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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방수 남한산성 순교자 현양대회 기록영화 제작하다.
산성리 국민학교 정문과 오른쪽이 연무대이며. 아치 정면으로 약 100미터 지점이 1866년 병인박해때에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잘라 장대에 매 달았던 사형장이다. 113년이 지난 지금을 그 누군들 상상했으랴 ! 장하다 순교자들이여 !
사진 설명 : 주한 교황 대사님, 방인 최초 노 기남 대주교님, 김 남수 수원 교구장님과 원로 사제들과 모든 신부님들의 입장과 동시에, 안법 고등학교(교장 신원식 신부님) 밴드부의 우렁찬 성가 연주 소리에 산성리의 온갖 초목들도 몇 아름드리 고목들도 그 옛날을 회상하는 듯 숙연한 분위기속에 그 거룩한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며, 신자 17,500여명 모두 渾然一體가 되었다.
1979년 1월 13일 천호동 본당에서 회의를 시작하여 4월 22일 남한산성 현장회의까지 7회를 거쳐 1979년 5월 3일. 목요일 오전 11시 남한산성 연무대 잔듸밭에서 당시 경기도 신장본당 변 기영 신부님 주관으로 이루어진 순교자 현양 대회(대회장:김 덕제(金 德濟)신부님-1927년 3월 18일~1953년 6월 29일 서품)는, 변 기영 신부님의 개회사와 동시에 오후 1시 30분까지 주례와 강론은 루치아노 안젤로니 교황대사님. 수원 교구장 김 남수 주교님. 유 홍렬 박사님의 한국 천주교회, 기원과 천진암 소개. 오 기선 신부님의 남한산성 성지 소개와 순교자 후손 소개로 이루어진 순교자 현양대회는 170명의 잠실과 천호동 본당의 어머니 성가대원들의 성가를 비롯하여 대형뻐스 176대와 소형 승용차 415대 및 시외뻐스 수시운행이 이루진 가운데 신자 17,500여명이 모여 성대히 마치고, 대회 참가자들을 뻐스를 이용해서 천진암 성지순례를 시도하여, 열심한 신자들에게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이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온갖 모진 형벌과 굶주림을 이기고, 칼 아래 목을 느려 피를 뿌리고, 쓰러져 가면서 진리를 증언 하던 순교자들에게 영광을 드리자고 외치며 개회사를 시작하는 변 기영 신부님의 우렁찬 목소리로 현양 대회는 시작 되었다.
변 기영 신부님 바로 옆에 안경을 끼고 서있는 분이 故 최 창정신부님.
이는 당시 경기도 신장 본당 주임 사제로 사목 하시던 변 기영 신부님께서 주재용 신부님의 유작(遺作:1970년 1월 30일 발행)인 한국(韓國) 가톨릭 옹위(擁衛)라는 책에서 한국 천주교 초창기 사료(史料)들을 보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변 기영 신부님께서 필자에게 전했다.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에서 발행하고, 경남 거제도 출신이신 朱 在用(주 재용) 신부님(1894년 2월 2일~1975년 11월 1일 ~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1918년 2월 23일. 서품)께서 쓰신 한국 가톨릭 옹위(擁衛)의 제 3장에서 한국 가톨릭 초창기 사료에서 천진암. 주어사 발견을 다루었고, 한국 교회 선각자(先覺者) 이벽(李蘗)의 일생과 당대 학자들의 관계와 이벽(李蘗)의 신앙 실천 연보(年譜)를 밝힘과 동시에 1783년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함과 1784년 이 승훈 선생님 귀국과 이벽 성조님의 전교 활동 개시와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일어난 사건을 기록해서 남기므로 해서 천진암 성역화의 발판을 삼았다.
물론 주 재용 신부님께서도 참고로 샤를르 달레(Dsllet)신부님의 한국 천주교회사도 인용하셨다고 밝혔고. 그 외 많은 참고문헌을 참고로 제시했고, 변 기영신부님께서도 다각적으로 문헌을 참고로 연구한 결과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라는 자리를 잡았다.
끝 강복을 내리는 김 남수 수원 교구장님과 주한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노니 대주교님과 노 기남 대 주교님.
루치아노 안젤로니 (Luciano Angeloni) 대주교(1978년-1983년)님은 제4대 교황 대사님으로 한국에서 활동 하셨다.
대회에 참가한 황 사영 순교자의 후손 남매를 소개하시는 故 오 기선 신부님(1907.11.5.-1990.)
연무대를 꽉 메운 순교자들의 후손들과 각양각처에서 몰려온 교우들의 모습
당시 필자는 한국 외방선교회 본부에서 외방선교회 지도 신부님으로 계시던 골롬바노 소속이신 인 향성(가롤로)신부님께서 변 기영 신부님을 소개 받게되었고, 행사 전날 대회장님이신 김 덕재 신부님을 찾아가서 행사의 기록영화 촬영의 중대성을 설명하고, 지원을 승낙 받아 촬영을 할 수가 있었다.
참석하신 어머님 성가대
어릴때 기독교 주일학교에서 다니던 관계로 기독교를 다니다가 表裏(표리)가 일치되지 않은 개신교 신자들의 모습에서 배교를 하다가 뜻밖에도 천주교의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에 매료되어 1960년대에 천주교회에 입교하여 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천주교 신자답게 살아 보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不斷(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부족함이 많은 자신의 현실에서 脫皮(탈피)하면서 지난 일들을 회고해 보면 너무나 封建的이고 前近代的인 일부 천주교 신자라는 사람들 때문에 전교가 안되는 참으로 불행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안타까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님이신 김 수환 추기경님 은경축을 맞이하였을 때의 일화다. 이 때 기록 영화를 남기기 위하여, 스폰서(Sponsor)를 찾다가 군종후원회 회장으로 한참 잘 나가시던 상업은행 전무이사이신 공 덕종 회장님의 근무실로 찾아가서, 추기경님에게 선물로서 기록영화를 만들어 드리자고 제안하자. 이참에 무엇을 선물해야할까 고민하던 중인데 그 참 좋은 제안이라며, 이유 곡절을 묻지 않고, 50만원의 현찰을 주면서 일단 착수하라고, 부탁했다. 나머지 경비는 필자가 책임을 진다는 조건을 걸고, 계약서 없이 구두로 언약하고, 먼저 명동 주교관에 찾아가서 승낙을 받기 위해 비서 신부님에게 제안을 했더니, 한사코 그것이 현재 중요하지 않다며, 그런 돈이 있으면, 명동성당 보수공사가 우선이니, 보수공사에 보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사코 신부님께서 제작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끝내 거절당하여, 공 덕종회장님께 환불하고 말았다. 1980년 9월17일 노 기남 대주교님 명동성당에서 금경축행사.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주교님이신 노 기남 대주교님의 금경축 기록 영화는 아무에게 상의하지 않고, 묻지도 않고, 누구의 도움 없이 필자가 제작하여 보관 중인데 천진암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 그 때 변기영 신부님께서 역사에 길이 남길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며 극찬해 주셨다. 노 기남 대주교님의 금경축에는 문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참고 자료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1922년 5월 8일 출생~1951년 9월 15일 사제 수품~1966년 5월 31일 주교 수품~마산 교구장 착좌~1968년 4월 9일 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승품~ 196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 착좌~1969년 4월 28일 추기경 서임~1970년~1975년, 1981년~1987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975년 6월 10일 평양교구장 서리 서임~1998년 6월 29일 서울대교구장및 평양교구장 서리 퇴임~ 2009년2월16일,선종,壽84
노 기남 대주님께서는 1942년~1967년~1903년 10월 26일 서품~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주교 성성식.~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교구장님으로 광복 전후의 격동기에 슬기롭게 교회를 이끌었으며, 노력을 더하여, 1962년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도록 함~1984년 6월 25일에 선종하여 용인 천주교 묘지에 안장됨.壽81세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문턱이 있어 넘지 못했다는 예수회 작은 형제회 소속 안 춘석(베드로) 수사님의 이야기다. 姜 禹一(베드로)주교님 서품식에 초대를 받아 축하 장소에 들어 갈려고, 하다가 쫓겨 났다고 한다. 물론 수사님의 행색이 허술하게 차려 입고 갔던 것이 큰 잘못이였다고, 보지만 외국인으로서 초대석에 참석하기 위하여 들어 갈려고 하니, 당연히 엄숙한 장소에 거지 차림새로 들어 갈려고 했으니, 입구에서 자초지종도 들어 주지도 않고 일언지하에 막았다고 한다. 축하 파티장소에 당연히 나타나야할 귀빈 한 사람 때문에 축하 케익 절단을 못하고, 기다리다가 주교님께서 직접 확인결과 행색이 너무 남루해 보여, 쫓아버렸다고 한다. 易地思之했으면 무탈했을텐데.....
천주교회의 기록영화를 처음으로 촬영하기 시작한 것은 故 최 창정 신부님(후암동 성당 출신)의 부탁으로 1975년 9월 28일 혜화동 신학교에서 시복시성 50주년을 맞아 서울 교구 전 사제들과 신자들이 모여서 顯揚大會를 개최할때였고. 1975년 8월 25일 대방동 성당에서 故 장 대익 신부님의 은경축을 맞이하였을 때 기록영화를 제작하여 신부님께 보여 드렸드니, 참으로 신기해 하셨다. 상상도 할수 없던 생각이라며 신부님께서 반겨 주셨다.
1977년 4월21일 이 천석 (李 天石)목사. 춘천 한얼산 기도회에서 성령 부흥회.1977년 8월18일 이 천석(李 天石)목사 한얼산 기도원 성령기도회 3,000여명 운집. 어느날 남대문 도쿄호텔 라운지에서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 천석 목사님이라며 전화가 왔다. 한얼산 기도원에서 수천명을 모아 성령기도회를 갖는데 기록영화를 제작해 달라는 부탁이였다. 그래서 수소문하다가 영화동호회 하 한수 감독에게 문의 하였더니 필자를 추천해서 전화를 했다며, 이 천석 목사님 역시 계약서 없이 구두 언약만으로, 선수금 50만원 현금을 지물하고는 믿고 떠났다. 믿음은 기적을 이룬다고 했다.
학교 운동장은 물론 연무대 주위에 인산인해를 이루어 빈틈이 없었다
제작한 기록영화 시사회를 하기 위하여 변 기영 신부님에게 연락 하였던바 수원교구 총 사제 피정자리에서 시사회를 부탁하여, 시사회를 마친 자리에서 생전 처음 만나뵌 변 기영 신부님께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며 김 남수 주교님께 처음 인사를 시켜 주셨다. 시사회를 마친 자리에서 교회의 기록영화 제작의 필요성과 당위성(當爲性)을 열변(熱辯)으로 설명하여, 박수갈채도 받았고, 일부 신부님들의 공감도 얻어냈고, 그 중에 변 기영 신부님의 공감을 얻어 1979년 5월 8일 천진암 성지 촬영을 시작하였다.
1979년 4월 20일 오후 3시, 포천군 내촌면 화현 3리에 있는 이벽 성조님의 묘소를 발굴하여 지석을 확인 하는 순간 수원교구장님이신 김 남수 주교님, 오기선 신부님, 유 홍렬박사님, 이 원호 교수님, 이벽 성조님의 후손 이 상만씨 등이 참석하셨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主役) 세자 요한 이벽 성조의 족보중에 가장 오래된(1979년 5월 31일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1813년 계유보가 경주이씨 종친회 족보 편찬위원회 사무총장(대전시 갈마동 380-155)씨 서고(書庫)에서 발견되었다. 이 계유보(癸酉譜)에 나오는 이 벽성조의 사항은 현행 족보와 몇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아래와 같다.
檗=字德祖号曠菴英조甲戌生 乙巳卒壽三十二所著崇禮義設配安東權氏父判書암配海州鄭氏 父●●墓花峴
벽=자덕조호광암영조갑술생 을사졸수삼십이소저술례의설배안동권씨부찬서암배해주정씨 부●●묘화현
亥坐三位合窆
해좌삼위합폄=벽은 자가 덕조이고, 호는 광암이며, 영조대왕때 갑술년(1754년)에 태어나서 을사년(1785년)에 세상을 마쳤으니, 32세(만31세)를 살았고, [숭례의]라는 책을 지었다는 설이있다,
첫 부인은 안동권씨로, 판서 벼슬에 있던, 권암의 딸이고, 다음 부인은 해주 정씨이며, (▲그 친정 아버지의 벼슬과 이름은 공란으로 있다) 묘는 화현리 해좌로 모셨다. 그런데 1979년 4월 20일 이벽 성조의 묘지석 확인할때에 바로 앞에 있는 동일한 좌향의 고총을 발굴하였을 때 여산송씨의 여인 묘로서, (이벽 성조 형의 4대손자 며느리 묘 즉 아주 후대의 묘) 그 묘에서 해좌(亥坐)지석이 나왔고, 그 묘 바로 위에 동일한 방향으로, 있는 것이 이벽 성조의 묘이니, 족보의 계유보 묘좌향 기록은 실제의 좌향과 일치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벽 성조의 묘속에서 좌향에 대한 지석은 없었다.
그리고 32세(만31세)로 되어 있는데 달레서나 다산서와 상이하나, 이 계유보의 기록이 가장 오랜 친척들의 기록이니 더 믿을 만 하다고 하겠다.
이벽 성조님의 묘소에서 通德郎慶州李檗之墓(통덕낭경주이벽지묘)라는 지석이 뚜렷이 니왔다.
1979년 6월 21일. 오전 8시 30분 부터 경기도 포천 화현리에서, 이 벽 성조님의 묘 이장이 시작되어 오후 7시에 혜화동 성당에 안치 23일 오후 1시까지 모셨다가 두분 부인은 신장으로 23일 토요일 오후에 이벽 성조의 유해는 명동 대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가 다음 날 주일이며 이 벽 성조님의 영세본명 축일을 맞아 정오에 명동 대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주교님이신 노 기남 대 주교님과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님이신 김 수환 추기경님과 공동 집전으로 이장미사를 성대히 거행하고, 즉시 출발하여, 신장 성당에 들려서 노 기남 대 주교님 집전으로 합동 사도예절을 거행하고, 그 길로 천진암 터에 이르러 보름 전부터 구축된 새 묘지에서 이장위원회 위원장이며, 한국 순교자 시성시복 추진위원회 위원장님이신 김 남수 주교님의 주례로 하관예절을 마치니 1979년 6월 24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이날은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비를 맞아 가면서, 열심한 신자들은 끝까지 마무리를 지었다.
참고 :권암(權𧟓)은 1729년(영조 5)∼1801년(순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 자는 공저(公著), 호는 섭서(葉西).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밀(謐)이다.1765년(영조4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979년 己未年(기미년) 6월 24일 세자요한 축일날, 이벽 성조님의 천묘식 날은 비가 왔다. 雨中에도 비를 맞아가며 역사를 남기는 일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으나, 기록 시간은 제한을 두어 난처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지금 같아서는 DVD로 시간 제한 없이 많은 자료를 남길수가 있지만 그 당시는 영화 촬영과 녹음에만 의존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영화 필림 현상도 일본 동양현상소나 미국의 kodak 현상소에 의존해야만 했다. 우중에도 노기남 대주교님께서도 참석해 주셨고, 변 기영 신부님 옆에 김 남수 주교님께서 화관예절을 하시고, 그 옆에 서서 우산을 바치고 촬영하는 筆者의 사진은 누가 촬영을 해 주었는지 밝히지 못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 현상에 차질 없이 도와주신 동양 현상소 직원들의 모습
다음 연재할 천진암 이야기 아래와 같이 이어집니다.
1980년 6월24일 천진암 200주년 원년(元年) 기념비 제막및 갈멜여자수도원 임시건물 축성식 거행.
1981년 6월24일 천진암 한국천주교 창립 기념 행사.
1981년 11월20일 21일.22일 권 철신. 권 일신 성조님의 천묘식.
1981년 11월28-29일 이 승훈 선생 천진암 천묘식.
1981년 12월28일-29일. 정 약종 선생님의 천묘식.
1982년 1월14일 한국 천주교회 창립기념 사업회 창립회의 신라 호텔에서 개최.
1982년 6월24일 한국 천주교회 창립 제정선포 1주기 기념.
1982년 12월25일 성탄절을 맞이하여 8월 25일 수안보 황 석두(루까) 성인 천묘식.
청주교구 수안보성당 주임 정 안빈(로벨도)신부님 주관.
1983년 6월24일 천진암 창립 3주년 기념.
1983년 9월25일 연풍 순교성지 순교자 현양대회.
남원양씨 병부공파 거제문중 30세손 양 방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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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월 2020-08-24 오전 3:56
양 선생님의 멋진 싸인과 좋은 자료 잘 감상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