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보이(Green boy).
흔히 복싱에서 '풋내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풋내기'의 사전적인 의미는 '경험이 없어서 일에 서투른 사람' 혹은 '새로운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복싱에서 말하는 이 의미는 조금은 다르다. 아직 덜 성장한 신인이라는 의미는 같지만 그 이면에는 '경험이 쌓이면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무궁하여 앞으로가 더욱 기대가 되는 선수'라는 의미이다.
이번 칼럼에서는-내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아직은 풋내기이지만 앞으로 더욱 성장하면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고 궁금한 팀이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2019시즌 중 최강부에 처음으로 입성한 '두산인프라코어'이다.
두산인프라코어의 전신(?)은 2018시즌까지 일반부에서 활동했었던 '필터테크'이다. 감독에 김석채, 코치에 박세진 그리고 정우진, 홍성우, 김은중, 양석영, 이찬우가 선수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팀이었다. 하지만 여느 팀이나 선수들의 신변 혹은 직장등의 변동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팀이 와해될 수 밖에 없다. 필터테크 역시 이에 예외는 아니었다. 내부 사정으로 인해 정우진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팀을 떠났고, 김석채 감독마저 조이킥스포츠의 감독으로 팀을 떠나며 새롭게 개편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우진의 세경대 직속 후배 이정우를 좌수비로 영입하였고, 인천무심족구단의 일반부가 해체되어 새로운 팀을 찾고 있었던 권경준에게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하여 우수비로 영입하였다. 마지막으로 지재두 고문의 추천으로 정연택을 세터로 영입하며 라인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김석채 감독이 떠나 공석이 된 자리는 자연스럽게 박세진 코치가 맡게 되었다.
그렇게 이들은 2018시즌부터 일반부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전국대회 우승과 함께 최강부 승격이었다. 그러나 대회를 나갈 때마다 이들은 항상 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최강부를 제외한 최고수들이 모이는 일반부 역시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들의 성적은 항상 공동3위였다. 그러다보니 SNS상에서 돌아다닌 이들의 별명은 '3등장인'이었다. 사실 나 처럼 족구 하수들에게는 이 또한 대단한 성적이었겠지만 이들이 이에 만족할리 없었다. 그리고 절치부심 끝에 2019년 영월동강배에서 끝내 우승을 차지하며 전국 최강의 타이틀을 얻었고, 최강부 승격이라는 성과도 함께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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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부에 승격된 이후 이들은 2번의 대회에 참가했는데 모두 8강의 성적을 거두었다. 최강부에 처음으로 입성한 팀으로서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준수한 성적이라고 말 할 만큼 확실한 임팩트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스탯으로 나오는 성적보다 관심이 갔던 것이 이들의 경기내용과 매너였다. 일반부에서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했으니 그 실력이야 어찌 의심을 하겠냐만 아무래도 최강부에서는 신인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최강부의 정상급 팀들과의 대결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지난 시즌 벌어졌던 원주시장배 8강전, 바로 논산공고와의 대결이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최강부에 입성해 강력한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논산공고 였기에 두산인프라코어에게는 조금은 버거운 상대일 수도 있었고, 누가봐도 논산공고의 우세가 점쳐지는 경기였다. 하지만 두산인프라코어는 첫 세트부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1세트를 따냈고, 2세트 역시 내주기는 했지만 경기는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았을 경기였다. 그리고 맞이한 마지막 세트, 세트 중반까지 8:5로 앞선채, 코트 체인지를 하며 대어를 낚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 되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침착하게 한 점 한 점 따라잡은 논산공고는 기어코 역전에 성공하였고 14:13 매치포인트를 만들며 경기를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점수를 따내며 경기를 끝내고, 선수들은 바닥에 드러누웠는데 두산인프라코어 선수단의 항의로 심판들이 합의심을 했다. 경기도중 세터 김광현의 허벅지에 공이 맞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합의심은 받아들여져 경기는 듀스가 되었다. 끝났다고 생각한 경기를 다시 듀스에서 치뤄야 했던 논산공고, 패배에서 기사회생한 두산인프라코어, 경기는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논산공고는 결국 정석희의 발코 B각 공격으로 승리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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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나고, 그 누구보다도 아쉬웠겠지만 두산인프라코어 선수들은 정석희의 마지막 공격을 인정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이 모습은 내 개인적으로 이들에 대한 칼럼을 쓰기로 마음 먹게 된 계기가 되었다. '패자로서 승자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은 진정한 스포츠맨쉽이다.'라고 말은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를 실행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치열한 명승부 끝에 당한 패배에서 이는 더욱 어렵다. 제 아무리 스포츠 경기에서 '만약'이라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이 날은 박세진 감독이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어서 선수들끼리 대회에 출전하는 바람에 작전타임을 쓸 수 없는 날이었다. 정말로 만약에 이 날 박세진 감독이 참석했었고, 8:5로 앞선 상황에서 추격을 허용했을 때, 논산공고의 치고 올라오는 흐름을 한 번만 끊어줬었더라면 어쩌면 승부는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은 아쉬움을 표출하기 보다 상대 선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박수를 보냈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박수를 친 그들만 알 수 있겠지만 진심은 통하는 법, 적어도 내가 영상에서 본 그들의 그 모습은 진심이었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승부의 결정적인 순간 범한 네트터치에 주저하지 않고 인정하며 손을 드는 모습, 네트에 맞고 살짝 넘어가 득점을 한 상황에서는 어린 상대 선수들에게도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는 모습, 동료 선수들의 실수를 탓하기 보다 배려해 주는 모습, 서로의 장점에 대해 아낌 없이 칭찬해 주는 모습은 이들이 얼마나 매너 좋은 팀인지, 유대감이 끈끈한 팀인지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이 날 경기를 박세진 감독은 이렇게 회상했다.
'출근하는 바람에 대회에 참석을 못해 조이킥스포츠의 김종환 대표님께서 유튜브를 통해 방송해 주시는 실시간 중계를 통해 경기를 보았습니다. 제가 없는 상황에서 서로 의지하며 파이팅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대견하고 뿌듯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처음으로 최강부 입상을 이뤄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 날 이후로 선수들에게 욕도 많이 먹고 시달리고 있습니다.(웃음)'
감독이 선수들에게 욕을 먹는다는 표현을 스스럼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감독과 선수간의 격의는 없지만 그 안에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지재두 고문은 대회가 끝나면 선수단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한 끼 식사라도 대접하며 선수단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팀 자랑 좀 해달라고 요청하자 세터 정연택은 이렇게 말했다.
'하자 있는 애들끼리 모여서 좋은 시너지가 나는 팀입니다. 파이팅이라도 죽어라 하자는 주의이고, 남 탓 하지 말고, 세팅이 안 되는 실수나 단점 보다는 사소한 장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경기 중에 득점을 하면 이건 리시브 점수다, 수비점수다 하면서 말이죠.'
자신들의 실력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묻어난다. 겸손이 지나치면 비굴하기 쉽지만 이들은 '그래도 팀 분위기는 우리가 정말 최고입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당당함 또한 잃지 않는다. 그래서 팀 자체가 더욱 빛나 보인다.
냉정하게 말해 이들의 실력이 최강부에서 정상급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산인프라코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회사에서 어떠한 스폰을 받고 있지 않고 선수들 모두 각자의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어 족구할 수 있는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만난 경주화랑의 이천희 선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 경주화랑은 일반부 팀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렇다 할 지원도 없고, 시간 나는 선수들만 나와서 운동합니다. 이번 대회도 선수들끼리 시간이 맞지 않아 단 한 번도 손발을 맞춰보지 못하고 출전했습니다. 이런 저희가 어떻게 매일 같이 호흡을 맞추는 회사팀이나 학교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이천희 선수의 이 말이 두산인프라코어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매 주 목요일 단 하루만 야간 족구를 할 뿐이고, 이마저도 다른 일정이 생기면 모이기도 어렵다. 게다가 수비수들은 모두 주말 근무가 많은 직업이라 주말에 모여 연습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이런 이들이 최강부에서 강호로 올라서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대회가 벌어지면 이들과 한 조에 편성된 다른 최강부 팀들은 이들을 '1승의 제물'로 판단해 대회 전략을 구성할 것이기에 이들과의 대결에서 사력을 다 할 것이다. 이 사실은 이들이 스스로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구 30만의 아이슬란드가 유럽선수권대회(축구) 8강에 진출하고, 인구 40만의 크로아티아가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하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들을 접한다.
아직은 풋내기이지만 훗날 변화된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그린보이즈(Green Boys) 두산인프라코어의 2020시즌, 이들의 동화와 같은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두산인프라코어 족구단 라인업(2020시즌)
고 문: 지재두
감 독: 박세진
공격수: 정우진 (1993년생, 세경대학교 족구단 출신)
세 터: 정연택 (1990년생, 서울 강서 신화족구단 출신)
우수비: 권경준 (1992년생, 인천무심족구단 출신)
좌수비: 이정우 (1997년생, 세경대학교 족구단 출신)
![](https://t1.daumcdn.net/cfile/blog/99E1EB335E4A119737)
언제까지 두산인프라코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선수들과 최대한 오랫동안 이 팀을 이끌어 가고 싶습니다.-박세진 감독
ps)현재 이들은 매주 목요일 부천 별산 구장에서 야족을 하고 있고, 세팍타크로 선수 출신의 유튜버 '족구하는 남자'로 부터 체력 훈련을 받으며 2020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유튜브 '족구하는 남자' 혹은 '천코치'를 검색해 보시길
*취재에 응해 주시고, 칼럼 쓰는 것을 허락해 주신 박세진 감독님 이하 두산인프라코어 선수단에게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