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참전병사의 기록에...적은선박 수백척이 있었다...라고,기록됨. (이것은 사호집.에..기록된.피난선 1천척 소형배.참전설을.증명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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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21권 효종10년, 윤 3월30일.(효종21권 10년,순치 16년) .................................................................................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
致有元均之敗。 其後舜臣, 以若于龜舡, 擊破大賊, 誠是不易得之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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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21권 효종10년, 윤 3월30일.(효종21권 10년,순치 16년) .................................................................................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
致有元均之敗。 其後舜臣, 以若于龜舡, 擊破大賊, 誠是不易得之才也。
위에 글이 조선왕조실록..원본..복사한것으로... 명량해전(명량대첩)에서...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적은숫자의 거북선, 을 가지고...왜적, 대군을 격파하였다는...조선,왕, 효종이 인정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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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글은...명량해전에 거북선이 있었다는...결정적, 증거 입니다. 현대의 명량해전 연구가들이 주장하는, 명량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없었다. 칠천량해전에서..원균이 패할때에..전부 침몰되었다. 그래서 거북선은 없다. 이렇게..주장하는분들이 거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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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순신장군의 조카 이분...이 충무공 이순신장군 행록...에서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인수한 전함..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개조하도록,명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여기에,더하여...사호공 오익창 의,문집..사호집. 기록에 의하면.. 1700년대, 정조시대에..조선의 유명인,들(예을들면,정조시대,재상,체재공) 6인이 기록한 문집등에..명량해전 직전에.. 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개조하였다. 사호공,오익창이 거북선을 만들었고..이순신장군이 자주찾아와서..논하였다. 라고..기록되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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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같이 역사적, 고증이 가능한, 충분한 자료가, 이미 10년전에 발견되고. 전라북도의 역사학자, 10여분들의 역사교수님들의..고증을 거쳐서...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 242호 로 지정되었는데... 명량해전을 연구하는 많은학자와 연구자들이...명량해전의 거북선 참전의 존재을 부정하고..거북선은 없었다라고..부정하면서.. 명량해전의 기적같은 승전의 원인을...철쇄설(쇠사슬사용)등.등... 많은 혼란을 만들고 있읍니다. 진실을찾는것이..역사적으로 중요한데...유명, 메스컴..전문가..유명인들이 앞다투어..자기주장만..옳다고 주장하니.. 명량해전에 대하여...혼란만 가중될뿐...진실이 정리가안되고 있읍니다. 이제는. 명량해전에서..거북선의 존재을 인정하고..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서..완벽한 거북선은 아니지먄..급조한.. 새로운 거북선을 만들어서..전쟁에서 이겼다...라고 생각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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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 윤 3월30일 조선왕실의 경연에서. 효종왕에게 보고한...명량해전과 이순신장군에 대한...역사의 글이... 진실이 아니고...잘못된것이라고...말할수있는...현대의 역사가가 있다면... 현대의 역사가(이순신장군.명량해전 연구자들)가 잘못된것이라..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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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일본측 기록 분석.
1.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
九月十八日付船手衆注進状 (毛利高棟文書 中) 9월18일 수군 주진장
謹而奉致言上候、先書如申上候、於全州各致相談候て、全羅之川口江罷出候事 삼가 받들어 말씀 위로 올립니다. 앞의 서신에서 올린 바와 같이 전라도의 해협에서 적을 내쫓은 일에 대해서 전주에서 협의하였음.
一 風自分ニ御座候付而、此度者大船共ハ彼川口ニ残し置、小関舟斗にて去十日ニ打立、赤国浦〻嶋〻過半発向仕候事 하나. 바람이 심해서 이 대선들은 모두 강구(아마도 섬진강 하구?)에 남겨두고 작은 관선(세키부네)들로 10일에 출발했음.
一 たいたんむろのむかひ水営と申城の瀬戸口ニ番舟・大船拾四艘、其外小舟数百艘かゝり居申候条、即十六日押懸申候而、卯刻より申刻迄相戦申候事 하나. 타이탄무로(진도)의 건너편 수영과 신성 해협의 입구에 조선수군 대선14척 그 외 작은배 수백척이 정박해 있어 즉시 16일 쳐들어가 새벽6시부터 오후4시까지 싸움을 했음.
작은 배 수백척은 아마도 초탐선(23척)과 피난민들의 작은 어선을 모두 군선으로 착각한 듯.
一 毛利民部太輔のり舟壱艘、幷藤堂佐渡守家中の舟壱艘、番舟の大船へ相付申候、然処ニ民部太輔則切乗、やゝ久相戦申、自身貳ケ所手負、其上海上ヘ被打落候、右之仕合誠無比類手からにて御座候、則民部太輔事者、藤堂佐渡右之付申候舟へ乗移、異儀無御座候、幷民部太輔のり舟も無異儀引取申候事 하나. 모리고정(毛利高政 - 모리 다카마사)의 배 한척과 등당좌도수(藤堂佐渡守 - 도도 다카도라) 가문의 배 한척이 함께 조선 수군의 큰 배에 서로 붙었고 그래서 그곳에서 민부대보(毛利高政)는 올라 타 넘어 서로 전투하다 자신은 두 곳에 부상을 입고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즉시 모리고정은 등당좌도의 배로 옮겨 타 무사했습니다. 모리고정의 배도 무사했음.
모리 다카마사는 군감독관으로 명량해전에 참전, 전투 막바지 일본군 후방까지 위협한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물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안위의 배를 공격하려다가 빠진 것인지... 감독관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울 뻔 했다면서 아부하는 내용. 이때 도도 다카요시(藤堂高吉) / 다카도라의 양자)가 모리 다카마사를 구조.
一 申刻迄相戦、則見合を以悉可討果与存候刻、大風吹出、番船依為案内者、遠嶋帆に任逃退申候、則六七里斗追懸雖申候、暮に及、其上嶋〻無案内ニ付而、番舟の小舟共数艘やきわり申候事 하나. 오후 4기까지의 싸웠고 드디어 적을 실로 토벌하려는 순간 큰 바람이 불고 조선 배가 지형을 잘 아는 것에 의지해 먼 섬으로 돛을 올리고 도망가 즉시 6,7리를 추격했는데 날이 저물고 그 섬과 섬을 잘 몰라서 조선 수군의 작은 배 수척을 부수고 들어온 일.
여기서부터는 패전을 승전으로 포장하는 내용. 의미없음.
一 右戦候翌日、彼番舟の有所早舟を以方〻浦〻雖相尋申候、近辺ニ相見不申候、尚従是先手羅州の川口へおし廻し、近郡発向仕、追〻可致言上候、此等之趣、宜預御披露候、恐〻謹言.
하나. 이 전투의 다음날 저 조선 배의 소재를 빠른 배로 포구마다 찾았으나 근처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우선 나주의 강구(영산강 하구)에 배를 돌려 가까운 군을 향했습니다. 이에 대해 추후에 보고 하겠습니다. 이런 사항을 알려주실 일을 삼가 말씀드립니다.
九月一八日
藤堂佐渡守 (토도 사도노카미 - 토도 다카도라 藤堂高虎) 脇坂中務少輔 (하시바 나카츠카사노쇼 -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菅平右衛門 (칸 헤이에몬 - 칸 미치나가 管達長) 藤堂宮内少輔 (토도 미야우치쇼부 - 토도 다카요시 藤堂高吉 / 토도 다카도라 양자) 加藤左馬助 (카토 사마노스케 - 카토 요시아키라 加藤嘉明) 増田右衛門尉殿 (마시타 우에몬노쇼죠 - 마시타 나가모리 増田長盛) / 봉행 石田治部少輔殿 (이시다 지부노쇼 -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 봉행 長束太蔵太輔殿 (나가츠카 오쿠라다이후 - 나가츠카 마사이에 長束正家) / 봉행
2.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 묵기(默記)
御歸陣被成候 ちとまへかとにこもかいへ御こしなされ候 処にすいえんと申所にはん舟の大しやう分十三そうい申候 大川のせよりはやきしはのさし引御さ候 所の內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申候 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申候 それを見付是ともとり可よし舟手と御相にてはいまのせとをこきくたし候 儀は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を御かゝり被成 さき手のふねともハ敵船にあひ手負あまたいてき申候 中にも來島出雲守殿うちしににて御座候 其外ふね手の衆めしつれられ候 からうのもの共もくわはん手負討死仕候 処に 毛利民部大夫殿せき舟にて、はんふねへ御かゝり成候。 はん船へ十文字のかまを御かけ候処に、 はん船より弓鉄砲はけしくうち申候に付、 船をはなれ海へ御はいりなされ、あやうく候 処に、藤堂孫八郎、藤堂勘解由両人船をよせ、敵船をおいのけ、たすけ申候。 朝の五しふんより酉の刻まて御合戰にて御座候 みなとのやうすはん船能存候に付風を能見すまし 其せと口をめけほをひきかけはしらせ申について是非なくおつかけ申儀もまかいならす いつみ樣も手を二か所おはせられ候
그 조금 전에 제포(薺浦-경상우수영)에 가셨습니다. '수영(해남에 위치했던 전라 우수영을 말하는 듯)'이라는 곳에 조선 대장선 13척이 있었습니다. 큰 강의 여울목에서 바닷물의 간만이 빠른 해역인데,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13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꼭 쳐부숴야겠다고 수군(舟手)들과 상의하여 싸우게 된 것입니다. 큰 배로는 지금의 좁은 해역을 배를 저어나갈 수 없으므로, 모두 세끼부네(關船)를 마련한 후에 싸움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먼저 싸움을 시작한 수군들은 적선을 만나,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습니다. 그중에서 '쿠루시마 이즈모노카미 (来嶋出雲守 - 쿠루시마 미치후사 來島出雲)'님은 전사하셨습니다. 그 밖에 수군들이 잡혀갔습니다. 부하들도 과반수는 잡혀가거나 전사하든가 했습니다. 그곳에서 '모리민부타이후 (毛利民部大輔 - 모리 타카마사 毛利高政)님이 세끼부네를 타고 적선을 공격했습니다. 적선으로 뛰어들어가기 위해 십자 모양의 낫을 걸었습니다만, 적선으로부터 활과 총탄이 격렬하게 퍼부었므로 배를 떠나 바다로 들어가 위험하게 되었는데, 도도 송하찌로(藤堂孫八郎)'와 '토도 다카요시(藤堂勘解由)' 두 사람의 배가 다가와서 적선들을 밀어제친 후 구해드렸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싸웠습니다. 항구의 모습이나 적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바람의 방향도 잘 판단하여서 그 좁은 해역을 벗어나 돛을 끌어 당겨 달렸습니다. 그 때문에 적도 어쩔 수 없이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쯔미 님(和泉樣 - 도도 다까도라 藤堂高虎)도 팔 두 곳을 부상당했습니다.)
1. 사실 전투 보고서는 감독관인 모리 타카마사가 작성해야될 내용인데 상술했다시피 그는 전투 중 부상으로 인해서 불가능하므로 다음 책임자인 토도 다카도라가 작성해야 하지만, 그 또한 명량해전에서 화살 2발을 맞는 등 부상을 당해, 아마도 토도 다카도라의 가신(토도를 이쯔미님이라 칭한 것만 봐도...)이 작성한 듯.
2. 모리고동문서와 전투 시간이 차이가 남. 명량해전에는 정확한 시간은 언급없음. 아마도 모리고동문서는 어란진에서 출발한 시간부터 서술한 듯. 전투의 종료는 큰 의미없음.
3. 모리고동문서와 동일하게 '모리 타카마사'가 전투 중 부상, 구조한 상황이 서술.
4. 모리고동문서에서는 언급이 안 된 쿠루시마 미치후사의 죽음이 언급.
5. 마지막 문장에서 보건데, 전투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은 해당 문서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임. [출처] 명량해전 일본측 기록 분석.|작성자 리안2001
조선수군.대선 14척 . 적은배 수백척, 이 정박해 있었다. ......................................................................................
이글은, 사호집에 나오는 전라도 사대부.피난선 일천척, 이 이순신 함대뒤에 진을치고..지원하였다. 는것을 증명하는것이다... 사호집의 기록을 사실로 증명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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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의 조카...이분...이 기록한 충무공...행록에는 명량해전에 대한...많은,참고자료..가..보인다.
첫째...명량해전 직전에..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 대비하여.. 적은숫자의 함선으로...많은 적선과 싸우기위해서는...거북선,이 필요하여 긴급하게..12척의 전함을..거북선으로 개조하도록...명령을 하였다는것이다.
둘째...명량해전에서 수백척의 피난선이...병사,들의 식량과 옷등..많은 군수품을 지원하였다는것이다.
사호집..내용과는..상당히 차이가 있으나... 피난선의 존재와 거북선의 존재는 긍정적으로..인정하고있음..을 알수있다.
셋째...이분..이..거북선..역활에 대하여..말하기을...
또 전선을 창작하니 크기가 판옥선만 하여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올라가 다닐 수 일게 하고 그나머지는 온통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게 그 꽁지밑에도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는 각각 여섯 개씩의 총구멍이 있는데 대개 그 모양이 거북 형상과 같기 때문에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다. 뒷날 전쟁할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가는데 적이 배 위로 올라오려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려서 죽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들다가는 좌우 앞뒤에서 한꺼번에 총알이 터지므로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배는 그속을 마음 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 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전투에 이것으로써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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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이 아무리 많아도...거북선은 마음대로..적선속을 드나들며...적선을 깨트릴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능력을, 가진...거북선이...명량해전에서는...이순신장군에게...필수적으로 전술..전략상...절대 필요하였을것이기에...12척의 판옥선을...거북선으로 개조 하도록 명령했다는것은...너무도 당연하다... 결론적으로...명량해전 초기에...이순신장군의 판옥선은...거북선으로 개조한것으로 확신할수있다...그리고..이, 거북선은...사호공,오익창이 참여하여 만든것으로 보여진다...사호집 의 기록이...이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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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거북선 전법 )...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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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의 (거북선 전법) 이 승리하게 만들다. ................................................................................................
명량해전...에서...충무공이순신...장군은...전쟁전에 거북선 전법을 생각하였다.
이순신 장군 조카...이분...이,기록한...충무공이순신장군 행록...에 명량해전 직전...12척의 판옥선을 인수한후에...판옥선을 전부을 거북선으로 개조 하라고 명령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명량해전에 참전한 사호공 오익창 의 사호집에 명량해전 직전에 오익창이 거북선을 만들었고...새로운 거북선을 창조하였다...라고...6인의 기록이있다.
위의 2가지 요소을 종합하여 볼때에 이순신장군은 12척의 판옥선을 인수한 직후에...명량해전을 준비하면서 적은숫자의 판옥선으로...수많은 왜적함대을, 상대하여 전쟁을 할때에... 거북선전법...거북선을 돌격선으로...적함대 속으로 돌진하여...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여...포사격의 명중률을 높이고...적을 당황하게하여... 적의 공격력을 무력화 시키려고...거북선 전법을 구상하였다고 보여진다... 이,거북선 전법 에는...거북선의 장점.을 알고...충분히 안전성을 고려한듯하다. 거북선의 장점을 이용하여...전격적인 공격...기습작전을 펼쳐서... 최대한 가까운거리에서...명중률,높은...포사격을 가하여...적함선을 격파할때에 왜적은 당황하게되고...적군은 거북선에 접근하여...공격할려해도...접근할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보니...어쩔수없이 일방적으로...패할수밖에 없었다. 이런,상황...이였기에...조선수군의 전사자수...피해가 적게되었다...라고 해석할수있다.. 조선수군의 전사자수가 적은 이유가...거북선의 전격작전...기습작전에서 얻어진 결과로 해석하는것이...합리적인 설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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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 조카...이분...의 기록에서...거북선 의 장점을...
이분..이..거북선..역활에 대하여..말하기을...
또 전선을 창작하니 크기가 판옥선만 하여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올라가 다닐 수 일게 하고 그나머지는 온통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게 그 꽁지밑에도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는 각각 여섯 개씩의 총구멍이 있는데 대개 그 모양이 거북 형상과 같기 때문에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다. 뒷날 전쟁할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가는데 적이 배 위로 올라오려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려서 죽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들다가는 좌우 앞뒤에서 한꺼번에 총알이 터지므로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배는 그속을 마음 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 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전투에 이것으로써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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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이 아무리 많아도...거북선은 마음대로..적선속을 드나들며...적선을 깨트릴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능력을, 가진...거북선이...명량해전에서는...이순신장군에게...필수적으로 전술..전략상...절대 필요하였을것이기에...12척의 판옥선을...거북선으로 개조 하도록 명령했다는것은...너무도 당연하다... 결론적으로...명량해전 초기에...이순신장군은 판옥선을...거북선으로 개조한것으로 확신할수있다...그리고..이, 거북선은...사호공,오익창이 참여하여 만든것으로 보여진다...사호집 의 기록이...이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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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 임하여...전술을 계획 할때에...상황을 고려할때에... 거북선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는것이...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을것으로 보여진다. 거북선전법 이란? 적선들이 아무리 많은 숫자가 모여들어도, 거북선에 올라탈수도없고, 거북선에서 포을쏘면...적선들이 모조리...깨트려졌다. 이와같은, 거북선의 장점 과 전술을...생각한 이순신 장군이... 최선의 전술 선택으로...거북선 전법을 생각하여... 조카..이분...이기록한...12척의 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개조하도록 명령하였든것으로 보인다. 명량해전의 오익창 사호집 기록에 보면...거북선을 만들때에...이순신장군이 자주찾아왔고...오익창이 거북선을 만들때에...많은 상의와 도움이 있었다... 라고...1600년대 유명인들... 6인의 기록에...문집에 기록되어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의 명량해전 에서...거북선 전법...의 계획 과 전술이 명량해전을 승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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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에서..개전초기에..대장선(이순신장군)이..적선의 진격을.. 어떻게 막았을까? 이문제의 해답은?..사호집에 나오는 오익창이 창조하여 만든..거북선..에있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명에의하여..오익창이 새로운 거북선을 만들게된다. 거북선, 대장선이 전격작전으로 적선속으로 들어가서 함포을 쏘면서 갑자기 공격하니 적선의 조총도 통하지않고, 거북선으로 오르려해도 쉽지않고, 함포와 각종화기을 난사하면서..조총으로 무장한 세끼부대 적선이 갑자기 파선되기시작하니, 적선의 병졸들이 순간적으로 당황하여..개전초기에 공격력을 무력화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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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기록에...명량해전은 승리을 장담할수없었던...천행,이라 말하였는데...모든병사들이 죽기을 각오하고, 전쟁에 임하였는데... 사호공, 오익창 의글...사호집에서...고증이 입증된...정조시대,재상..체재공,글.번암집. 홍문관대제학, 서명응...등 6명의 유명인들이 명량해전에 대하여..글을 남겼다. 이글들을 상세하게 분석하여보면, 승리을 장담할수없는 빈약한 전쟁준비상황에서.. 죽기을각오한 처절한 상황에서.. 각자, 무기,을가진 피난선, 일천척의 지원.. 조선수군, 이순신 함대와 함께, 죽기을 각오하고.. 응원하고, 지원하는 피난민들의 힘이 명량해전의 천행의 승리에...어떻게, 얼마나, 큰힘이되었는지?..상상할수있다. 더욱이, 명량해전에는, 간이식,거북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장군의 명으로, 긴급하게 만든 간이 거북선을. 사호공 오익창이 만들었다고 여러문헌에 기록되어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호공 오익창의 공과는, 명량해전 승리에, 큰공과을 남긴것이다. 사호집에...유명인들의 문집에 기록을남기게 된것도.. 이런공과을 인정했기 때문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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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 명에 의하여,긴급하게 만들어진 거북선이 있었다는증거자료 ...................................................................................................................................
명량해전 에서 거북선이 있었다는 근거로써... 사호집, 에 조선시대, 유명한 6인,의 글이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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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 조카...이분이 기록한...명량해전, 직전에
이순신장군이...판옥선을 거북선,처럼...개조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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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집에 보면...조선시대, 유명인 6인..의기록에 사호공,오익창이...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이 컸다...기록됨. 이기록을..이순신장군,조카..이분의 글..과 일치시켜보면... 명량해전직전..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 대비하여.. 작전상..긴급하게..거북선,역활을 할수있는배가 필요하여..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개조하도록..명하였을때.. 이 거북선. 개조작업을 한...사람이 사호공, 오익창..이였다. 라고 본다면..사호집의 글이 사실이고..고증에 일치한다고 해석할수있다. 결론적으로본다면.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명,에의하여...긴급하게 창조하여 만든 간이식, 거북선이 있었다는것이..증명이 되는것이다. 이,명량해전에 투입된..거북선은..사호공,오익창이 창조하여 만든것이다. ...........................................................................................
(참고로, 사호집...거북선 창조글 보기..6인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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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거북선의 등장?[편집] 철쇄설에 비해 빈도는 적지만 가끔 등장하는 떡밥으로,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결전병기 수준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명량 해전이라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 거북선이 등장했다는 것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철쇄설과 마찬가지로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거북선 자체가 판옥선을 보조하는 함선으로 중요성이 낮은데다,[72] 이전부터 건조한 거북선들은 모두 칠천량 해전 당시 손실하였고,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난중일기
거북선이 있었다고 해도 문제인데, 이순신 장군의 전술상 거북선은 원거리 지원 세력이 든든하게 뒷받치는 가정하에 맨 앞에서 날뛰는 돌격선 용도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20척도 안되는 전 병력에서 거북선 전술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어영담, 정운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기록 중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내용은 이순신의 행적을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선 회령포에서 이순신이 잔여 함대를 인수한 뒤, 장수들에게 전투선을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선 실제로 판옥선 중 1척 ~ 2척을 거북선으로 개조했다는 설과 해당 내용 자체가 후대에 가필[73]유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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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효종실록(효종21권)에...명량해전에 거북선이 있었다...기록됨 ......................................................................................................................................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9] ㅡ 효종, 《조선왕조실록》 효종 11년 / 1659년 윤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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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에서 거북선이 있었다는 증거기록 자료.......................................................................... 1)往來統制船與籌畵軍事統制倚以爲重其創造龜船 訪. 창조구선 (거북선을 창조하다.새롭게만들다) 2).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구선창조시 공의지휘 (거북선을 창조할때 공의 지휘가 많았다)
3).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畵,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4). 無用軒后之舊制, 始創龜舡, 給餽多年 시창구선 (거북선을만들다) 5).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6).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것이 많았다.
7).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서명응 기록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徐命膺撰 숭정대부 행호조판서 겸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손좌빈객 서명응(徐命膺) 짓다. 본 전(傳)은 서명응의 문집 보만재집(保晩齋集) 권9 잡저(雜著)에도 있는데 여기에는 오익창전(吳益昌傳)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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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統制使李舜臣 率舟師 禦倭奴於閑山島 當元均敗衂之餘 收合煨燼戰艦僅十有二 而嶺湖士大夫浮海逃亂者千餘艘 欲散而之諸島 公奮曰賊兵衆 統制之兵寡 其敗可立而待也 統制敗則我之藩籬撤矣 雖欲各保孤島 得乎 毋寧幷力合勢 爲統制聲援 有可以苟全之路 藉令俱死 亦有爲國效忠之名也 衆曰善 遂爲文布告諸舡 於是千艘揚帆 俱列統制舡後 聯成水寨 陣勢甚壯 公乘輕舠 往來統制船 與籌畵軍事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方秋風高 海氣凛凛 徹人肌骨 統制軍皆被褐呼寒 糧且盡 公以忠義激諸船人 各出襦衣米斛 滿載一船 躬卛至統制軍 軍皆感悅
좌승지 이화진 기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이화진(李華鎭)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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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卽發文通告諸船, 諸船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陣於戰艦之後, 以助其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畵,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홍중현 기록. 通訓大夫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洪重鉉撰. 통훈대부 전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홍중현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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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卽發文, 通告諸舡, 諸舡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陳於戰舡之後, 以助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畫,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정유주. 주세기 기록 ............................................................
况且丁酉之亂, 一國魚肉, 八路鳥竄, 李統制舜臣, 摠舟師於閑山島, 禦强寇於鏖戰. 而時丁元均僨績之餘, 只有戰艦十餘艘. 兵孤勢弱, 聲援且絶, 公於是乎激勵孤忠, 倡發大義, 通告于避亂諸舡士夫曰, 今日國家之存亡, 在此統制之勝敗. 各使資粮弓矢, 排列於戰舡之後, 以助其舟師之聲勢, 則賊無輕視於統制之兵, 而統制之兵, 亦不孤矣. 假令統制不利, 則諸島避亂, 獨免魚肉乎? 生而苟活, 反不如死
云爾. 則諸船士夫, 一時相應, 避亂舡千餘艘, 果爲聲援. 公時乘片舸 往來統制之營中, 征謨師畫, 日夜講論, 至若龜舡, 創制指揮. 旋蓬而絮衾漬水, 掛舡避丸, 東苽救渴, 櫓卒汔濟. 李統制至誠倚重, 歎服才德, 乃曰, 若夫成功, 則皆是吳上舍之力也. 書庸識哉, 以爲他日讓功之地, 而惜乎, 天不佑我統制徑殞, 事未上徹, 公亦自晦.
신선부 기록 不煩子房之前籌, 默運心算, 無用軒后之舊制, 始創龜舡, 給餽多年, 旣致華人之加敬.
장자방(張子房, 유방의 책사 장량)같이 셈대를 앞세우는 번거로움도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였고,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옛 제도232)도 필요없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여러 해 동안 군량을 배급함이 정확하여 명나라 군이 더욱 공경하였네.
신선부 기록에 의하면 (1667년,현종...1744년,영조) 때 기록하였다. 명량해전에서 사호공 오익창을 중국역사..유방의 책사..장량..에 비유하였다. 오익창은 장량과 같이...유방(이순신장군)을 지혜로 도았다. 그리고..유방(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의 위기에서..승리하게 하였다..라고 기록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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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의 진실...명량해전 승전 의 역사기록...전라도 문화제 지정 .......................................................................................................
명량해전 역사기록... 조선.정조 .예조판서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체재공(1720년_1799년).기록. ................................................................................................................................
명량해전
보국숭록대부 지중추부사 겸 예조 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손좌빈객 규장각 제학 채제공(蔡濟恭)이 짓다.
선조 정유년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통제사로 한산도에서 왜적을 막았는데 그때 원균(元均)이 막 패한 때여서 전함이 겨우 열두 척 뿐이었고 적선은 바다를 덮을 정도로 모였다. 그때에 남쪽의 사대부가 피난하여서 바다로 몰려든 사람의 배가 거의 천척을 헤아렸는데 통제사의 군대가 약한 것을 보고 모두 사방으로 흩어지고자 하였다. 공이 여러 사람들에게 울며 말하기를 “공들은 흩어지나 통제사에게는 원조가 없다. 통제사에게 원조가 없다면 적은 반드시 우리를 경시할 것이니 적이 승기를 타고 진격한다면 이것은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찌 나라 없이 백성이 홀로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또한 울면서 일제히 “그렇다.”고 소리쳤다. 이에 배를 연결하여 통제사 군선의 뒤에 이어 소리를 질러 전세를 도우니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었다. 통제사의 군대가 추위에 떠니 여러 배에 사람들을 타일러 옷을 벗어 주도록 했다. 통제사의 군대가 적의 탄환을 근심하여 군졸들이 낯빛을 잃으니 여러 배에 요청하여 솜이불 백여 개를 구해주고 물에 적셔서 걸어두게 하니 탄환이 뚫지 못하였다. 바야흐로 전쟁이 한창일 때 노를 젓는 군졸이 목이 타 배를 움직일 수 없었다. 통제사가 다급히 여기며 어떻게 할 줄 몰랐는데 공이 동아[東苽]를 실은 배를 끌어다가 목을 축이게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이 적을 피하여 도망가면서 집안의 기물은 버리고 돌아보지 않고서 마을에 버려진 동아를 주워 담았는데 배에 가득 채우고서야 그쳤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지혜에 감복하였다. 통제사가 그의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조정에 천거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통제사가 죽게 되고 공도 또한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명성을 듣고 제원도(濟源道) 찰방에 제수하였다. 이때에 명나라 군대가 호남 땅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접대하는 관리에게 곤욕을 치르게 했는데 면할 수 있는 관리가 없었다. 관찰사가 공을 임명하여 군량을 배분하도록 시켰는데 공이 산가지도 늘여놓지 않고 속셈으로 계산하였는데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으니 명나라 장수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종부시 직장,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공조와 형조의 정랑과 좌랑을 역임하였다.
鳴梁海戰
輔國崇祿大夫 知中樞府事 兼 禮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舘事 弘文舘提學 藝文舘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孫左賓客 奎章閣提學 蔡濟恭 撰.
宣祖丁酉, 忠武公李舜臣, 以統制使禦倭於閑山島, 時當元均新敗, 戰艦財十有二, 賊船蔽海以集. 時南中士大夫之避賊亂, 以海爲歸者, 舡可以千數, 見統制軍弱, 皆欲散而之四. 公泣謂衆曰, 公等散, 統制無援矣. 統制無援, 賊必輕視我, 乘勝而進, 是無國也. 安有無國, 而民可以獨全也哉? 衆亦泣, 齊聲曰然. 於是連舡, 綴統制軍後, 以助聲勢, 軍聲復振. 統制軍寒, 則諭 諸舡, 脫衣而授之. 統制軍罹賊丸, 士卒無人色, 則諭諸舡, 進絮衾百餘, 漬水以張, 俾丸不得徹. 方其酣戰也, 櫓卒渴, 無以制舡. 統制急不知爲計, 公取東苽舡以沃之. 先是, 公避寇而跳也, 棄家藏不顧, 拾村里所棄東苽, 盈舡而後止. 人怪之, 至是始服其智慮焉. 統制奇其才, 欲薦之朝, 會統制歿, 公亦匿不言. 然朝廷聞公名, 除濟源察訪. 當是時, 天兵軍湖南, 折辱接待官吏, 吏無有得免者. 觀察使檄公主放料, 公不布籌, 密有心計, 毫 未嘗有差, 天將皆嘖嘖焉. 歷宗簿寺直長, 義禁府都事, 司憲府監察, 工刑二曺正佐郞.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체재공 (1720년_1799년) 호 번암. 자 백규. 시호 문숙. 체재공문집 번암집 권 49. 묘갈명에 사호오공 묘갈명. 으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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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통훈대부 전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홍중현이 짓다.
정유왜란이 일어났을 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지휘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을 막고 있었는데 이때는 원균(元均)이 패한 뒤여서 전함이 겨우 12척 뿐이었다. 남도 사대부들의 피란선이 천여 척에 달했는데 수군이 약한 것을 보고 모두 여러 섬으로 흩어져 들어가 각자 삶을 도모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은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 수군의 승패에 달려있는데 지금 적들의 전함은 바다를 덮었고, 통제사가 거느린 배는 몹시 적으니 중과부적일 뿐 아니라 적이 반드시 얕잡아 보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어찌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피난선에는 각각 식량과 활과 화살이 있으니 일제히 전함의 뒤편에 배열하여 한편으로 성원하고 한편으로 식량을 대준다면 적들이 가벼이 볼 근심이 없을 것이고 우리는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각자 마음대로 여러 섬에 흩어져 들어간다면 통제사의 형세는 반드시 고립될 것입니다. 통제사가 불리하면 적은 반드시 승승장구하여 진격할 것이니 국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쟁에 진 뒤에 가령 구차히 살 수 있더라도 도리어 죽는 것만 못할 것인데, 또 하물며 여러 섬들이 유독 어육(魚肉)의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먼저 이해를 따져 말하고 또 의리로 깨우쳐 주었다.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이때 늦가을을 맞아서 바닷바람이 불고 해가 높은데 배 안의 장수와 병졸들이 아직도 여름옷을 입고 있었는데 군수품이 모자라 통제사가 몹시 걱정하면서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공은 솔선해서 저고리[동옷]를 벗고 또 쌀가마니를 내고서 여러 배의 사람들에게 글을 보내어 설득시켜 돕자고 하였더니 여러 배에 탄 사람들이 각각 옷과 식량을 내었다. 배 한 척에 가득 싣고서 직접 이끌고 나아가니 주장이 매우 기뻐하며 한 벌을 골라 입고서 장수와 병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2척의 군졸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양군이 격전을 벌일 때에 철환이 비처럼 쏟아져 막을 방법이 없었는데, 공이 여러 배에서 솜이불 백여 개를 거두어 들여 물에 적셔 걸어두니 철환이 뚫지 못했다. 그전에 공이 왜구를 피해 배에 오를 때 집안의 세간은 버리고 마을 사람들이 버린 동아[東瓜]를 많이 가져다가 별도의 배 한 척에 가득 실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수군이 힘을 다해 싸울 때에 노 젓는 병졸들이 갈증이 심해도 먹을 물을 구할 수 없었는데 공이 동아를 실은 배를 가져와 여러 군졸들에게 나누어 먹여 그 갈증을 풀게 하니 사람들이 이에 비로소 공이 지략을 겸비한 것에 탄복하였다. 통제사가 마음으로 믿고 진실로 탄복하여 군중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함께 의논하면서 매번 칭찬하기를, “만약 공을 이룬다면 모두 오상사(吳上舍)의 힘이오.”라고 하면서 이에 책을 만들어 기록하여 뒷날 공(功)을 양보할 증거로 삼으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통제사가 일찍 죽게 되어 끝내 위에 보고되지 못하였고 공도 또한 스스로 숨겼기 때문에 세상에서 다 알지 못하였다. 도적이 물러간 뒤에 조정에서 공이 성망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제원도(濟原道) 찰방에 제수하였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효종조에 우암 송시열이 경연에서 정유년(1597년)난리에 충무공이순신을 도와 많은공을 세웠으나 그의 행적이 사라져서 애석하다 하니 효종이 특명으로 중훈대부의 작위에 추증하였다.
천일제 홍중현(1660년ㅡ1726년) 조선 숙종 영조 때 홍문관교리와 경연시독관 풍산홍씨 자 대옥 호 천일제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鳴梁海戰
通訓大夫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洪重鉉撰.
丁酉倭亂, 李統制使舜臣, 摠舟師禦賊於閑山島, 而時當元均新敗之餘, 戰艦纔十二隻. 南中士夫避亂船, 多至千餘艘, 而見其舟師之孤弱, 皆欲散投於諸島, 以爲各自謀生之計. 公倡于衆曰, 國家存亡, 在此舟師之勝敗, 而今者賊舡蔽海, 統制所領之舟則甚尠. 不但衆寡之不敵, 賊必小覷而有輕我之心, 豈不危哉? 今我避亂諸舡, 各有資粮弓矢, 一齊排列於戰舡之後, 一以爲其聲援, 一以助資粮, 則賊無輕視之患, 我有相依之勢. 今若各自爲心散入於諸島, 則統制之勢, 必孤矣. 統制不利, 則賊必乘勝而進, 其如國事何哉? 事敗之後, 則假令偸活, 反不如死, 又况諸島獨免魚肉之禍哉? 先以利害諭之, 又以義理曉之. 仍卽發文, 通告諸舡, 諸舡中士夫, 皆以同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陳於戰舡之後, 以助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畫,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時當暮秋, 海風日高, 舡中將士, 猶着夏服, 而軍需且乏, 統制深以爲憂, 計無所出. 公先脫襦衣, 且出米斛, 仍通誘諸舡, 使之相助, 則諸舡之人, 各出衣粮. 滿載一舡, 親領而進, 主將大喜, 擇着一領, 分給將士. 十二舡軍卒, 得免飢寒, 皆公之力也. 兩軍鏖戰之際, 鐵丸如雨, 無以遮禦, 公收於諸舡, 得絮衾百餘, 漬水以掛, 丸不得透焉. 始公避寇登舡也, 捨其家莊, 而多取隣人所棄東瓜, 盈載別舡一隻, 而行人皆未曉其意. 及其舟師力戰之時, 櫓卒渴甚無水可救, 公引東瓜舡, 分餽諸卒, 以解其渴, 人於是始服其智慮之兼備也. 統制心信而誠服, 軍中大小事, 悉與之相議, 每稱曰, 若夫成功, 則皆吳上舍之力也. 仍作冊記之, 以爲他日讓功之地, 惜乎, 統制經殞, 終未能上徹, 而公亦自晦, 故世不得盡知之. 寇退之後, 朝廷以公有聲望, 特除濟原道察訪.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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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1787)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서명응 짓다
숭정대부 행호조판서 겸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손좌빈객 서명응(徐命膺) 짓다.
명량해전
숭정대부 행호조판서 겸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손좌빈객 서명응(徐命膺) 짓다.
정유년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한산도에서 왜놈들을 방어하는데, 원균(元均)이 패배한 직후라서 불에 타버린 전함들을 거두어 모으니 겨우 12척만이 있었다. 영호남(嶺湖南)의 사대부들 중에 바다를 항해하여 난리를 피하는 자 천여 척이 흩어져서 여러 섬으로 가려고 하자, 공이 분발하여 말했다. “적병이 많고 통제사의 병사는 적어 금방 패배하고 말 것이다. 통제사가 패하게 되면 우리의 울타리가 철거될 것이니, 비록 외딴 섬에서 저마다 보전하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힘을 모아 합세하여 통제사를 위해 성원(聲援)한다면, 온전히 살 길이 있을 것이니, 가령 모두 죽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명분은 있게 될 것이오.” 모두가 좋다고 응하였다. 마침내 글을 지어 여러 선박에 포고하자, 이에 천여 척의 배들이 출항하여 모두 통제사의 배 뒤에 늘어서서 물위의 성곽 모양을 연이어 이루니 진영의 형세가 매우 웅장했다. 공이 날렵한 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군사의 일들을 계획하니,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가을에 바람도 거세지고 바다의 기운이 쌀쌀하여 사람의 살갗과 뼈에 스미는데, 통제사의 군사들은 모두 갈옷을 입고 추위를 호소하고 양식도 다 떨어지자, 공이 충성과 의리로 여러 배에 탄 사람들을 격려하고, 각기 저고리와 쌀가마를 내어서 한 배에 가득히 싣고서 직접 거느리고 통제사의 군대에 이르니 군사들이 모두 감복하고 기뻐하였다.
당초에 공이 피난할 때 이웃마을 사람들이 비축해둔 동아[冬瓜]를 모두 버려 길에 쌓인 것을 공이 일일이 거두어 작은 배에 싣고 뒤를 따랐는데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통제사의 군대가 왜놈과 한창 싸울 때 매우 목이 말랐는데 공이 동아를 잘라서 나누어 주어 갈증을 구하게 하였다. 왜놈들이 조총(鳥銃)을 잘 쏘았는데 매번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면 철환(鐵丸)이 비 오듯이 어지럽게 떨어지고, 우리 군사들이 맞기만하면 바로 쓰러져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방어할 길이 없었는데, 공이 여러 선박을 수습하여 솜이불 백여 개를 얻어 물에 적셔서 펼치니 철환이 침투하지 못하였다. 이에 통제사가 공의 지혜로운 사려를 더욱 추대하여 작은 책자를 만들어 공의 실제 공적을 기록하였고, 다른 날에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에게 공로를 양보하고자 했으나 얼마 안가서 순절(殉節)하여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왜구가 물러가자 조정은 공을 제원도(濟源道)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명나라의 지원병이 호남에 여전히 머물렀는데 지원물품이 한결같이 고르지 못하여 수령이 보낸 파견관리[差員]가 매질과 꾸지람을 받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이 바로 공을 파견관리로 임명하니 매번 녹봉을 지급하게 될 때가 되면 공이 셈을 한 적은 없었으나, 소매 안에서 손꼽아 셈한 것이 승약(升龠)1)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명나라 장수가 신기하게 여겨 크게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여러 해 동안 책임지고 물품을 내주었는데 한 번도 힐책을 받지 않았다. 이윽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공조(工曹)․형조(刑曹)좌랑(佐郞)․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鳴梁海戰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徐命膺撰
丁酉統制使李舜臣 率舟師 禦倭奴於閑山島 當元均敗衂之餘 收合煨燼戰艦僅十有二 而嶺湖士大夫浮海逃亂者千餘艘 欲散而之諸島 公奮曰賊兵衆 統制之兵寡 其敗可立而待也 統制敗則我之藩籬撤矣 雖欲各保孤島 得乎 毋寧幷力合勢 爲統制聲援 有可以苟全之路 藉令俱死 亦有爲國效忠之名也 衆曰善 遂爲文布告諸舡 於是千艘揚帆 俱列統制舡後 聯成水寨 陣勢甚壯 公乘輕舠 往來統制船 與籌畵軍事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方秋風高 海氣凛凛 徹人肌骨 統制軍皆被褐呼寒 糧且盡 公以忠義激諸船人 各出襦衣米斛 滿載一船 躬卛至統制軍 軍皆感悅 初 公之避兵也 隣里人盡棄所旨蓄之冬瓜 委諸道 公則一一收載小舟隨於後 人莫測其意 至是統制軍 與倭奴戰酣渴甚 公割冬瓜分與之 使救其渴 倭奴善鳥銃 每兩陣相對 鐵丸亂落如雨 我軍遇卽斃倒 人皆惴惴 無以禦 公收諸船 得絮衾百餘 漬水張之 丸不能透 統制益推公智慮 爲小冊紀公實績 待他日事竣 欲讓功於公 未幾殉節未果上 寇退 朝廷以公爲濟源道察訪 當是時 大明援兵尙駐湖南 餽餉一不均 守令之爲差員者 被箠罵十而八九 觀察使韓孝純 卽以公爲差員 每當支放 公未嘗布筭 但從袖中屈指默數 升龠無所遺 天將以爲神 大加敬重 經年責應 一不被其詰 尋歷義禁府都事 司憲府監察 工刑曺佐郞正郞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서명응 (1716년-1787년) 정조 11년. 조선 정조. 이조판서 .호 보만제. 서명응 문집. 보만재집 권 9 잡저에 오익창 전으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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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재공의 글에서...
方其酣戰也, 櫓卒渴, 無以制舡. 統制急不知爲計, 公取東苽舡以沃之. 先是, 公避寇而跳也, 棄家藏不顧, 拾村里所棄東苽, 盈舡而後止. 人怪之, 至是始服其智慮焉. 統制奇其才, 欲薦之朝, 會統制歿, 公亦匿不言. 然朝廷聞公名, 除濟源察訪. 當是時, 天兵軍湖南, 折辱接待官吏, 吏無有得免者. 觀察使檄公主放料, 公不布籌, 密有心計, 毫 未嘗有差, 天將皆嘖嘖焉. 歷宗簿寺直長, 義禁府都事, 司憲府監察, 工刑二曺正佐郞.
바야흐로 전쟁이 한창일 때 노를 젓는 군졸이 목이 타 배를 움직일 수 없었다. 통제사가 다급히 여기며 어떻게 할 줄 몰랐는데 공이 동아[東苽]를 실은 배를 끌어다가 목을 축이게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이 적을 피하여 도망가면서 집안의 기물은 버리고 돌아보지 않고서 마을에 버려진 동아를 주워 담았는데 배에 가득 채우고서야 그쳤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지혜에 감복하였다. 통제사가 그의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조정에 천거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통제사가 죽게 되고 공도 또한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명성을 듣고 제원도(濟源道) 찰방에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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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창(사호공)의 참전기록 ( 사호공 공적내용 ) ...................................................................................................... 전북 고창출신의 오익창은 포의지사(布衣之士)로서 이순신의 부하로 들어가 파도와 화살, 총탄을 무릅쓰고 전라도 지역의 사민들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서 전쟁 지원활동을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전라 연해지역의 백성들도 떠나지 않고 응원과 후원으로 수군 지원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익창이며, 명량해전 중에 의병으로서 헌신적인 지원활동으로 기여한 것이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 수군부대를 오가며 동아(冬瓜[과], 동고(冬苽[고]라고도 한다. 동아 속 썩는 것은 밭 임자도 모른다>)로 수군의 갈증을 해소시키고 솜이불을 걷어다가 방탄막이로 이용하게 하였다. 공은 영호남(嶺湖南)의 사대부들 중에 난을 피하여 바다를 향하는 자들의 배 천여척이 흩어져서 여러 섬으로 가려고 하자 “적병이 많고 통제사의 병사는 적어 금방 패배하고 말 것이다. 통제사가 패하게 되면 우리의 울타리가 철거될 것이니, 비록 외딴 섬에서 저마다 보존하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힘을 모아 합세하여 통제사를 위해 성원(聲援)한다면, 온전히 살 길이 있을 것이니, 가령 죽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명분은 있게 될 것이오.”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천여척의 배들이 공의 말에 따라 모두 출항하여 통제사의 배 뒤에서 물 위의 성곽 모양을 연이어 이루니 진영의 형세가 매우 웅장하였다. 이 얼마나 가슴 에이며 충정어린 호소인가! 이를 따라 준 백성들 또한 중상과 모략만 일삼는 조신들보다 진정 거룩한 충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렇듯 선생은 칠천량 패배 이후 수군의 재기불능 상태에서 창의적(倡[여광대 창]義的)인 활동으로 군중을 규합하고 자발적인 의병지원을 유도하여 북상하려는 왜군을 격퇴하기까지 배후에서 헌신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이민서(李敏敍)가 쓴 ‘명량대첩비’를 보면, “통제사 이공(李公)이 진도의 벽파정 아래에 주둔하고 명량의 입구에서 일본 적을 대파하였다. 적들이 크게 패하여 전라도를 엿보거나 경기도, 충청도를 침범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철수했으니, 세인들이 ‘중흥한 전공’을 말하는 데는 공(이순신)을 으뜸으로 여기고 명량의 전투를 가장 특이한 승리라고 했다.”고 하는 데는 선생의 공 또한 지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요컨대 한산도가 왜군이 호남을 향해 가는 경로로서 한산대첩이 해상 제해권을 차지하게 한 해전이었다고 한다면, 명량대첩은 한산도가 함락된 이후 기세를 역전히여 왜군의 북상진입을 차단하고 수군재건에 성공한 해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호집을 통해본 오익창의 업적은 명량해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첫째, 피난선 천여 척에 승선한 사대부들을 종용하여 응원하게 한 것. 둘째, 피난선에 통문을 돌려 식량과 의복 등을 모아 지원하게 한 것. 셋째, 동아(冬瓜)로 전투하는 수군들의 갈증을 해소 시킨 것. 넷째, 물에 적신 이불솜을 방탄막이로 사용한 것. 다섯째, 거북선 제조에 참여한 것. 등의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놓았다.
명량대첩의 의의는 이순신을 응원하는 전라지역 민간과 사대부들이 오익창의 주도하에 위장전술과 지원활동 등을 전개하고, 이에 힘을 얻은 이순신이 긴급 상황 대처에 효율적 성과를 거둠으로써 수군 재건에 성공한 해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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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조카, 이분, 이 기록한...충무공 이순신 장군, 행록...기록. ................................................................................................................
이순신 장군 의 조카...이분...이 기록한 충무공...행록에는 명량해전에 대한...많은,참고자료..가..보인다.
첫째...명량해전 직전에..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 대비하여.. 적은숫자의 함선으로...많은 적선과 싸우기위해서는...거북선,이 필요하여 긴급하게..12척의 전함을..거북선으로 개조하도록...명령을 하였다는것이다.
둘째...명량해전에서 수백척의 피난선이...병사,들의 식량과 옷등..많은 군수품을 지원하였다는것이다.
사호집..내용과는..상당히 차이가 있으나... 피난선의 존재와 거북선의 존재는 긍정적으로..인정하고있음..을 알수있다.
셋째...이분..이..거북선..역활에 대하여..말하기을...
또 전선을 창작하니 크기가 판옥선만 하여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올라가 다닐 수 일게 하고 그나머지는 온통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게 그 꽁지밑에도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는 각각 여섯 개씩의 총구멍이 있는데 대개 그 모양이 거북 형상과 같기 때문에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다. 뒷날 전쟁할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가는데 적이 배 위로 올라오려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려서 죽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들다가는 좌우 앞뒤에서 한꺼번에 총알이 터지므로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배는 그속을 마음 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 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전투에 이것으로써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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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이 아무리 많아도...거북선은 마음대로..적선속을 드나들며...적선을 깨트릴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능력을, 가진...거북선이...명량해전에서는...이순신장군에게...필수적으로 전술..전략상...절대 필요하였을것이기에...12척의 판옥선을...거북선으로 개조 하도록 명령했다는것은...너무도 당연하다... 결론적으로...명량해전 초기에...이순신장군의 판옥선은...거북선으로 개조한것으로 확신할수있다...그리고..이, 거북선은...사호공,오익창이 참여하여 만든것으로 보여진다...사호집 의 기록이...이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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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조카 이분이 지은 충무공행장(행록) - 행록 : 오늘날의 위인전 이순신,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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