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
김소운
계절 중에서 내 생리에 가장 알맞은 시절이 겨울이다.
체질적으로 소양인 데다. 심열이 승하고 다혈질이다.
매양 만나는 이들이 술을 했느냐고 묻도록 얼굴에 핏기가 많고 침착 냉정하지 못해 일쑤 흥분을 잘한다.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김나는 뜨거운 것보다는 찬 음식을 좋아한다.
남국에서보다는 눈 내리는 북극에 살고 싶다. 그러면서도 유달리 추위는 탄다. 추위에 대한 저항력이나 자신으로 겨울을 좋아하느니보다, 추위 속에서 그 추위를 방비하고 사는, 추위는 문밖에 세워두고 나 혼자는 뜨끈하게 군불 땐 방 속에 앉아 있고 싶은, 이를테면 그런 '에고'의 심정이다.
눈보라 뿌리는 겨울 거리에 외투로 몸단속을 단단히 하고 나선, 그 기분이란 말할 수 없이 좋다. 어느 때는 외투라는 것을 위해서 겨울이 있는 것 같은 착각조차 느낀다.
그런데도 나는 그 외투 없이 네 번째 겨울을 맞이한다. 무슨 심원(心願)이 있어서, 무슨 주의 주장이 새로 생겨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외투 두벌은 도적맞았고, 서울 갈 때 남에게 빌려 입고 간 외투 한 벌조차 잃어버리고, 그러고 나니 외투하고 승강이하기가 고달프고 귀찮아졌다. 그냥 지낸다는 것이 한 해, 두 해ㅡ, 벌써 네 해째이다. 겨울의 즐거움을 모르고 겨울을 난다는 것이 슬픈 노릇이다. 하기야 외투뿐이랴. 가상다반 일체의 낙이 일시 중단이다. 나 하나만이 아니기에 도리어 마음 편한 때도 있다.
벌써 10여 년-, 채 십오 년까지는 못 되었을까? 하얼빈서 4, 5백 리를 더 들어간다는 무슨 현(縣)이라는 데서 청마(靑麻) 유치환이 농장 경영을 하다가 자금 문제인가 무슨 볼일이 생겨 서울을 왔던 길에 나를 만났다. 2, 3일 후에 결과가 시원치 못한 채 청마는 도로 북만(北滿)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역두에는 유치진 내외분ㅡ 그리고 몇몇 친구가 전송을 나왔다.
영하 40몇 도 북만으로 돌아간다는 청마가, 외투 한 벌 없는 맨 저고리 바람이다. 당자야 태연자약일지 모르나 곁에서 보는 내 심정이 편하지 못하다. 더구나 전송 나온 이 중에는 기름이 흐르는 낙타 오버를 입은 이가 있었다. 내 외투를 벗어 주면 그만이다.
내 잠재의식은 몇 번이고 내 외투를 내가 벗기는 기분이다. 그런데 정작 미안한 일은 나도 외투란 것을 입고 있지 않았다.
기차 떠날 시간이 가까웠다.
내 전신을 둘러보아야 청마에게 줄 아무 것도 내게 없고, 포켓에 꽂힌 만년필 한 자루가 손에 만져질 뿐이다. 내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불란서제 '콩쿠링'ㅡ, 요즈음 '파카'니 '오터맨' 따위는 명함도 못 들여놓을 최고급 만년필이다. 이 만년필은 일본 안에도 열 자루가 없다고 했다.
"만년필 가졌나?"
불쑥 묻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청마는 제 주머니에서 흰 촉이 달린 싸구려 만년필을 끄집어내어 나를 준다. 그것을 받아서 내 주머니에 꽂고 '콩쿠링'을 청마 손에 쥐여주었다.
만년필은 외투도 방한구도 아니련만, 그때 내 심정으로는 내가 입은 외투 한 벌을 청마에게 입혀 보낸다는 기분이었다.
5, 6년 후에 하얼빈에서 청마를 만났을 때, 그 만년필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튜브가 상해서 잉크를 찍어 쓴단 말을 듣고, 서울서 고쳐서 우편으로 보내마고 약조하고 '콩쿠링'을 다시 내가 맡아오게 되었다. 튜브를 갈아 넣은 지 얼마 못되어 그 '콩쿠링'은 쓰리가 채갔다. 아마 한국에 한 자루밖에 없을 그 청자색 '콩쿠링' 만년필이 혹시 눈에 뜨이지나 않나 하고 만년필 가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쑥스럽게 들여다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