 한다.
사실 기도의 내용이나 기도의 성격에 따라 내 인생의 운명이 결정된다. 기도는 인간의 생, 그 자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영적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을 기도하느냐에 따라 그의 생의 진로와 방향이 결정되고, 종당에는 그의 운명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믿는 구석’이 아닌, ‘믿는 중심’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따르면 기도는 생활이고, 기도는 권리이며, 기도는 의무이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 못지않게 ‘일용할 기도’가 필요하다. 하루에 몇 잔씩 커피를 마시듯, 하루에 몇 차례씩 마음을 하나님께 모아야 한다.
3)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고백하는 것은 쉬운데, ‘주기도문처럼 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주님의 기도에는 삶의 소소한 요구부터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도의 중심이 담겨있다. 주기도문은 암호나 주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의 간구의 내용대로 그렇게 살라고 하신다. 기도를 통해 내 삶과 하나님의 뜻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남미 우루구와이의 한 작은 예배당의 벽에 이런 기도문이 적혀있다고 한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라는 제목인데, 주기도문을 한 구절씩 적고나서 이 구절에 대한 반성을 한마디씩 덧붙여 놓았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여”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과 딸답게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해보라. 내 평온한 일상의 삶이든, 하나님의 비상사태이든 그 기도 안에 존재하라. 때로는 내 기도보다 주님의 기도를 반복해서 기도드리라. 주기도문 안에 있는 일곱 가지 간구는 고백과 실천, 기도와 현실의 긴장 사이에 존재한다. 이를 통해 참된 경건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 일용할 양식은 얼마나 중요한가? 또 일용할 기도는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은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매일매일 필요한 몫이다. 가장 중요한 양식은 바로 오늘의 몫이다. 그것은 오늘의 문제이다. 하루하루가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이다.
돈보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매일의 의무를 기쁘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해야 할 바를 성실히 해 나갑시다. 일상에 대한 충실, 그것보다 더 큰 봉헌은 없습니다.”
이것을 ‘일상(日常)의 영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은 매일의 삶에 충실한 영성, 매일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영성,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실한 영성이다. 더 나아가 날마다 겪는 작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업무들에 충실한 영성, 아울러 매일 와 닿는 고통스런 상황들을 기꺼이 수용하는 영성이다. 다름 아닌 매일의 십자가를 기꺼이 견뎌내는 영성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따라, 주기도문의 내용을 더 충실하게 기도해야 한다. 바로 ‘일용할 양식’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까지, 주기도문처럼 살라고 하신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사람은 적어도 주기도문대로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 인생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품되,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 삶을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의 생생함을 회복하기 바란다.
우리의 기도 생활 속에서 내 소소한 일상의 요청부터 세계를 부둥켜안는 기도까지, 그런 생생함을 회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잠이 안오는 새벽 복음서를 묵상하고 기도를 하다가 색동카페에 들어와 목사님 말씀을 읽는데 86년도에 쓰신 기도문은 한문장 한문장이 너무나 시적이고 아름다워요^^ 역시 목사님..^^
저번주부터 저희 부부가 새벽기도를 시작한터라 설교문 내용이 더욱더 공감이 가고 반가웁네요..! 아직 습관이 안되어서 하루의 리듬이 정돈되진 않았지만 매순간 주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목사님 너무너무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무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고 기도 속에 저희 부부도 기억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