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제: 하나님의 일하심
소 주 제: 패배. 승리. 필요를 채우심
날자 및 분류: 230917 낮 설교 창 조 의 말 씀
성 구: 삼상4:19-22
저 자: 정 헌정 목사 http://cafe.daum.net/changcho
[본문]삼상 4:19-22. 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전쟁의 기사 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이긴 전쟁이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신앙과 기대가 전부 충격속에 허물어져서 당혹스럽고 놀랍고 이스라엘백성 자신의 정체성과 그들의 신앙의 뿌리까지 흔들릴만한 사건이다, 블레셋과의 1차 전쟁에서 죽은 자가 4000명의 나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모셔 와서 하나님과 함께 이 전쟁을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법궤를 모셔와서 다시 사기충천해서 전쟁하려고 했고 블레셋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사기가 올라 간 것이 신의 임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고 긴장하면서 맞섰는데 의외로 이스라엘이 더 큰 패배를 당하여 3만 명이 죽는 그런 패배를 당한다,
이스라엘이 전쟁보다 더 컸던 충격은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사건이다,
당연히 이스라엘백성들로서 이 일잉 전쟁에서의 패배인 것보다 더 크게 그들의 신분 지위 그것을 가능케 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붕괴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현실성이 있으신가,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다 확인할 수 없는 주장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인생에 무슨 대책이 있는가, 라는 정신적인 붕괴가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한나의 기도에서도 보았듯이 사무엘의 등장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에게서 출생한다는 사실이 가지는 것보다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한나의 기도에 집착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의 혼란이 일어나면 그 책임은 다 전부 당사자들 기도해야 됐고 믿음이 좋아했던 자들의 실패로 쉽게 해석하는 바람에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현실들을 사실은 맞닥뜨리지 못하게 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과 거기에서의 이스라엘의 패배는 기독교역사상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신자들의 현실의 경험과 일치한다,
우리도 예수를 믿고 그 은혜를 감사하고 믿음을 가지고 헌신하고 열심을 내지만 뜻밖에도 우리의 기대와 우리가 자신있어 하는 식으로의 답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여러분 스스로가 사실은 삼상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패배와 거의 일치하는 현실을 살고 있고 경험했을 탠데 여러분들이 그런 일들은 다 자기에게 어떤 잘못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치부하고 그냥 넘어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제랄드 시처라는 사람이 쓴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인 시처는 목사로서 어느 집회에 온 가족과 함께 다녀오다가 밤중에 귀가하던 중에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술취한 운전자가 중앙선을 넘어와 이 목사님의 차를 받는 바람에 현장에서 어머니와 아내와 두 자녀가 죽는다, 그리고 자기와 두 자녀만 살아남는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좋은 일하고 오는 목사의 집안이 술마시고 운전하는 사람에 의해서 박살이 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뭐하고 계셨는가,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면 비교가 될 수 없는데 어떻게 저 사람에 의해서 우리의 가족을 이렇게 하루아침에 파괴할 수 있는가. 묻고. 묻고 고민하고. 고민하고 답은 없고
2년을 나가 떨어져 있다, 그때 가장 듣기 싫었던 위로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거야. 그는 나중에 그 일이 결코 손해 보지 않았다, 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이 왜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지는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참으로 진솔한 결론이다, 그러니 성경이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한 번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사무엘상에 나타난 법궤을 빼앗긴 치욕적인 패배와 하나님의 일하심에 그 불가해성은
사실 성경에서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이고 교훈인데 우리가 좀 성경이 말씀하려고 하는 것보다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앞서서 보상의 원리 잘잘못의 문제로 성경을 읽는 바람에 늘 놓치고 하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인데 모세는 아무준비가 없다, 모세는 이 호렙산(시내산)에서 단지 양을 치기 위하여 왔을 뿐이다, 광야시대에 연장선에서 목초지를 따라 양을 몰고 여기까지 도착한 것이지 거룩한 뜻이나 기대나 어떤 열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기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신다, 그의 나이 80살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살던 말년에 태어났고 그때 이스라엘의 인구가 늘고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납자아이를 낳으면 죽이라는 살벌한 명령이 시행되던 때에 태어나서 나은지 석 달 만에 나일 강에 버려지고 바로의 공주가 그를 물에거 건져내어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큰다, 그가 40세에 자신이 애굽인이 아니라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백성을 돌아보기 위해서 나갔다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아서 애굽인 한 사람을 죽인 사건으로 인해서 광야로 도피하게 된다,
거기서 아내를 얻고 가정을 꾸미고 꿈을 접고 40년이나 지나서 80세에 아무런 낙도 후회도 기억도 사라진 때에 하나님이 그를 맞이하신다,
떨기나무라는 것은 광야 있는 별 볼일 없는 작은 나무이다, 거기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서 불이 붙은 것이 아니라 나무는 그래로 있고 불이 붙어있는 것이다 연료가 없이 불이 붙어있는 것이다, 가까이 가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발의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내 뱃성이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너를 보내 내 백성을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 보내려고 한다, 모세가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고 그 약속과 명령에 당황한다,
이 큰 약속 이 큰 위임 과정이 비어있지 않는가, 40세에 그가 분발했을 때 그가 일어섰을 때는 침묵하시다가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말라 죽게 해놓고서는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는 이 불연속을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나시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답을 하시지만 너는 네 에너지를 태워 불을 지피려고 하고 있지 나는 그런 건 상관없어
이반 토마스가 쓴 출애곱기에 대한 중요한 책이 있는데 제목은 잊었지만 처음 모세가 부름을 받는 챕터에 제목이 ‘어느 떨기나무라도 좋다,’ 라는 제목이다,
왜냐하면 떨기나무가 좋아서 불이 붙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불은 아무데나 하나님이 지필 수 있다, 어느 떨기나무라도 좋다, 모세에게 이미 답을 하신 것이다,
네 정력. 네 기대. 비전. 믿음 이런 것으로 이 불이 생기는 것 아니다, 유지되는 것 아니다, 그건 내가 한다, 너는 가라 이렇게 돼 있다, 여기도 중요하게 모세의 생애에서는 이스라엘의 패배와 같이 모세는 자신의 기대와 소원에서 모든 것이 패배된 사람으로 등장을 한다, 하나도 그의 기대대로 된 것이 없고 뜻밖에 약속과 뜻밖에 사명으로 부름을 받는다, 그럼 어때 껏 40년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이기에 어떤 실력과 자격이 있기에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 그러니 가라. 네가 선 것이 거룩한 땅이 되는 것같이 네가 온 것이 성산. 시내산 나중에 이 산에 와서 나를 섬길 것이라 아무것도 없는 산 황야 그냥 아무것도 없는 산에 목초지를 찾아 따라 들어온 산이 성산이 될 것이다 네가 선 자리가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왜 내가 하나님이니까, 네가 볼 때 희망이 없고 실패했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네 생각이다, 거기에 내용을 담는 것은 나다, 내가 너를 보낸다, 걱정 말라 이렇게 되어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면 법궤를 빼앗기고 패배하고 제사장인 홈니와 비느하스가 죽고
시아버지 엘리가 그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서 죽고 비느하스의 아내가 애를 낳다가 죽고 그 아이를 이름을 이가봇이라 ‘영광이 떠났다,’ 영광이 없다, 소망이 없다. 라고 이름을 붙인 그 내용들이 결코 실패도 패배도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네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고 너희가 이 산에서 나를 섬기리라 어떤 성산을 만들어. 성산을 있어 찾아가는 그런 성산이 아니라 우리가 선 산 황야 황무지 벌거숭이 네가
선 곳 내가 그저 갈 곳이 없어 이리저리 걸어온 자리가 거룩한 땅이 되는 일을 하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가, 여기가 사실 물어봐야 하는 질문에 중요한 본질적 내용이어야 맞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 왜 그런 식으로 일하냐고 물었어야 맞는데 우리는 실패하면 자신의 잘못한 것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이제 우리가 사무엘상에서 5장6장으로 나가보면 법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은 당연히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이 블레셋에게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패배하시지 않았다,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인생에 절망은 없다, 절망한 것같이 보인다, 무엇에서 절망하는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다, 하나님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외면이나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보는 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패배요 실패요 절망이다,
기도란 한나가 그랬듯이 일어날 수 없는데서 하는 것 아닌가, 기도의 응답은 일어날
수 없는 답이 오는 것 아닌가. 때로는 능력 있는 사람을 만들어달라는 것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싶은 것을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자리에 오지 않고 내가 유능한 사람이 되고 내가 우월한 사람이 되고 내가 분명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그렇게는 안 하신다, 이스라엘의 패배다, 법궤를 빼앗길지언정 그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 내용이다, 스스로 있는 자 독립적이고 완전하신 분이다. 하나님 이기시는 것은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도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는 분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실 수 없는 분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존재와 사건과 경우가 다 그의 통치 아래 있는 분이다,
그러니 우리가 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나를 기억지 않으신다. 라고 말하는 건 우리식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사무엘상4장에서 이스라엘패배가 이스라엘에게 충격으로 왔던 것같이 우리 신자들의 현실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가 늘 하나님이 잊으셨고 내 신앙에 어떤 중대한 결함이 있는 모양인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체념하고 사는 포기하고 사는 우리 현실을 그대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이미 있었던 사건에서 역사적 속에서 우리가 주위 깊게 살피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것이지 오늘 우리의 문제를 성경이 이미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그때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무엇을 하시는가를 알아야 된다,
예수는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을 때 오신다, 우리가 그 필요를 알지 못했을 때 죽으신다, 우리이해 우리의 요청이 없을 때 와서 죽으신다, 이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속상해 하고 불만인 모든 내용들은 그 나마 하나님을 알고서 하는 원망이지만 그것마저 없었을 때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들 마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일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놀라운 억측이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계속 못 알아듣고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우기고 억울해 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신앙생활을 할 틈이 없다, 원망하고 분노하느라고 말이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현실 속에 제일 문제되는 것은 그날 하루를 신자로 살 기회를 이뤄내야 된다, 원망과 분노로 넘어가 버린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두 실망한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고백은 우리는 그가 메시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죽어버렸다,
법궤가 오면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들고 승리를 안겨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고 벱궤를 빼앗겼다, 하나님은 어디 가셨는가, 똑 같지 않는가,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그 패배가 하나님의 패배도 이스라엘의 끝도 아니다, 그것이 중요한 교훈이 되고 중요한 내용으로 일을 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나라로 만들고 그의 백성으로 만드는 일에 이 사건이 너무나 필요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숙도나 내용상의 어떤 왜곡을 고쳐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수치를 감수하시는 일을 하셔야만 했다, 그것은 나중에 바벨론 포로로 더 극적으로 더 크게 드러난다,
성경이 수없이 우리가 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패배가 드러난다, 우리를 위하여 패배를 감수하시는 죽음을 감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이 그토록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알아듣지 못해서 우리 인생에서의 어떤 불만들을 전부 하나님의 패배 어떤 신앙의 실패라고만 생각하지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제자도는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것을 이런 말로 대치했다, 윤리적 도덕적 종교적 단어들로 바꾸었다, 헌신 충성이라는 단어가 되는 바람에 의지의 싸움이 되었지 하나님이 이런 식 우리가 볼 때는 말이 안 되는 패배 수치 절망 죽음이라는 방법을 즐겨 쓰신다. 는데 대해서는 우린 이해가
없다, 그러니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 여러분 주일날의 모습이 바로 신앙생활의 현주소이다,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셔야 된다,
예수님께 마구간에 태어나시듯 처녀의 몸에서 나시듯이 그게 무슨 굉장한 일이었겠는가. 욕먹는 일이었지. 예수 어머니는 평생 그 욕먹었겠지. 저건 지 자식 아니야. 그럼에도 목수의 아들로 그렇게 죽어가는 길로. 그가 무슨 영광을 받았겠는가, 이사야서 53장을 다시 기억해보면
사 53:1-2.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내용을 담으시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형태에 급급해서 안심 자랑 힘 우월 자존심 이런 것으로 우리는 넘어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담으시는 내용은 다 쏟아버린다,
야! 자폭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지금의 네 정황 네 현실에 하나님이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다, 신자로 살아내라 괜찮다, 그것이 성령 충만 이다,
겉으로는 볼품이 없어도 내용은 담울 수 있다, 그게 술 취하지 말라 성령 충만을 받으라. 이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철저한 패배였다, 법궤는 빼앗기는 패배지만 얘가 태어난다, 없었던 생명이 태어난다, 3만 명이 죽어 패배한 전쟁과 법궤까지 빼앗긴 전쟁에 휘말려 있을 때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아내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이가봇으로 태어나는 어린아이를 등장시킨다, 모세의 출생 사무엘의 출생 예수님의 출생 출생은 하나님의 새로운 일. 생명이 사망을 이기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위하여 소개되고 있다,
모든 패배와 모든 충격 속에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을.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시다고 걱정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이 살아있는 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약속과 승리와 영광을 담으실 수 있는 그렇게 여러분이 하루를 살아내셔야 된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