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한 분위기를 살리는 분위기 메이커가 있다.
침묵 자체를 못 견디고, 순간적인 머리 회전이 빨라 반전을 꾀한다.
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추임새를 끄집어낸다.
유머 있고 쉼 없이 말한다.
교회 안에 이런 존재들이 얼마나 귀한가?
깃털처럼 가볍고 싱거운 이야기도 이들로 인해 재창조된다.
생각 중인 갈대,
큰 바위형 인간은 중압감에 침묵만 깔린다.
타인의 기쁨과 웃음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인간이 있다.
그들이 광대다.
타인의 기쁨에서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데
무표정에 상실한다.
때문에 반응에 예민하다.
예로부터 광대는 주로 천민이 담당했다.
평민이 크게 웃을 때 귀족과 왕족은 근엄하게 살짝 미소만 보일 뿐, 집에 가서 박장대소한다.
체통에 목숨 거는 인간일수록,
기쁨만 받을 뿐,
주지 못하니
광대의 슬픔과 기쁨을 알기 어렵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생각난다.
왕과 닮은 광대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이야기인데,
백성을 위해 스스로 광대처럼 기쁨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지도자가 그립다.
오늘 큐티 본문에 다윗이 광대처럼 춤을 춘다.
왕이 된 남자 다윗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 엉덩이를 들치어내고 광대처럼 춤을 춘다.
“그대가 웃을 수만 있다면,
그대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한 것도 하리라”
진정한 광대 다윗의 춤을 보고 백성이 즐거워한다.
국가적으로 고환율, 고물가, 전쟁과 기후 위기 등
서민의 삶은 침몰하기 직전이다.
이러한 시기에 백성에게 마땅히 기쁨을 주어야 지도자가 근심이 되고 있다.
어찌 국가만 그럴까?
성도들도, 가정도 어렵기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 리더가 먼저 망가져야한다.
몸치의 춤이 얼마나 큰 예술적 웃음을 주는지 보여주어야한다.
그대가 웃을 수 있다면,
그대가 행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망가지겠다는 신념으로
아내 앞에서 춤을 추자!
광해, 왕이 된 다윗처럼!
그렇게 주님과 이웃의 기쁨이 되어보자.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