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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도시 가운데 상황이 분명해지는 데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린 곳이 발렌시아였다. 발렌시아 군사령관 마르티네스 몽헤(Martinez Monje) 장군 자신이 어느 편인지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로부터 들려온 고데드 장군의 방송은 이곳 반란 모의자들에게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방송 때문에 동료 장교들에게 반란에 합세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어려워졌던 것이다. 전국노동연합은 이미 발렌시아 지역에서 총파업을 선언했고, 주지사 사무실에서 인민전선 소속 정당이들이 구성한 집행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주지사는 무기 인도를 거부해서 집행위원회에 의해 파면된 뒤였다.
마르티네즈 몽헤 장군. 내전 말기 마드리드 방위사령관이 되었으며 결국 국민진영에 체포되어 처형된다.
전국노동연합은 부두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가장 규모가 큰 노동자 조직이었는데, 인민전선에 협력하기 전에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중 하나가 준군사조직을 해체하고 구성원들을 분산하여 규모가 큰 몇몇 노동자 단체로 보내 그들의 충성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민전선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 연합 조직이 라디오 방송국과 전화국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건물을 장악했다. 하지만 치안대의 한 분견대는 몇몇 노동자들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도와주라는 명령을 받자 중도에 자신들을 감시하는 노동자들을 쏘아 죽이고 국민군 쪽에 합류하기도 했다.
몽헤 장군은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여전히 공화 정부 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주장을 신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몽헤 장군이 다른 도시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이끄는 대표단이 마드리드에서 도착한 다음 병영을 습격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중립적인 사람들의 반란군 합류를 염려하던 사람들도 더는 견딜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는데 동의했다. 병영은 반란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마침내 수복되었다. 발렌시아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 반란 음모자들에게는 중대한 타격이었다. 반란군은 이제 동쪽에서 마드리드 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되었다.
안달루시아에서 처음에 케이포 데 야노의 군대는 겨우 세비아 시의 중심부와 비행장 정도를 장악했을 뿐이었다. 반란군은 ‘비행 클럽’에 보관 중이던 개인용 비행기들을 정찰 업무와 아마추어식 폭탄 투하 공격에 매우 유용하게 써먹었다. 특히 카스테혼(Castejon) 소령이 이끄는 제5반데라를 포함하여 모로코에서 병력을 싣고 건너온 비행기들에게 활주로를 제공했다. 이 수송기들은 7월 21일에 도착한 뒤로 노동자들의 주요 거주지인 트리야나 구역(로마 황제 트리야누스가 이곳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에 전면 공격을 퍼부었다. 계속해서 카스테혼 소령과 부하들은 마카레나, 산훌리안, 산베르나르도, 엘푸마레호 구역 등을 공격했고, 이 지역들은 7월 25일까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안토니오 카스테혼 소령. 내전 말기에 장군으로 승진한다.
케이포 데 야노의 언론 담당 부관인 안토니오 바아몬데(Antonio Bahamonde)는 후에 공화 정부 편으로 돌아섰는데, 이 지역에서 반란군에 장악되는 과정에서 9천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반란군의 상대는 거의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맞선 지역 주민들이었다.
주로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이 구역에서 외인군단과 모로코 레굴라르들은 누추한 1층짜리 가옥들이 늘어선 거리들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창문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어 가옥을 폭파하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무어인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마음껏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했다.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은 한밤중에 내보낸 라디오 방송에서 병사들에게 여자들을 강간하라고 부추겼으며, 그와 관련된 잔인한 장면들을 노골적으로 빈정대면서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반란군이 저지른 잔인한 행동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가면서 안달루시아 농촌 지역에서 농민들의 보복 살인을 촉발했다. 농촌에서 농민들은 지주나 치안대원들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케이포의 군대가 세비야를 장악하자 반란군은 주변 농촌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어 팔랑헤당 소속 지주의 아들들이 말을 타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농민 사냥에 나섰다.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우스갯소리로 토지를 갖지 못한 브라세로(날품팔이 노동자)들이 마침내 자기 몫으로 한 뼘의 땅(무덤)을 갖게 된 ‘토지 개혁’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의 많은 변경 지역에서 갑작스러운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한 차례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주요 도시에서는 주인이 결정된 뒤로 사태가 숨 가쁘게 돌아갔다. 주요 도시에서는 다른 지역을 지원하거나 인근 도시를 재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신속하게 재정비했다. 마드리드에서는 노동자총동맹이 철도 전화망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정보 체계를 조직해놓아서 반란이 성공한 지역과 실패한 지역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노동자 의용군을 실은 트럭들이 수도에서 지방으로 내달렸다. 과달라하라를 치열한 전투 끝에 재탈환했고, 알칼라 데에나레스(Alcala de Henares)를 반란지지 선언을 한 치안대로부터 수복했으며, 쿠엥카 역시 시프리아노 메라가 이끄는 200명의 병사들 덕분에 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졌다. 급히 조직된 의용군 분견대들 덕분에 과다라마 산맥 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는 있는 몰라 장군의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서둘러 북쪽으로 이동했다.
알칼라 데에나레스의 위치. 마드리드 외곽을 지키는 요충지이다.
시프리아노 메라. 벽돌공 출신으로 내전 중 가장 유능한 아나키스트 지휘관 중 한명이었다.
대규모 의용군 부대가 트럭과 택시가 주축인 호송 차량들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내달려 카스티야 평야 지대를 가로질러 톨레도로 향했는데, 그들은 도중에도 자동차들을 징발했다. 톨레도에서는 모스카르도(Moscardo) 대령이 알카사르 성채에서 국민 진영의 육군사관학교 방어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때가 마침 방학이어서 학교에 남아있는 생도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 지역에서 치안대 대원들이 톨레도로 모여들어 모스카르도는 제법 강력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장교들과 많은 팔랑헤 대원들로 이루어진 혼성 부대가 합세해 적극적 방어자만도 1,100명에 이르렀다. 성채 안에는 또한 500명이 넘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있었으며, 100명 가량의 좌익 인사들이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모스카르도는 처음부터 반란 음모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으며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그에 앞서 모스카르도는 톨레도 무기 공장에 있는 군수품을 마드리드로 이송하라는 전쟁부의 명령을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지연시켰으며 의용군 병력이 도시 외곽에 도착하자 그와 부하들은 군수품 대부분을 가지고 요새 안으로 철수했다. 곧 알카자르 공성이 시작되었다. 그 공성은 국민 진영에는 감동적인 상징이 풍성하게 넘쳐나는 것이 될 터였다.
모스카르도 대령
알 카자르 성채. 포위 기간에 일부 파괴되었으나 내전 후 다시 복원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아나키스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라고사가 반란군 수중에 떨어지고 그 결과 동료들이 학살당한 사건이었다. 이에 무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별동대가 서둘러 소집되어 아라곤 외곽 지역으로 달려갔다. 그 과정에서 지역 치안대 분견대와 우익 동조자들에게 빼앗겨 반란 세력의 수중에 들어간 마을과 소도시를 재탈환했다. 의용군은 보통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위험하다고 여긴 사람들은 모두 쏘아 죽였다. 그러나 의용군 부대는 주로 도시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도시 거리에서는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지만 지형이 생소한 농촌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통합노동자당 지도자 호르디 아르케르(Jordi Arquer)는 뒷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우리에게는 지도가 없었다. 나는 정식 군사 지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슐랭(타이어 회사)에서 발행하는 단순한 도로용 지도를 말하는 것이다.”
호르디 아르케르
진격하는 동안 샌안드레스 병영에서 탈취한 3만 정의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한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 부대는 반란 세력의 수중에 들어간 도시와 마을을 탈환하고 반란 지지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쏘아 죽였다. 진격하는 부대 가운데 두루티가 이끄는 부대만이 농촌 지역 장악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주도인 살라망카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상황에서 농촌 지역까지 장악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병력 분산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화 진영 정규군 지휘관인 비얄바(Vilaba) 대령은 두루티에게 너무 서둘러 사라고사로 달려가지 말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국민군 쪽에서는 팜플로나에 있는 몰라 장군이 보낸 강력한 카를로스파 분견대가 사라고사 수비대를 지원하러 도착했으나 공화군 쪽 두루티의 군대는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바르셀로나로부터 달려온 약 2만 명의 의용군이 좀 더 적은 수의 목표물에 병력을 집중했더라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모여든 집단이 참모부가 통제하는 군대처럼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비얄바 대령
싸움은 무질서하게 진행되었다. 두 진영의 임기응변식 대응은 모종의 영감을 받은 것처럼 기발한 것에서부터 비현실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야전포(野戰砲)를 트럭 후미에 장착하는 것은 초창기 자주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트럭을 개조해 장갑차를 만든 것도 있었는데, 그 경우 가끔은 제대로 작동할 때도 있었으나 엔진이 강판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갖가지 형태의 수류탄이 제조되었다. 실제로 외인구단은 그해 가을 마드리드 외곽에서 러시아 탱크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른바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수류탄을 발명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독창성과 함께 참호 파기 같은 무미건조한 군사적 관행을 경멸하는 풍조도 나타났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하는 전투는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쟁 개념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용감한 행동으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도덕적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8월 초에 이르자 각각의 진영이 분명해지고 전선이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반란 세력은 서쪽 갈리시아와 레온에서부터 동쪽 나바라와 북부 아라곤까지 좌우로 넒게 퍼져 있는 띠 모양의 땅을 차지했다. 이 띠 모양의 지역이 반란 세력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던 아스투리아스, 산탄데로, 바스크 등의 북부 해안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남쪽과 서쪽에서는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 안달루시아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당시 반란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약 23만 5천㎢의 땅과 1,100만 명으이 인구를, 그리고 공화군측은 27만 ㎢에 1,400만 명의 인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페인이 폭력적 형태로 권력을 다투는 쿠데타가 아니라 진짜 내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공화 정부 측이 초기에 즉각적으로 쿠데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한 것은 이제 그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싸움, 즉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질이 필요한 그런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 진영이 내세울 만한 군사적 장점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4만 명의 아프리카 주둔 군대였다. 아프리카 군대는 1만 5천 명의 정규군(레굴라르)과 4천 명의 외인군단, 그리고 술탄의 병력 1만 2천 명과 1,500명의 원주민 소총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민 진영은 또한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 장비도 빈약한 본토 대도시 주둔 병력에서 5만 명 정도를 자기편으로 확보했다. 여기에 17명의 장군과 1만 명 정도의 장교들이 반란 세력에 합세했다. 그들은 또한 카라비네로(국경수비대) 중 3분의 2, 돌격대의 40%, 치안대의 60% 가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세 개의 준군사단체 병력 가운데 약 3만 명이 반란에 동조했음을 의미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13만 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반란군에 합류해 있었다. 이에 반해 히랄이 군대 해산령을 발표할 무렵 공화 정부는 준군사조직 병력 약 3만 3천 명과 5만 명의 병사, 22명의 장군과 7천 명의 장교를 두고 있었으며, 이는 이론적으로 모두 9만 명의 병력에 해당했다.
전쟁이 오랫동안 진행될 것을 고려할 때 공화 정부의 상황이 유리해 보였다. 공화 정부는 산업 시설과 우수한 인적 자원을 보유한 대도시, 광산 지대, 함선과 상선 대부분, 본토 총면적의 3분의 2, 국가 보유 금, 국가의 최대 외화 수입원인 감귤류 생산지 발렌시아를 수중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 진영은 불리한 상황을 외국으로부터 끌어낸 지원과 주요 농업 지대 장악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국민 진영의 주요 병력 공급원은 한동안 모로코의 리프족 원주민들이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국민 진영에 육해공군과 전략, 기술적 지원을, 미국과 영국의 사업가들은 전쟁에 필수적인 신용 대부와 석유를 제공할 터였다.
이 무렵 국민 진영은 병영 국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반면에 공화 진영에서는 혁명 과정이 시작되었다. 군대의 자칭 ‘예방 차원의 반혁명’ 시도는 공화국에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것마저 다 파괴해버렸다. 통합노동자당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과 협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중이 이루어낸 것을 승인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우파의 반란은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 혁명을 좌파의 열정적인 두 팔 안에 밀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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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