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서리
심삼일
내가 사는 작은 아파트단지에는 넓은 평수가 아니어서 그런지, 단출한 젊은 부부 가족이나 나처럼 은퇴한 노부부만 사는 집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대로변에서 벗어난 아파트단지들 사이 도로의 가로수는 거의 은행나무인데, 암수를 고려해서 심었는지, 가을이면 잘 익은 노란 열매가 잔뜩 떨어져 은행잎과 함께 길바닥에 나뒹군다. 도로에서 아파트단지로 들어서면 가로수는 느티나무와 벚나무가 대종을 이루고 봄에는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서 꽃 터널을 만들어, 달리 봄나들이를 하지 않아도 새봄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가 있어 참 좋다.
걷는 길 화단에는 새봄의 전령사인 하얀 목련과 성탄절 트리로 사용하면 예쁠 것 같은 잘 다듬어진 주목이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서서 앞줄의 키 작은 회양목, 철쭉, 영산홍과 함께 새싹을 움 틔워 나날이 변하는 생명의 부활을 지켜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런데 우리 동 출입문 주변과 몇 개 동 화단에는 대추나무 여러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심은 시기는 같을 것 같은데 키가 작은 나무는 종류가 다른지, 대추 열매도 보통의 절반 크기이고 빨갛게 익는 시기도 훨씬 빠르다. 큰 대추나무는 우리 집 3층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손에 닿을 높이로 자라서 가을에는 엄지 손마디보다 큰 토실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눈요기를 제공해준다.
“여보, 대추 따러 안 갈래요? 사람들이 따 가길래 물으니까, 아무나 따도 된대요.”
이곳으로 이사 온 작년 첫 가을에 외출했던 아내가 들어와 숨을 헐떡이며 졸랐다. 아파트 공유물이니까 낙과는 모르겠지만 달린 것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몰라서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먼저 따버린 모양이다. 갑작스레 길쭉한 막대기를 찾느라 한참 후에야 긴 우산을 들고 가보니까, 대추나무마다 낮은 부분은 거의 다 따가고 높은 꼭대기에만 몇 알 안 되는 열매가 남아있다.
“아직 붉은색이 절반도 물들지 않았던데 풋것을 급하게도 따갔나 보네? 허허.”
하는 수 없이 단지 내를 돌아다니며 오르기도 쉽지 않은 나무를 바동바동 억지로 올라가서 나뭇가지 끝자락에 달린 열매를 겨우 털어서 한 바가지쯤 주워왔다.
연두색 대추는 먹어보지 않았었는데 아삭하게 깨물어 씹어보니 그런대로 단맛도 나는 것이 예상외로 먹을 만했다. 어린 시절에 수박이나 참외 서리는 몇 번 해봤지만, 길가의 은행나무 열매를 털어가면 공유재산 무단취득죄로 벌금을 내는 세태이다 보니, 아파트단지 내의 대추라도 서리를 해오면 범죄가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내는 처음 서리해본 대추라서 더 맛있다며 혼자서 열 개도 넘게 오물오물 먹어치웠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무렵에 허리가 결리고 허벅지도 뻐근해져서 내년에는 일찍 따러 가자고 웃으며 약속했었다.
제사나 명절 차례상 맨 앞줄에 놓이는 조(대추), 율(밤), 시(감), 이(배)의 한가지인 대추는 원산지가 한국이고 중국과 일본, 남유럽에 분포되어 있으며 경남 밀양과 충북 보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잘 익은 대추 열매 말린 것은 자양, 강장, 진해, 진통, 해독 등의 효능이 있어 한방에서는 기력부족, 불면증, 약물중독, 만성기관지염 등에 쓰인다. 대추는 열매가 많이 열려 다산과 풍요의 의미로 혼례식 때 신부에게 던져주는 폐백용 과일이 되었으며, 재목이 단단하여 떡메나 달구지의 재료로 쓰이고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물에 가라앉는 특색이 있어 값비싼 도장을 파는 재료로 사용된다.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는 차량의 매연으로 인해 열매에서 발암물질이 추출된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로 털어가는 사람도 드물지만, 길바닥에 떨어진 열매도 주워가기는커녕 마구 짓밟고 다녀서 노랗게 쌓인 은행잎을 사각사각 밟으며 걷는 가을 정취마저 경감시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대추나무도 길가에 심어지면 마찬가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파트단지 내의 대추는 오며 가는 사람들 누구나 한 번쯤은 털어서 따보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탐스럽고 귀해 보인다.
수 억 년을 살아남은 은행나무나 수 만 년을 견뎌온 대추나무처럼 사람도 제가 설 자리에 배치되어야 비로소 자기의 고유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선 취직자리가 급하다고 본인의 적성과 자질에 맞지도 않는 일자리를 찾았다가는, 괜한 시간만 낭비하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나 남기게 될 잘못을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화려한 대로변의 가로수가 되었다가 말년에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은행나무보다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눈에만 뜨이지만, 제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에만 종사하다가 늘그막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송받는, 대추나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처신이 아닐지 모르겠다.
추석을 일주일쯤 남겼을 때 햇볕에 반짝이던 연두색 대추 열매가 붉은색을 조금씩 띠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우리 집 앞의 대추나무를 추석 전날 털기로 하고 빨래건조대의 긴 막대를 뽑아내어 현관 입구에 세워두었다. 추석날 찾아올 올해 입학한 손녀와 며느리들에게도 맛을 보일 수 있고 직접 수확한 과실을 차례상에도 올릴 수 있겠다고 좋아하며 들락거릴 때마다 대추 열매를 올려다보고 흐뭇해했다.
“여보, 큰일 났어요. 대추를 누가 다 따버렸어요!”
외출 갔던 아내가 들어서며 기함을 하였다. 화들짝 놀라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우리 대추나무에 소담스레 달려 있던 볼그레한 대추가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아니, 이런! 어떤 사람이 우리 대추를 서리해 간 거야?”
나는 놀라고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일 년 동안이나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몰상식하고 무례한 화적 보따리 같은 사람이 우리 대추를 말도 없이 몰래 다 털어갔는지 도대체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집 안에 있으면서 그것도 제대로 감시 못 하고 뭐했냐는 아내의 핀잔을 들으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양손으로 얼굴만 문질러대었다.
그냥 두면 안 되겠고, 내년에는 아무나 따지 못하게 하고 일정한 날을 잡아서 함께 털어 나누는 방안을 관리사무소에 건의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아내와 나는 다소 안심하며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대추? 그런데 한참 후에 갑자기, 왜 내가 우리 대추를 몹쓸 사람한테 서리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군가가 따려고 마음먹고 기다리던, 남의 대추를 서리하려고 계획했던 게 아닌가?
나이가 들면 동심으로 돌아간다지만, 내 것, 남의 것, 우리 것도 구분 못 할 정도로 아둔해지면 안 되는데 생각하며, 잠깐이나마 아파트의 공동소유인 대추나무 열매를 내 집 앞에 있다고 마치 내 것 인양 착각했던 게 부끄러워 혼자서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2016년 계간지 ‘ㅁㅇㄱㅅ’ 봄호 등재)
첫댓글 그러게요. 우리 대추는 아니네요 ^^
그러게요. 어떤 땐 공유물을 내것인 냥 착각하기도 합니다.
아파트 내 대추나무 앞을 지나다니며 따보고 싶었는데 못해 봤어요.
올 가을엔 풋대추맛을 좀 보고 싶네요. ㅎ
네, 대추 서리 한번 해 보십시오. ^0^
멀리 튕기지 않게 가지를 적당히 두들겨 줍는 재미가 제법 쏠쏠 합니다요.
ㅋㆍㅋㅡ그래도 우리 것이니 조금만 따가세요ㆍ하고 안내글 남겨보세요ㆍ대추가 우리나라 원산지이군요 ㆍ
네. 다음 해에는 우리 집 앞 대추나무에서 제일 먼저 한 양동이쯤 털어 따고 그 정도 남겨뒀습니다. ㅎ
달콤한 소재의 작품 재미있게 감상하였습니다.
저도 공동주택에 생활하면서 한 아주머니가 대추 어떻게하시나요? 묻기에 베어 대신 달콤한 맛보았습니다.^^
네, 연두색이 절반쯤인 대추알을 씹어 먹으면 달착지근한 게 맛이 아주 좋습니다. 대여섯 개는 금방이지요. ㅎ
@심삼일 저희 대추나무는 작년에 베어
아마 금년에는 안열듯하지만 알수없으니 기다려집니다.
대추야~ 봄 손 꼭 잡고 오~렴 ㅋㅋㅋ
윗사람에게 온갖 아첨을 다하고 충성해서 높은 보직에 올랐다가 말년에 뭇사람들 지탄을 받는 신세가 되기보단, 평범한 일에도 진지하게 성심껏 임해서 주위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공감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평범 속의 성실한 삶이 바람직한 그런 세태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아파트에는 감나무가 제법 있습니다. 언제 누가 따는지...
올해는 일직 따서 가을의 정취를 느낄 겨흘이 없어서 많이 아쉽더군요.
오래 두고 보시길~~^^
네, 산마을풍경님. 님의 아파트는 감나무골이군요. 가을에 붉게 물들어 주렁저렁 달린 모습이 탐스럽지만, 하얀 감꽃이 필 때도 참 보기 좋지요. 떨어진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 만들어 놀던 시절이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