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安平大君)의 관용
(안평대군의 글과 그림들)
야심한 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드님 安平大君宅 후원.
“宮中相姦(궁중상간)이다. 꼼짝말라”
수노(首奴)의 벽력같은 호통소리가 들렸다.
大君의 宮이 발칵 뒤집혔다.
이튿날 별관 대청에 나 앉은 大君앞에 두 男女가 끌리어 나왔다.
여인은 大君이 귀여워하던 18세난 소첩(小妾) 소옥(小玉)이였고
사내는 궁노(宮奴) 덕만이다.
둘은 소옥이 아직 궁에 들어오기 전 어릴 때부터
이웃에서 함께 살던 총각처녀,
복이(福伊; 小玉은 安平이 지어준 애칭)와 덕만이였다.
심문하는 대군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이놈 네 덕만이 란 놈 고개를 들어라!
네 언제부터 小玉이와 친했는냐?”
“이미 몇 해가 되옵니다”
“뭐 몇 해가 된다고?”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居鄕(거향)에 있을 때부터 이웃에 가까이 살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네 거향에서부터 상간(相姦)하였더냐?”
“아니올시다.
그냥 알고 사모했을 뿐이올시다”
“이놈 은휘(隱諱)하지마라!
서로 알았으면 상간이 안 될 이치가 있느냐?
네 이 곳에 와서도 상간을 했지?”
“사모하면서도 사모한다는 말도 입 밖에 비친 일이 없사온데...
부당하외다 나으리.
소인이 주야로 잊지 못해 먼발치에서나마 만나보면서
살고 싶은 뜻은 있었사오나, 상간이라니요..
오늘밤 비로소 서로 만나기로 했고,
그동안 떠나 있던 정리를 말했을 뿐인데,
상간이란 당치 않습니다”
“소옥(小玉)아.
내가 네게 무엇을 부족하게 했기에 그런 행동을 했느냐”
“네 또한 저놈을 그리워했단 말이냐?”
“그리웠습니다”
“지금은 어떠냐? 지금도 저놈을 사랑한단 말이냐?”
“법으로는 나리를 쫓사오나....”
“법으로는 나를 따르나....”
“마음으로는 덕만이를 사모하옵니다 ”
“진정이냐?”
“나으리께 황송하옵니다”
“이 연놈을 광속에 가두어라.
형조(刑曹)에 알려 물고(物故;죄인을 죽이는 것)하라 하여라”
아침 진시(辰時) 두 남녀 죄수는
형리(刑吏)에 끌려 교형실(絞刑室;목을 매다는 방) 문 앞에 이르렀다.
형리 “너 덕만이 먼저 들어가거라! 시간이 없다”
덕만이를 바라보는 소옥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막 덕만이 형실(刑室)로 들어가려던 순간,
옥승(獄丞)이
“기다려라!”하는 호령과 함께 나타나,
형리들을 모두 물러 나게 한 다음,
“大君의 각별한 부탁으로 너희들의 행형(行刑)을 중지한다.
궁중풍기를 바로잡기 위해 너희를 처형코자 형조(刑曹)로 보내긴 했으나,
물고시키는 것이 불쌍하다는 고마운 말씀이시고,
너희는 즉시 한양 백리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도성에 들지 말라시는 분부시다”
그리고 전대(錢袋:돈이 든 자루)를 하나 건네면서
“이것은 대군(大君)께서 내리시는 노자돈이다.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
동작나루 건너 남쪽으로 통하는 대로.
봇짐 진 덕만이와 小玉이 서울을 향해 무릎 꿇고 절을 올린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으리”
뒷날,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손에 죽은 안평대군의 기일(忌日)이 되면,
이 두 남녀와 그 식솔들은 남모르게 정성껏 제사를 드렸다 한다.
<『韓國野談全集』의 내용을 축약(縮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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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글속에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시는 우리님들 우리는 좋은친구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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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억으로 지식이다" 영적 기능의 확률적 효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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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현상계에 반복하는 성장 그것의 우주다. 때문에 우리의 매일에 파동과 진동은 빛이 있으므로 아침 점심 저녁 격도록 있습니다.
인간도 자연의 신성함에 따라 지성체다.
그러나 몸의 세포 하나하나는 태어나면서 부터 인위 그 동물적 굴래 대물림으로 안주하는 마음이 믿음이 되면서 그것으로 종교(바이러스)가 몸에 있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내면은 사회라는 감옥, 그런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다. 안주하려는 순간만을 반복하는 본질만으로 그렇게 수 천년을 윤회로 살아왔을 수있다. 그렇게 조상의 대물림 그 착각의 시간이 우리의 역사가 된다.
영 그 신성을 잃어버리도록 세뇌 시켜지면서 신성의 평온함을 잊은체 본성이란 애고 그 거짓들이 인위의 꿈을 희망으로 성공의 생에 불안과 고통만이 끈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이 먹어 익어가면서 몸이 참고 견디고서야 내 마음의 외부기능이 영이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 정신 그 영 육체는 전자기능 주파수다. 신성이 사회의 파동을 격지만 재지각이 나타나게 주파수가 있는 것이다. 만물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빛 때문에 였다는 것 신성의 몸은 빛이 그려내는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생물학적 존재다. 신성을 찿아 정신을 다중우주공간에 저장하기위해 주파수 내몸 도구을 걸래처럼 쓰게 나타낸 것이다.
몸은 죽음뒤에도 영이 한결같이 살게 있다는 이유 그 느낌에서....
그렇습니다 "나는 핵 원자로 태양으로 인한 에너지로 빛의 수호자다. 지극히 한정된 삶의 반복을 격도록 우주의 평창에 이끌린다. 그래서 내 몸속 자기 부정적 경험을 통해 진화의 목적에 나의 실재가 인격으로 나타나는 것 입니다.
힘든 것을 좋와서 일부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경조억겹의 통로가 핵원자이어야 하기 때문 입니다.
빛은 지성체라 불리우는 어버이를 만들고 그 인격으로 자신의 신성에 따라 찿아지는 과정 베풀기위해 스승 신의 현원인 것 입니다.
만물이 신 현원으로 격는 진화며 빛의 움직임으로 평창하는 우주 입니다. 우주먼지이면서 다중우주란 실재 에너지 태양의 시간에 빠르게 반복하는 일생 입니다. 우리는 움직임을 먹음는 빛의 찰나에 실체다. 나는 우주의 목적애 이끌리는 평창입니다. 나의 지식 그 영에 확정된 전자기능으로 몸의 죽음 뒤에는 바로 몸의 나타남을 반복합니다. 현미경으로도 잘 나타낼 수없는 000000000000000.1 의 핵에너지 기능이다. 빛의 실체며 몸의 나타남이 찰나에 반복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성체로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구도 태양도 몸도 우주의 도구인 것이다.
백만년이 2500번을 지나며 항성과 행성이 없어지고 나타나는 이유의 관계 빛 까지도 다스리는 암흑 물질 에너지의 힘이라는 것, 불랙홀은 또다른 우주로의 복사 과정이라는 것, 나도 태양도 지구도 찰나로 재임되는 홀로그램 입니다. 그렇게 평창하기위해 복사되는 실체 우리는 지금 이곳 또 우주 어느 곳에나 다르게 있는 실재라는 것, 그래서 없는 것을 보고 느끼는 실체가 지금 진화를 격고있는 오늘 입니다. 몸은 죽기도하고 영이 있어 다시 태어나기도 하는 씨앗이 있어 뿌리인 것입니다. 진동과 파장에 맞춰진 광자대 입니다. 힘든 날은 없습니다. 고로 죽음도 없습니다. 다 그런 날이 있도록 반복하는 힘 더 큰 에너지의 목적에 의해 끄러당김의 힘이 부드러워 지는 것 입니다. 그 엄청난 우주근원의 진화는 그렇습니다. 다 마련으로 차려진 것들 입니다. 000000000000000000.1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의 생각은 각기 다른 주장으로 여러 문재를 겪 습니다. 거듭하는 빈 공간의 개념. 사라짐을 반복하면 커지는 힘 우리 몸 속에도 있고 지구에도 태양에도 우리 일상에도 있습니다. 빛이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일상에 목적이 되어 발견으로 살도록 합니다.
"죽음이 반복하여 창초되는 진화,
신을 위해 선량해 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성체인 나 자신을 위해 선량해지면 신들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나는 저절로 선량해 집니다.
한번 배우고 또 다시 재 지각을 반복하도록 격는 순간들
숨쉬는 시너지 주파수 파동의 공간들....
숨쉬는 움직임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도록 반복하는 생명입니다.
몸은 배풀기위해 있는 영의 도구입니다.
고로 두려움이 없도록 홀로그램 인생입니다.
몸이 컴퓨터 본체라면
영은 기억장치 해드디스크 입니다.
덕은 인위적인 덕이 아닙니다. 최상의 덕은 덕을 의심하지 않음으로 덕이 있는 것이고 정도가 낮은 덕은 덕에 매여있기에 덕이 없는 것이다. 최상의 덕은 무위여서 자연스럽고 정도가 낮은 덕은 유위로서 부자연 스럽다. 인은 유위로 자연스럽고 의는 무위며 부자연 스럽습니다. 사회의 예는 유위이고 그 예는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 붙이라고도 예을 든다.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지면 무위자연의 덕이 나타나고 무위자연의 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데...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예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마음이 엷어진 것이며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미리 내어보려는 예와 지, 그 지식은 도의 알맹 없는 겉치레와 같은 것, 나 존재를 어지럽고 못나게 만들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사람은 예와 지를 버리고 도을 택하는 것입니다.
"도'의 길
도의 길은 하루하루를 게으르지않게 일하며 움직임으로 오는 복 그 돈을 나를 없애는 데 씁니다. 나눔의 경험이 채워질 때 "도"가옵니다. 없애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수치심도 이기고 또 이기면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결핍 덩어리였던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어머니, 아버지, 아내, 동생, 더많은 여자,여자,여자, 결핍자아 수치심을 견디고 참는 과정이였습니다. 그토록 그렇게 고맙게 나를 아프도록 했던 것이 있었기에 나는 신성을 찾았고 진리를 맛보는 의미로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 에게 이런 말도 전하게 되는 것 입니다. 각성을 이용하여 내 인연의 모든 분들과 진정한 인격의 가치를 세우는 가족이 되어 가겠습니다.
무위경조
평생이 담긴 그 하루
노동이 없는 돈 때문에 정신은 파멸되어 갑니다. 늘 움직임을 여의는... 자기 기능을 찾는... 그 습관만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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