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黃岳山)/ 산행 전기(前記) (2006. 5. 14/경북 김천시 직지사 파크호텔-제3구조단표지석-정상-운수암갈림길-운수암-직지사 경애 옆- 파크호텔 주차장/한국산하 모임)
*. ‘한국산하’ 황악산 모임을 앞두고 5월 14일, 한국산하 모임의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그 동안 한국산하로 인연하여 산행기로 또는 이름만 알고 있던 분들을 서로 만나 손을 잡아 본다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내 경우 처음 가는 황악산이라 그 마음은 더하다. 여기서 산행 후기가 아닌 산행 전기를 쓰고자 하는 것은, 요번에 만나는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분들에게 주고 싶은 나의 정성이라 생각하자. 글을 쓰는 사람이란 가보지 않은 곳도 가본 사람 이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푸르스트가 말했다. ‘慾望은 꽃 피우나 所有는 시들게 한다.’ 고. 그러나 이 말은 산행하는 사람에게는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욕망도 꽃 피우고, 소유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우리 산악인의 특권이니 말이다.
*.왜 황악산(黃岳山)이라 했을까
출처:한국의 산하
산을 대하면 이름부터 궁금해지는 것은 국문학을 전공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남보다 더 그런 것 같다. 황악산은 왜 황악산일까? 황악산이니까 황악산이지- 하는 대답보다 좀더 구체적인 세상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 ‘한국의산하’ 홈페이지에서는 황악산의 어원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렸고, 지도상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직지사의 현판을 비롯하여, 이중환의 擇里志(택리지) 등에도 황악산(黃岳山)으로 명기되어 있다. 전체적인 산세는 특징 없이 완만한 편이나 온 산에 수림이 울창하고 산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은 곳곳에 폭포와 소를 이뤄 그윽한 계곡미를 이루고 있다.
그림 출처:마등령 직지사 앞 매표소를 겸한 커다란 일주문에 쓰여 있는 ‘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란 현판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왜 학이 자주 찾아와서 이름 하였다는 황학산(黃鶴山)이 왜 황악산(黃岳山)으로 바뀌었을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악(嶽)'이 들어가는 산은 설악산, 월악산, 치악산, 운악산 등과 같이 암릉이 빼어난 바위산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위의 글처럼 황악산은 육산으로 산세가 유순하고, 두루뭉실하고 능선이 완만하며 골이 깊은 산으로 ‘嶽’(악) 자가 붙을 만한 산이 아니다. 거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황악산은 삼도봉(1.177m), 민주지산(1,242m)과 함께 백두대간[소백산맥]의 허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동으로는 영덕, 서로 서천, 남으로 남해, 북으로 강원도 홍천까지 똑같이 130km의 직선거리를 가지고 있는 중심 산으로, 1111.4km의 높이로 웅장하게 우뚝 서서 남북으로 신선봉(944km), 형제봉(1040km), 황악산, 백운봉(770km) 등을 주위에 거느린 웅장한 산이라서 큰 산 ‘嶽’(악) 자를 붙인 것이다. 그럴법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전의 황학산은 왜 항학산(黃鶴山)이라 불렀을까?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렸다고-.’라는 말 때문에 그렇겠지- 한다면, 학은 백학이 맞을 텐데 학 중에 ‘黃鶴’(황학)도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다음은 우리말 큰 사전[한글학회]에 나오는 설명이다. -황학(黃鶴): 전설에 나오는 누런 빛깔의 학. 황학이 들어가는 말은 우리나라에도 중국에도 많이 나온다. 서울 사직공원 뒤에 인왕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은 이름이 황학정(黃鶴亭)이요, 중국의 양자강을 조망할 수 있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누각도 황학루(黃鶴樓)다. 게다가 ‘黃’이란 한자는 누렇다는 뜻만이 아니다. 자전(字典)을 찾아보면 ‘山名 黃’, ‘地名 黃’, ‘馬名 黃’으로 산 이름, 땅 이름, 말 이름에도 黃(황)이란 글자가 쓰이고 있다. 산과 땅과 말의 색깔이 누레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신선 같은 학이 많이 찾아온 산'이라는 말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 왜 직지사(直指寺)라 했을까 전설에 의하면 직지사(直指寺)에는 세 가지 설의 유래담이 있다. - 아도화상이 경북 구미에 도리사를 지을 때였다. 손을 곧게 들어 손가락을 곧게 뻗어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 큰 절이 들어설 좋은 절터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 고려의 능여선사(能如禪師)가 직지사를 중창할 때에, 측량을 자로 하지 않고 손으로 쟀기 때문이다. - 불경 중 선종에서 나오는 말인 '直指人心 見性成佛‘(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위 세 가지 설 중에 손가락을 곧게 뻗어 가리켰다거나 자[尺] 대신 손의 뼘으로 쟀다거나 하는 말은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로 재미로 지어낸 말 같고, 그 중에 마음이 가는 것이 ‘直指人心 見性成佛’에서 유래하였다는 유래담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교리(敎理)로나 계행(戒行)을 생각하거나 닦지 않아도 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 아도화상(阿道和尙)과 능여선사(能如禪師) 사기(寺記)에 의하면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그 걸 역사적인 면으로 보면 석연치가 않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누구인가. 고구려 중으로 5세에 출가하여 어머니의 명에 따라 263년인 미추왕 2년에 신라에 와서 박해를 무릅쓰고 불교를 전파하던 스님이다. 신라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 준 공으로 미추왕으로부터 불교 전도를 허가 받고 흥륜사를 지었다. 그러나 미추왕이 죽은 후 박해를 피해서 땅굴을 파고 살다가 죽은 스님이 아도화상이다. 불교를 전파하던 불교를 신라에 전파하다가 죽은 순교자 이차돈보다 무려 160여 년 이전의 스님이다. 그런 시대를 살다간 스님이 직지사까지 짓는데 관여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란 말이다. 그래서 직지사는 신라말과 고려 초기를 살다간 능여선사가 중창하였다고도 하지만 창건하였다로 보는 이도 많다. 능여선사(能如禪師)는 누구신가. 고구려 왕건이 견훤과 패권을 다툴 때였다. 왕건이 팔공산전투에서 대패하고 황악산에 숨어 들었을 때 패군지장 왕건을 도와 준 분이 직지사의 능여스님이다. 이때 당시의 軍靴에 해당하는 2,000 켤레의 집신을 전해 주며, ‘말띠 해가 되면 큰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적인 덕담으로 위로 해준 스님이 능여선사다. 이로 인하여 왕건이 고려태조가 된 후 능여대사를 왕사(王師)로 삼고 직지사를 크게 중수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직지사는 1,6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古刹) 중의 고찰(古刹)인 것을 생각하고 절을 둘러볼 일이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다. 황악산은 학처럼 좌측에 남북으로 형제봉(1035m)과 운수봉(735m) 능선을 날개로 펴고 있는데,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이 문바위골과 운수골로 둘이 합수하여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능여계곡을 형성하며 흐르고 있다. 그 능여계곡의 ‘능여’는 능여선사를 기려 명명한 골짜기인 것이다.
*.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사명각(四溟閣) 직지사는 동국(東國) 굴지의 호국본산(護國本山)으로 수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해 내던 절이다. 따라서 그 많던 당시 43동(125동이라고도 함)의 건물이 임진왜란 때 다 불태워 버려서 천불전. 천왕문 자하문만 남았다. 그것은 임란 당시 승군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이가 사명당이었고, 그 사명당은 이 절에서 출가(出家)하고 주지를 역임한 스님이어서 왜놈들은 화풀이 삼아 적개심으로 방화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명각(四溟閣)이 직지사에 있는 것이니 둘러보되 꼭 사명대사의 영정을 보고 올 일이다.
![](https://t1.daumcdn.net/cafe_profile/img/d/y/k/c/133pe/25/f67a8d-176-f.jpg)
사명대사(四溟大師)는 누구인가?
이런 전설이 전하여 온다. - 이조 명종 때 여름이었다. 이절의 주지 신묵(信黙) 스님이 공양을 들고 식곤증으로 잠깐 눈을 붙였을 때였다. 절 앞 큰 은행나무 밑에 누런 황룡(黃龍)이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 이상하여 나가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비범하게 생긴 아이를 대리고 있어 절에서 하룻밤을 함께 묵게 하였다. 이 아이는 15~6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던 속명이 임응규란 소년이었다. 신묵 스님은 응규를 상좌로 삼고 선(禪)을 주어 불법에 귀의 하게 하니 이 분의 법명이 유정(惟政)이요, 법호가 사명(四溟)이었다. 사명당은 그 후 3년 뒤인 18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30세에 돌아와 스승의 뒤를 이어 직지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의 고향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에 사명당영당비((四溟堂影堂碑)가 있는데 나라의 큰 일이 날 때마다 몇 말씩의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같은 이야기가 표충사비에도 전하여 오고 있다. 그가 고향을 떠나올 때 지팡이를 꽂아 놓고 오면서,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있으리라' 했다는데 지금도 그 나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과의 일화로 이런 전설도 전하여 온다. -사명당이 왜장 가등청정을 만나러 진영으로 들어갈 때 수리(數里)에 걸쳐 양쪽에 기치창검을 세워 놓았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다음은 그때 가등청정과 사명당이 주고받은 이야기다.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그대 머리가 오직 보물이다.” “왜 그런가?” “너의 머리에 천금만호의 상이 걸려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는가?”
고대소설 ‘임진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사명당이 일본 사신으로 갔을 때 왜왕은 사명당을 큰 무쇠 막에 넣고 숯불을 피워 데워 죽이려 하였으나 문을 열고 나오는 사명당의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있었다. 사명당은 얼음 ‘氷’(빙) 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왜왕이 벌겋게 달군 무쇠로 된 말을 타라고 요구하였다. 사명당이 요술로 마른하늘에 비를 오게 하여 식히고 앉았다. 그 비가 그치지 않고 와서 왜국을 다 물에 잠기게 함에 비로소 왜왕의 항복을 받았다. 사명당은 매년 사람 가죽 3백장과 불알 서 말씩을 조공으로 바치도록 하고 전승장군이 되어 돌아왔다. 황당무계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 민중들이 임진왜란에 당한 왜놈에 대한 적개심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 그밖에 유심히 보아야 할 것들 우리나라에는 생기처(生氣處)로 유명한 곳이 몇 군데 있다.
'기(氣)'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만물생성의 기원이 되는 힘, 생활 활동의 힘이다. 원기, 정기, 생기, 기력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기가 퐁퐁 솟아나온다는 곳을 생기처(生氣處)라고 하는데 태백산 문수봉,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황악산 직지사가 그 중에 하나다. 예로부터 다친 짐승들이 와서 생명력을 충전하고 가는 곳이 직지사라 한다. 그래 그런가. 직지사의 약수정은 지리산 뱀사골, 강원도 황지못 등과 함께 한국의 명수로 유명한 곳이니 구기 한 잔은 빼놓지 말고 마시거나 수통에 담아올 일이다.
사진 출처: 산그늘 또 구경할 것은 1,000년 묵었다는 싸리나무 기둥으로 만들었다는 일주문(一柱門)도 그렇지만, 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이들이 있다면 자세히 보고 와야할 곳이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물이라는 직지사 대웅전을 돌아보고 왼편으로 사명각(四溟閣)을 지나면 비로전(毘盧殿)이 있다. 이 비로전에는 천 개의 불상을 모시고 있어서 천불전(千佛殿)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1,000 개의 불상 중에 옷을 벗고 꼬치를 들어내고 있는 동자상을 먼저 보는 사람은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요즈음은 대자대비한 불가의 일이라 황금 칠인가를 해 놓아 찾기 쉽게 한 모양이다.
다가오는 5월 14일은 임도 만나고 뽕도 따는 날인가 보다. 한국산하의 임들도 보고, 황악산도 직지사도 보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