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47
11월17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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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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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oguTGgSX20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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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비하신 주님께서 언젠가 우리에게 또 다른 목숨과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어머니가 적대자들의 박해와 협박, 세상의 고통과 위기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일곱 순교자 형제의 어머니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놀랍도록 당당하고 위대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가 담긴 마카베오서는 읽을 때마다 큰 슬픔과 동시에 큰 감동을 제게 선사합니다.
용기 있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신앙으로 인해 생사의 기로 앞에 놓여있는 아들들에게 비굴하게 살아남지 말고 장렬하게 목숨을 바치라고 격려합니다. 적대자들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지 말라고 계속 귓속말을 던집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니 더 이상 참혹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어머니가 바라보는 눈앞에서 아들들 한명 한명이 처참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제 유일하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아들만 남아있었습니다.
총명하고 신앙심 깊은 아들들과 어머니의 모습에 적대자들도 감동을 받았던지 갖은 회유와 미끼를 던집니다. 조상들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세운 우상을 섬기기만 한다면, 부자로 만들어주고 벗으로 삼으며 높은 관직까지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라면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에 적대자들에게 막내아들만큼은 살려달라고, 적어도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냐고, 엄마인 나만 죽이고 막내아들은 목숨을 살려주라고 사정사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감한 어머니는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아들들을 향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뭉클하게 만들며, 오늘 우리를 엄청 부끄럽게 만듭니다.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마카베오 하권 7장 23절)
“이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마카베오 하권 7장 29절)
오늘날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참으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애지중지합니다. 미래를 위해 엄청난 교육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공경하는 법은 조금도 배우게 하지 않습니다. 깊은 신앙에로의 안내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 자녀들은 하나하나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저 한치 눈앞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경외할 줄 모릅니다. 그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멋진 어머니의 찬탄할만한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 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마카베오 하권 7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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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oKrWgh8Ng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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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한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법>
오늘 복음은 ‘미나의 비유’(루카 19,11-28)입니다. 한 미나는 100데나리온, 약 1,000만 원 정도의 가치입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씩을 주며 벌이를 하라고 분부하고는 왕권을 받기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주인을 싫어하여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주인의 돈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이 있는가 하면 한 미나를 그대로 돌려주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임금이 되어 돌아온 주인에게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한 이들과 함께 엄벌에 처해집니다. 이 사람의 한 미나는 열 미나를 번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 벌어야 하는 ‘미나’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나의 임금이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창조하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까지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한 미나 그대로 주인에게 내어준 종과 같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그 백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픔도 따릅니다.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서 그 백신이 나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내가 감사하지 않는 것을 누구도 스스로 내 안에 넣어 나에게 영향을 주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려 하십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것이든 내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체로 내 안에 오십니다. 내가 성체에 감사하지 못하면 나는 성체를 영해도 그분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유일하게 가져야 하는 한 가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마치 백신을 맞아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처럼 감사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감사의 마음은 ‘한 미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마중물과 같은 감사 거리입니다. 마중물이 없으면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여 죽고 맙니다. 장사 밑천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의 시작은 한 미나인데,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희생인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감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가장 하느님을 많이 알렸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신 마비 환자였던 미즈노 겐조(1937-1984)입니다. 그는 4학년 때 이질에 걸려 눈과 귀 이외에 온몸의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원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겐조의 사정을 알게 되어 그에게 상경을 한 권 주고 갑니다. 겐조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자신이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를 깨닫습니다. 겐조는 12세 때 하느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
겐조는 18세가 되던 해 시를 쓰기로 합니다. 어머니가 자음과 모음으로 된 50글자로 된 일본 문자판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갈 때 눈을 깜빡이면 그 글자들을 이어 시를 탄생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네 편의 시집을 냈습니다. 그의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란 시는 그가 괴로움을 묵상하며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그가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볼까요?
<어머니를 잃은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마음속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함께 하시기 때문이겠죠.>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내가 묵상할 거리입니다. 겐조는 어머니의 죽음도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깨닫는 순간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묵상기도가 주는 열매입니다. 모든 것은 감사로 바뀝니다. 또 이분이 하느님의 음성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도 ‘말씀’이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위해 시를 쓰기로 하게 된 이유를 ‘잊기 전에’란 시로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잊기 전에
지금 들은 것
보인 것
마음에 느낀 것
잊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주의 아름다운 은혜를
찬양하는 시를 만들자.>
묵상하는 자는 감사가 솟고 그 감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그 받아들인 주님 때문에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은총으로 인식하고 감사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그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라도 표현하여 주님께 보답하려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 미나만 받았다고 그것에만 감사를 묻어둘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 방법은 다섯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방법입니다. ‘무조건 감사하는 습관 기르기’입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일기 쓰기’와 같은 예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처음엔 사생아로 태어나 폭행과 마약 등으로 감옥을 드나드는 카인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매일 감사일기를 쓰며 인생을 바꿨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가 나병 환자들을 보며 감사를 묵상했다면 예수님께서 어머니 품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는 인간의 의지를 따릅니다. 의지적으로 감사하려고 한다면 머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지 묵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묵상을 하지 않았기에 감사를 잃은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할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고 십일조도 감사하게 하지 못한다면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도 잃고 하느님 나라도 잃고 카인과 같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준비한 이에게 들어오셔서 당신 나라로 삼으십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열 미나를 번 종은 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고 다른 종의 한 미나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임금으로 내 안에 모시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감사의 마음’임을 잊지 말고 쉼 없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나에게 주어진 감사한 것들을 찾아내려 성령으로 이성을 길들여야 합니다. 하루에 50번 정도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짧은 기도를 바칩시다. 그러면 뇌가 묵상기도를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정돈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감사가 열로 늘어난 것을 신기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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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11-28 : 열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아들이고, ‘여행’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 왜 왕권을 받고자 하늘에 오르셨을까?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에게도 그것을 주셨다. 그분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이 오른 쪽에 앉으시어”(히브 1,3) 당신의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게 될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신다. 이것이 미나/탈렌트의 뜻이다. 이 미나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는다. 그들은 직무를 실행하며 이윤을 낸다. 그래서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셨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러주신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14절)고 한다.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요한 15,24)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예고했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과 준비된 상태에 따라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마태오 복음에는 각 사람이 받은 탈렌트가 달랐다고 한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셨다고 한다(마태 25,15 참조) 가가 사람에게 그 능력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잘 받아서 잘 활용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바쳐야 할 이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우리는 주님께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거나, “땅에” 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돈이 어떤 면으로든지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신다. 수건에 싸서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았으며, 결국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만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24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열 미나를 바치고 다섯 미나를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는다.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풍요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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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루카 19,12-13)
‘미나의 비유’는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탈렌트의 비유’와 같은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귀족’은 예수님이고,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난 일은 ‘승천’을 뜻합니다. ‘미나’는 당시에 사용하던 금화의 이름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는데, ‘60 데나리온’, 또는 ‘100 데나리온’이 ‘한 미나’입니다. 그리고 ‘60 미나’가 ‘한 탈렌트’입니다. ‘미나’는 ‘탈렌트’에 비하면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만,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미나의 비유’는 ‘순종’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나누어 준 ‘미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뜻하고, 종들이 그것으로 벌어들인 돈도 은총을 뜻하고(24절), 성실하게 일해서 받은 상도 은총을 뜻합니다.(17절)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지시한 대로 종들이 돈벌이를 하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일도 아니고, 맡겨진 과제를 수행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 일 자체가 은총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생활 자체가 은총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고, ‘내가’ 기뻐하니까 하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신앙인으로 불러 주신 것도 은총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은총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의무’나 ‘복종’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의 삶을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자체가 은총인데, 자신이 받은 은총을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의무감으로 하는 일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일, 즉 ‘강제 노동’과 같은 일입니다.
<‘순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의 순종’은 싫든 좋든 명령에 복종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응답은 순종의 대표적인 모범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을 풀어서 표현하면,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저는 원합니다. 그래서 종이 주인을 따르듯이 주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과 자신의 응답에 대해서,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라고 노래했습니다(루카 1,47).>
‘미나의 비유’ 바로 앞에 있는 이야기에 나오는 ‘자캐오’를 ‘능동적인 응답’의 예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5-6) 이 이야기에서 보이는 자캐오의 응답과 기쁨은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불러 주신 것을 기뻐했고, 동시에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 상황을 “기쁘니까 응답했고, 응답할 수 있어서 기뻐했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요한 11,43-44)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은 라자로가 스스로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라자로 쪽에서 그 생명을 받으려고 능동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은 그렇게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라자로가 무덤 속에 그대로 누워있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또는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하면서 그냥 누워 있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나의 비유’에서, 성실하게 일한 종들이 칭찬과 큰 상을 받는 것은(루카 19,17.19), 주님께서는 결과보다 과정을(노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과 신앙생활은 신앙인 자신을 위한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인은 종들이 번 돈을 차지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또는 예수님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표현할 때가 많긴 한데, 그래도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생활입니다. 그러니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만일에 그가 어느 정도 돈벌이를 했더라도, 기쁨 없이 의무감으로만 억지로 했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하기 싫은데도 어쩔 수가 없어서 억지로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탈렌트의 비유’에는 세 번째 종이 ‘쓸모없는 종’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마태 25,30) 신앙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하느님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곧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마태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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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홍보를 가면서 사업하는 분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됩니다. 요즘은 종이신문을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신문 홍보도 쉽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몇 시간 씩 가기도하고, 비행기를 타고 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감사할 일은 신부님들께서 배려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교우 분들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신부님들께서는 공지사항 때 신문 구독을 독려해 주시고, 교우 분들은 신문 홍보를 잘 할 수 있도록 의자와 탁자를 준비 해 주십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것을 실감할 때도 있습니다. 저의 일을 도와주시는 형제님과 대화하면서 한국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서울에 있을 때 보좌 신부로 있던 성당에서 청년활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일찍 미국에 와서 저와는 같이 지낸 시간이 없었지만 제가 아는 청년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에 있는 예전 본당의 청년들과 인사 할 수 있었고, 형제님은 예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 하루를 살았어도 인생은 흑자라고 하였습니다. 광대한 우주에서 지구별에 태어난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아름다운 생명이 넘쳐나는 별은 우리가 발견한 최고 성능의 망원경으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수천억의 별 들 중에 우리가 지구별에서 살 수 있는 것은 행운이며 행복입니다. 어제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신앙 때문에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참 안타까운 죽음이 많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 갑자기 찾아온 병,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과 작별하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듯이, 땅에 떨어진 씨앗에서 새싹이 나듯이 신앙인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출구 없는 미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나’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열 미나를 가신 사람은 본인의 십자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간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남에게 미루려는 사람은 결코 부활의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배가 없으면 우리는 부활에 이르는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2021년 우리는 230년 전에 순교한 ‘윤지충, 권상연’ 복자의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230년 동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유해를 모시고, 그 위에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기리는 성전을 세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집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과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 나눔, 희생, 봉사, 인내’입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 하느님 나라만 찾는 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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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말이 씨가 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펼치면서 “아, 이 말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예수님 말씀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널리 알려진 말씀에는 좋은 해석도 많고 남다른 강론도 많기 마련이기에 솔직히 부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연거푸 복음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에 나오는 종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맡긴 한 미나를 없애버린 것도 아니고, 떼어 먹은 것도 아닌데 ‘악한 종’이라는 극단적인 꾸지람을 듣다니요?
역시 그 주인은 백성이 싫어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그 종이 주인에게 뱉은 말은 곁에서 듣기에 상당히 언짢았습니다. 주인을 대하는 종의 어투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은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신다”니요? 그런 말을 면전에서 듣게 되면 누군들 속상하고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오늘 주인의 답변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죄 지은 적이 없다는 너의 말 때문에 나는 너를 심판한다.”(예레 2,35)라고 예레미야 예언자도 경고한 바 있지요.
우리 인간에게 창조주 하느님은 상상할 수 없이 엄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세상은 마지막 심판 날에 심판관이신 하느님을 뵙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따뜻하고 인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입에서 나온 이 찬미의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비의 품에 안기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뻔?심판하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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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영준 D.안드레아 신부님]
언젠가 반 모임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반에서 이 복음을 가지고 복음 나누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반장님께서 자신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반원들을 불리지도 못하고 있다면서 하느님께 죄송스런 마음뿐이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달란트의 비유가 반을 활성화시키지 못한 반장님을 질책하는 소리처럼 들리셨나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반모임에 참석하신 분은 총 다섯분, 집주인 내외와 반장님, 그리고 어제 처음으로 나오신 분을 제외하면 단 한 분이 남았습니다.
물론 숫자가 적다고 대충대충 넘어간 것이 아니라 진솔한 나누기는 하셨지만 참석율이 너무 저조해서 요즘 신자분들이 바쁘게 살아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금화를 우리의 힘으로 불려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많이 불린 사람은 그에 따라 상도 주시고 반대로 불리지 못한 사람은 심한 질책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영적인 금화를 불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성서를 접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꺼먼 성서를 난데없이 읽기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빽빽한 글씨가 수북이 박힌 성서를 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굳은 결심을 하고 창세기부터 읽어나가면 처음에는 이야기 형식이라서 조금은 읽을 만 하지만 탈출기를 읽고 레위기로 넘어가면 적지 않은 분들이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성서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저는 반모임에 나갈 것을 강력하게 권해드립니다. 집에서 혼자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다소 힘들게 느껴지지만 반모임에서 아는 얼굴들끼리 마주 앉아서 성서를 접하게 된다면 보다 쉽게 성서를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 미사 때 흘려 들었던 복음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복음말씀을 곱씹어 본다면 성서 읽는 재미에 빠져들 수 있을 것입니다. 반모임을 통해 성서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다소 완화되었다면 그제야 비로소 성서 공부도 하면서 성서를 보다 쉽게 접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서를 읽는 방법에는 왕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욕심내지 않고 한발 한발 나아간다면 우리 모두가 성서를 생활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생활화를 통해서만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장 손쉽게 키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그 동안 집안에 먼지만 수북이 앉아 있는 성서책을 끄집어내어 읽는 첫발을 디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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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다.>
오늘 복음은 ‘금화를 맡은 종들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 비유는 마태오복음의 ‘달란트를 맡은 세 종의 비유’(마태 25,14-30)와 흡사하다.
그러나 두 비유를 잘 살펴보면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우선 마태오복음의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21장), 최후의 만찬을 목전에 두고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최후의 심판 비유’(25,31-46)와 함께 발설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임박한 종말의 시작과 인자의 재림을 다루는 주제에 전체적으로 편입된다. 마르코복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오늘 복음의 비유에 걸맞은 몇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마르 13,34-36)
이에 비하여 루카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지막에,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해 놓았다.
내용 면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인다. 몇 가지 점만 지적하여 보자.
마태오는 단순히 어떤 주인이 먼 길의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각각 5, 2, 1달란트를 맡긴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라면(마태 20,1-16; 18,35 참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서 실로 엄청난 금액이다.
루카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한 귀족이 10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금화 한 개씩을 준다. 여기서 금화 하나는 1미나로서 100데나리온의 금액이다.
루카는 비유의 배경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깔고 있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위계승의 청탁을 위해 로마로 갔던 사실(12절), 백성의 대표단이 이를 반대한 사실(14절), 그리고 실제로 아르켈라오가 로마황제로부터 왕위를 받지 못하고 유다와 사마리아지방의 영주로만 책봉되어 돌아와서 왕위계승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참살한 사실(27절) 등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 오늘 비유의 역사적 신빙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신빙성을 따진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런 모양의 비유를 직접 말씀하셨다면 이를 두고 왜 두 복음사가가 서로 다르게 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두 복음서가 많은 부분의 같은 내용을 두고 가감? 수정의 과정을 통하여 독자적인 복음서로 발전되어 온 것을 인정한다.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이 비유를 발설하셨다면, 시기적으로는 예루살렘 입성 후가 될 것이며, 비유의 목적은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지긴 하지만, 이를 맞아들이는 자세가 그 능력에 따라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비유를 가감?수정하여 마태오는 최후의 만찬 직전에 배치하고, 루카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시기에 배치하였을까?
문제는 하느님나라가 도래하는 시점이다. 물론 성자의 강생으로 하느님나라는 이미 도래하였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태어난 메시아가 왕으로 등극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그의 군대를 지휘하여 로마군대를 쳐부수는 전쟁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세상의 종말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림에 대한 것도 안중에 없었다. 그러니 오늘 비유는 각각 마태오와 루카복음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발설한 비유를 두고, 마태오는 상당히 임박한 세상종말과 인자의 재림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가졌고, 루카는 거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자,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늘 비유를 말씀하셨다(11절)는 도입이 바로 그 이유이다.
성서의 말씀이 기록된 후 2,0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간 것을 보면 루카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또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종말과 인자의 재림을 동시에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 때 오늘 비유에서 주인의 질책을 받는 세 번째의 종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종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거나 다른 어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비참한 말로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종이 주인의 의도를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였을 뿐 신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인은 각자가 맡은 것의 열매를 보고 싶어 한다.
하느님도 그렇다. 하느님과 그 나라에 대한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고, 사랑 없이는 생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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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늦가을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사실 이를 주의해야 합니다. 곧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4-45)
그렇습니다.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곧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빛은 빛의 열매를 맺고 어둠은 어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야 할 일입니다. 열매에 치중하다 자신을 그르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지도 말아야 할 일입니다.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사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이요, 불신은 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이 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믿는다면 그 믿음에 대한 충실이 요청됩니다. 그 믿음에 충실하다면,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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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는 기도 -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주님!
당신께서는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사랑과 신의의 표시로 저에게 ‘미나’를 맡기셨습니다.
잘 간직하라고 가 아니라, 잘 열매 맺으라고 씨앗으로 선사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신의를 땅에 묻어버리고 제 신변안전만 바라는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과 사랑이 꽉 찬 열매를 들고 당신 앞에 나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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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19,13)
<믿음으로 순종하자!>
오늘은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시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이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주보 축일을 맞이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인 '미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는 줄로 생각하자, 예수님께서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루카19,12)
이 비유 말씀에서 '어떤 귀족'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시고, '먼 고장으로 떠났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뜻합니다.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한 미나씩 주시고 하늘로 오르셨고, 왕권을 받고 돌아와(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공평하게 받은 '한 미나'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19,13)
이 말씀은 믿음을 잘 키워나가야하고, 우리 모두의 사명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미나를 받고, 벌이를 잘하여 열 미나를 더 벌고, 다섯 미나를 더 번 종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받은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하였다가 그대로 돌려드린 종은 주인으로부터 호되게 야단 맞습니다.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돈을 '수건에 싸두었다는 것'은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 했음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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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
루카 19,11ㄴ-28 (미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벗>
벗을 미워하는 이들
틈바구니에서
곁에 없는
벗을 위하여
함께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벗으로 남는 사람이
참으로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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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국 문화의 해외 진출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참 많이 올라갔습니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정점을 찍고, 아카데미 수상에서도 한국 영화가 최고 작품임을 알립니다. 여기에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정말로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케이팝(K-Pop)과 케이무비(K-Movie), 케이드라마(K-Drama)는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던 때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랬을까요?
사전심의가 폐지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이 사전심의가 대단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장희의 ‘그건 너’라는 노래는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내용이라고 금지곡이 되었고,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냐면서 부정적인 내용이라고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검열로 표현의 자유가 있을 수 없었고, 자연히 작품성이 떨어지는 그냥 일반적이고 무난한 작품만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이 안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케이컬쳐(K-Culture)로서 국가의 위성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간섭을 줄이고 자유를 늘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주님의 무책임한 방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귀족이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습니다. 귀족이 돌아온 뒤, 어떤 종은 열 배로 또 다른 종은 다섯 배로 불립니다. 그러나 주인인 귀족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냥 자기 합리화로 얼버무리는 종의 미나는 빼앗아서 열 미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투자를 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 예를 들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들을 열심히 사용해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지요.
똑같이 하나의 미나를 나누어주시듯이,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합니까? ‘왜 저 사람만을 더 사랑하실까?’라면서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는 능력이 없어서요’라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게을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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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 New>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Good & New’라는 놀이입니다. 게임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24시간 이내에 있었던 좋은 일(Good) 혹은 처음 했거나 처음 경험한 일(New)을 1분 안에 말하는 게임입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말하는데, 사소한 일도 괜찮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약간 야단법석을 떨며 손뼉 치며 기뻐해 줘야 합니다. 이 놀이는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게임처럼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놀이 후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곳에 오는 것을 즐거워했고, 일상 삶 안에서도 계속 좋은 일과 새로운 일을 찾아 행하는 적극적인 아이가 된 것입니다. 좋은 일과 새로운 일은 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문제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내 마음에 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좋은 일과 새로운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좋은 일과 새로운 일에도 적극적으로 기뻐해 줘야 합니다. 그때 더 좋은 효과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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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 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가19,26) 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을 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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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
-한평생 맡겨진 책임을 ‘참으로’ 다하는 사랑-
오늘은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여기 요셉수도공동체 형제들은 지난 주일 11.14일 주일 저녁기도부터 11.20일 토요일 아침미사까지 박재찬 안셀모 도반 수도사제의 지도로 연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토마스 머튼의 삶과 영성-Becoming Love(영적변화와 성장)-”입니다.
토마스 머튼! 1985년도 수련기때 참으로 심취하고 열광했던 당시 제 영적 우상이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왜관수도원내 도서실에 있는 영문판 서적은 물론 참 많은 책들을 읽었고, 33년전 대구가톨릭 신학대학원 졸업 제1회인 1988년 최초 석사논문 1호도 제가 쓴 ‘토마스 머튼의 관상’이었습니다.
이제는 토마스 머튼을 졸업했지만(?) 당시는 토마스 머튼은 제 수도승 영성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제 사랑 전부이고 토마스 머튼은 전부중 ‘일부’일뿐입니다. 피정 주제중, Becoming Love(사랑이 되기)! 영어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갈망과 제 갈망이 일치가 된다 싶은 말마디였습니다. 한 마디로 한평생 ‘사랑이 되고 싶은’, ‘사랑이신 하느님이 되고 싶은’ 존재론적 변화의 갈망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되고 싶은 갈망에서 모든 성인이 일치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순교적 사랑의 삶을 살다가 24세!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녀의 영적지도 신부였던 마르부르크의 콘라트의 증언입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녀에 대해 이 말을 하고 싶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적이 없다. 사랑의 관상이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나고 그 눈에서 태양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전 나는 그의 고해를 들었다. 남기고 가는 재산과 의류를 가지고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내가 물어보자, ‘자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모두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기가 입던 낡은 옷을 제외하고는(그옷을 입고 묻히기를 원했다), 전부를 가난한 이들에 나누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을 마치고 주님의 몸, 성체를 영했다. 그리고나서 저녁기도때까지 자기가 전에 설교말씀에서 들은 거룩한 이야기를 되새겼다. 마침내 열렬한 신심으로 주위에 모인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서 평온히 잠들 듯 숨을 거두었다.”-
말 그대로 ‘사랑이 된’ 관상가의 한생애였음을 봅니다. 제 수도원 숙소 복도 벽에 걸려 있는 ‘沈默(침묵)’이란 한자 목판이 새삼스럽게 감회에 젖게 했습니다. 수도원 초창기 부임시 그러니까 33년전 1988년 가을에 썼던 제 글씨입니다. 침묵의 사랑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침묵의 소중함이란 시중 한연이 떠올랐습니다.
“침묵은 사랑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치 않고 마음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사랑입니다.”
제가 어느 수도원에 가든 우선 확인하는 것이 셋입니다.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에 이어 수도원 묘지墓地입니다. 특히 수도원 묘지에 말없이 묻혀있는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묻힌 수도선배들의 무수한 묘와 더불어 십자가 표에 묘비명 없이 이름만 써있는 묘비석을 볼 때면 가슴 먹먹한 감동을 느낍니다.
지난 2014년 안식년중 3개월 동안 한국 수도자들이 살고 있는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매일 찾았던, 예전 미국 수도자들이 묻힌 수도원 묘지였습니다. 묘비명들을 대하면 그분들의 생애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의 마지막 연은 그의 묘비명으로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이렇게 고백하고 떠나는 삶이라면 오늘 강론 제목대로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제 경우라면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시를 새긴 시비詩碑를 유언으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16년전 2005년 써놨던 “내 묘비명은”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장차 내 묘비명이 있다면 다음과 같았으면 좋겠다’에 이어 쓴 시입니다.
-“그는 욕심이 없었고
평생 하느님만을 그리워했으며
그 무엇을 바라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늘의 깊이와 넓이, 맑음만을
어둔 밤 빛나는 별처럼 깨어 있음만을
하늘 떠도는 흰구름의 자유만을
산의 한결같은 인내와 침묵의 사랑만을
바라고 부러워한 이
여기 주님의 품 안에 잠들다
그는 정말 다른 무엇도 바라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연은 또 하나 그의 사랑이자 종교였다”-2005.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떠오른 단상들입니다. 믿는 이들 너나 할 것 없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의 한평생 삶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누구나 똑같이 선물로 받고 있는 하루하루의 삶이자 한평생의 삶입니다. 과연 선물인생이자 과제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요? 사람마다 과제의 정도는 다 다를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 앞에 한평생 과제를 제출할 준비는 되어있는지요. 하루하루 과제를 제출하며 하느님 앞에 셈바치며 사는 삶을 습관화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각자 그 이상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닌 각자에 맡겨진 능력의 책임만큼만 기대하고 요구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 그대로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남기든, 다섯 미나를 남기든 제 능력대로 맡겨진 책임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양이 아닌 분투의 노력을 다한 결과만 보십니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잘하였다, 착한 종아!” 칭찬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맡겨진 책임을 전혀 하지 않았던, 받은 은사를 사장시켰던,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태만했던 한 미나 그대로 였던 이에게는 “악한 종아!” 가차 없는 질책과 더불어 심판이 뒤따를 것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아무도 탓할 수 없습니다.
인생사계로 압축해볼 때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습니까? 과연 사랑의 영적 열매들 풍성한 가을 인생인지요. 풍성한 사랑의 배열매들의 수확후 초겨울에 접어든 배밭 분위기는 말 그대로 넉넉하고 평화로운 ‘텅 빈 충만’의 분위기입니다. 흉작이라면 한없이 마음 쓰리고 쓸쓸한 ‘텅 빈 허무’의 배밭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인생을 뒤돌아 보게 하는, 배밭이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어제의 엘아자르의 순교에 이어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의 순교에 대한 일화입니다. 평소 하루하루 축적된 내공의 깊이를, 믿음의 깊이를 깨닫게 합니다. 몇날의 준비로 이런 사랑의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분명 하루하루 죽음 준비를 하며 주님 향한 한결같은 사랑과 믿음의 삶이었기에 배교나 변절함이 없이 참으로 책임을 다하는 거룩한 사랑의 순교입니다.
참으로 가슴 먹먹하게 하는 순교장면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는 사랑과 믿음을 보고 배운 일곱 아들들임이 분명합니다. 그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 묘사에 이어 마지막 아들에 대한 부탁입니다.
-‘그 어머니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을 가득 한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붇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부활의 승리를,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내다보는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로 충만한 그 어머니의 영혼입니다. 과연 나 같으면 어떤 처신을 했을런지요? 유비무환입니다. 언젠가 있을 죽음을 늘 눈앞에 환히 두고 하루하루 깨어 최선을 다하며 참으로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믿고, 참으로 희망하고, 참으로 사랑하며, 참으로 살 때 참으로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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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다시 오실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루카 19,15)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오려고 먼길을 떠나기 전, 열 종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주고 벌이를 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왕권을 받고 돌아와 종들과 셈을 하려는 참입니다.
이 장면은 사람의 아들의 날, 우리의 임금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와 셈을 하시게 될 구원과 심판의 날을 보여줍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마련해 주셨던 영적 물적 자원들을 어떻게 성장시켜 열매를 맺었는지 그분과 함께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주인이 이른 대로 성실히 벌이를 해온 종들은 주인에게 착한 종이라 불리지만, 주인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은 악하다는 호통을 듣습니다. 그들은 주인(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시각과 왜곡된 자아상으로 은총과 선물을 허비한 이들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자신이 받은 여러 자원을 성실하게 돌보고 키워 주인께 되돌려 드리는 이에게는 더 큰 축복이 기다립니다. 순종과 헌신, 믿음과 사랑에 대한 보상입니다. 반면 받은 것조차 경시와 불평으로 묻어버리고 주인이 냉혹하다고 원망하기까지 한 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을 정도로 모조리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일곱 형제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2마카 7,20)
사랑하는 일곱 아들을 한 날에 다 잃은 어머니가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주님께 대한 희망"입니다. 그녀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주님을 경외함이라 믿기에 아무리 처절한 상황이 닥쳐도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조상들의 관습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며 벗으로 삼고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 맹세까지 하였다."(2마카 7,24)
임금의 회유책에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가치와 대립하라고 악이 내거는 유혹은 재물, 세속의 행복, 권력자의 측근이 갖는 잇권, 관직입니다. 시대와 장소, 문화가 달라도 어쩜 이리 복사판처럼 꼭 같은지요!
오늘의 주인공인 어머니와 일곱 아들은 임금의 회유를 비웃으며 극심한 고문과 잔인한 형벌을 견디어 내고 끝내 순교로써 하느님께 신의를 지킵니다. 하느님으로 부유하고 천지의 창조주를 벗으로 삼는 복락은 고작 세속의 부자가 되고 권력의 중심에 서는 일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열정과 신의와 헌신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한 미나를 열 미나, 백 미나로 불려서 온 세상을 감싸안고도 남을 축복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운 우리는 그러라고 초대된 이들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손에 소중히 쥐어 주셨던 한 미나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마다 힘들고 버거운 인생길에서 힘껏 애쓰며 살아온 우리에게 주님께서 반드시 "잘 하였다, 착한 종아!" 하실 겁니다. 축복에 축복이 더하여 주님으로 부요하고 충만해진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재속 프란치스칸들의 주보성녀 헝가리의 엘리사벳이 바로 우리의 모범입니다. 성녀 엘리사벳,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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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dkCjB7Iv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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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1.17.수.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잘하였다, 착한 종아!"(루카 19, 17)
나눔은
단풍처럼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어디로
가고 있는
우리들 삶인가.
삶은 진정한
나눔처럼
요란하지 않다.
빈 손이 아니라
나눔을 가지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길이
사람의
길이 된다.
우리를 믿고
맡기신
소중한 삶이다.
맡기신
삶이기에
아주 작은 일에
우리는 충실하고
성실해야 한다.
누구나 성실을
알지만 삶에
성실하지는 않다.
성실하다는
것은 수건에 싸서
보관하는 냉혹함이
아니라 나누고
함께하는 삶의
기쁨이다.
삶과 죽음의
중심에는
우리의
하느님이
계시다.
숨길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된다.
삶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나눔이 있다.
나눔이
하느님 나라의
뜨거운 울림이다.
우리에게
건네주신
나눔의 삶임을
잊지 말자.
하느님과
만남은
나눔의
이야기이다.
이와같이
삶의 끝은
어디인가.
새로운 나눔이
시작이 되시는
하느님이시다.
진심어린
나눔이
잘한 것이며
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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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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