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가까운 어둠 (딤전 1:3-4)
그림자는 항상 빛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양지와 음지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정말 두려운 것은 거짓 교훈이 바른 교훈에 즉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곁길 (샛길)은 언제나 큰길에서 갈라진다. 거짓 길은 바른 길에서 시작된다. 이런 현상은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도 나타났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 다른 교훈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려고 할 때 이미 거짓 교훈이 교회에 발생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속한 일인지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나면서 디모데에게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때로 거짓 교훈이 바른 교훈보다 더 강한 매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길을 가는 것을 싫어하고 다른 길에 곁눈질을 한다. 사람들은 정로 (正路)보다 사로 (斜路)에 이상한 매력을 느낀다. 몰래 먹는 떡에서 야릇한 맛을 느끼듯이 몰래 배우는 거짓 교훈에 홀딱 넘어가며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누린다. 이 땅에 이렇게 끊임없이 거짓 교사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와 같은 경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곁길을 향한 강한 동경심이 있지 않고야 어떻게 이처럼 계속해서 거짓 교사들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의 시대에 그랬다면 우리 시대에는 오죽하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할 것을 권면하였다 (딤전 1:3). 그러면 다른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 자신이 이에 대하여 설명을 주고 있다. 그것은 신화와 족보이다. 이 두 말은 상이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충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신화의 성격은 신약성경에 네 차례 나오는 진술을 살펴볼 때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신화는 망령되고 허탄한 것이다 (딤전 4:7). 망령되다는 것은 신화가 경건하거나 신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와 같이 별로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 한다 (본래 헬라어에서 "허탄하다"는 말은 나이 많은 노파와 같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화는 진리와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구하고 말세에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돌이켜 신화를 좇게 된다(딤후 4:4). 왜냐하면 신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로 교묘하게 꾸며지기 때문이다 (벧후 1:16). 참으로 놀라운 것은 심지어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신화가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딛 1:14).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화와 족보가 서로 보충적인 것이라면, 신화의 내용은 족보에 관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족보는 사람의 계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창조의 설화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본문에서는 후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다른 창조신화를 따르는 처사를 의미한다. 이런 처사는 결국 변론과 분쟁과 다툼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딛 3:9).
밝은 빛에 가장 근접하는 어둔 그늘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바른 길에서 즉시 파생하는 거짓 길이 사람들을 유인하는 힘은 대단히 강렬하다. 신화와 족보로 이루어진 다른 교훈의 매력은 보통 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화와 족보에 맛이 들면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착념하게 된다. 다른 교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억센 것이다. 그것은 마약중독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 교훈을 바른 교훈보다 더 열정적으로 고집스럽게 추구한다. 본래 악에 대한 추구는 선에 대한 추구 보다 지독하다. 그래서 사람을 바른 교훈에 들어서게 하는 일보다 사람을 거짓 교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어 사람들이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지 않도록 바로 잡을 것을 엄중히 명령했던 것이다 (딤전 1:4).
지금도 어두움은 빛에 가장 가까이 있다. 진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거짓이 있다. 우리가 잠시라도 경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진리 곁에는 항상 거짓이 있다.
인생을 걸다 (딤전 1:4)
우리는 무엇에 인생을 걸고 있는가?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고, 우리의 언어를 힘 있게 만들며, 우리의 행동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쓸데없는 것을 추구하는 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다. 아무런 유익한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을 논의하면서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런 위험이 접근하였던 것이다. 신화와 족보에 관하여 논쟁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써버리고 귀한 인생을 소모하는 불행한 일이 초대교회를 망치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신화와 족보가 무가치한 천착 (穿鑿)을 낳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신화와 족보는 부질없는 공상을 일으키고 무의미한 추측을 자아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은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변론이란 무익한 연구를 가리킨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소치인가? 게다가 신화와 족보가 결론 없는 연구를 야기 시킬 뿐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가?
사도 바울이 신화와 족보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초점은 "하나님의 경륜 (오이코노미아)"에 놓여져 있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경륜"에 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은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엡 3:2)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은 본래 비밀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비밀의 경륜" (엡 3:9)라고 불린다. 이 비밀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시간 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때가 찬 [시간의 충만의] 경륜" (엡 1:10)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엡 3:2; 골 1:25) 주어진 것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어진다 (엡 3:2; 골 1:25). 정리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경륜은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세우시고 시간의 세계에서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칙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은 누구든지 찾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게 되고 이해된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한다. "믿음 안에 있는"이란 말은 "믿음 안에서 발견되는" 또는 "믿음 안에서 인식되는"이라는 의미이다.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발견되지 않으며, 믿음 외에는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인식되지 않는다. 믿음 밖에서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경륜에 도달하는데 실패할 뿐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행동반경 안에서만 하나님의 경륜을 추적하고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신화와 족보는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그는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예정하시고 시간의 세계에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칙에 인생을 맡겼다. 하나님의 경륜이 사도 바울의 심장을 차지하고, 언어를 지배하고, 인생을 다스린다. 그에게는 사는 이유도 분명하며 죽는 이유도 분명하다. 사나 죽으나 사도 바울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룰 수 있다면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에 인생을 걸었다.
우리는 무엇에 인생을 걸고 있는가? 우리의 심장은 왜 뛰고 있으며, 우리의 육체는 왜 움직이고 있는가? 왜 우리의 몸에 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왜 우리의 입에서 말이 나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