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珍島) 여행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입니다. 그래서인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섬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고, 대부분 200-400m 안팎의 나지막한 구릉이며 땅이 기름져 농사가 성합니다.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번창해서 한때는 옥주(沃州)라고도 불렀습니다. "한 해 농사지어 삼년을 먹는다"라는 말이 아직까지 내려올 정도로 물산과 인심이 넉넉한 고장입니다. 예부터 제주의 식량은 진도에서 댔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진도는 예향이면서 워낙 외진 곳이기에 유배지로도 활용되었고, 군사적 요충지라서 군사 관련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 말 원나라의 침입에 끝까지 항거한 삼별초의 근거지인 용장산성과 남도진성, 삼별초가 세운 임금 왕온의 묘소, 지도자 배중손 장군의 사당과 동상 등 삼별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몽고군은 반란을 도왔다는 이유로 진도의 남자 2만여 명을 원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이후 조선 초기에도 숱한 왜구들의 침입에 남자들이 죽어갔고 임진과 정유년의 전쟁은 남자들의 씨를 말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산한 세월을 어렵게 버텨온 진도의 여성들은 그 한스러운 삶을 문화로 승화시켰습니다. 농사도 여자들의 몫이 되었고, 남성 중심 문화의 핵심인 상사(喪事)에도 진도에선 여자들의 역할이 중심적입니다. 상여도 여자들이 메고, 상엿소리며 씻김굿을 하는 것도 여성입니다.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 등 놀이문화를 만들고 지켜온 것도 여성들입니다. 진도에서는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씻김굿, 다시래기 등 네 종목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또 진도 만가와 북놀이가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되어 있는 것도 진도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들이 그 ‘신명’의 뒷면에 어려 있는 것입니다.
영화 ‘명량’의 현장 명량해협
영화 ‘명량’의 실제 전장인 울돌목은 바다가 운다고 해서 명량(鳴梁)으로도 불립니다. 해남군과 진도군을 잇는 협소한 해협의 물길은 동양 최대 시속인 11노트에 이르며 젊은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물소리가 크고, 거품이 일며 물이 용솟음쳐 배가 거스르기도 힘든 곳입니다. 기념공원에는 울돌목의 그 거센 물결을 느낄 수 있도록 스카이워크가 조성돼 있으며, 시원하게 펼쳐지는 울돌목의 풍경은 가슴을 확 트이게 합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왜선 133척을 맞아 12척의 병선으로 전투를 벌여 31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격퇴시켰습니다. 10배 이상의 적선을 제압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울돌목의 거센 조류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투 당시 북서쪽으로 흐르던 해류가 남동쪽으로 바뀌면서 일본 함대는 대열을 잃고 좌충우돌하였습니다. 이때 충무공은 앞서 바다 밑에 설치해 둔 철쇄를 들어올려 적선들이 여기에 걸려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해상권을 되찾았고, 명량해전은 세계 해전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대승으로 기록됐습니다.
벽파진(碧波津)
고려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이기도 한 이곳은 예부터 명량해협의 길목이며 오랫동안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이순신이 명량에서의 전투를 앞두고 16일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포구 뒤편 낮은 돌산 꼭대기에 이충무공전첩비가 서 있습니다. 비석을 거북이 떠받치고 있습니다. 비문에 “예서 머무른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며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라 적혀 있습니다. 달밤에 섬 그늘을 따라 침범해온 왜군을 향해 지자총통이 불을 뿜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충무공 전첩비는 명량해전의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당당히 서 있습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당시 숨진 군사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 진도 도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입니다. 높이 11m, 무게 9톤에 이르는 이 비석은 국내 곳곳에 세워진 이순신 비석 중에 규모가 가장 큽니다. 규모도 규모지만 비석 위쪽에 세심하게 새겨 넣은 용 문양과 큼지막한 거북 받침대도 인상적입니다.
쌍계사
857년(신라 문성왕 19)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 불렀습니다. 1697년에 건립된 대웅전과 대웅전의 석가모니 목조삼존불상(유형문화재 제221호)을 비롯하여 시왕전 목조지장보살상(유형문화재 제222호)을 비롯하여 천왕문, 우화루, 진설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00년쯤 된 조선 향나무를 비롯하여 벚나무, 감나무 등 제법 큰 나무들 사이로 넓적넓적한 돌을 깔아 길을 내놓은 대웅전 앞뜰이 인상적입니다.
쌍계사를 감싸고 있는 산은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입니다. 예전에 산 위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화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상록수가 우거진 자연림이 울창한 곳입니다. 쌍계사 옆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첨찰산 상록수림 가운데서도 가장 무성한 지대가 나옵니다. 골짜기를 따라 동백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참가시나무, 참식나무 등 상록활엽수와 여러 가지 덩굴나무가 대낮에도 어둑어둑할 만큼 우거져 신선한 공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이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10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운림산방(雲林山房)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 1808-1893)이 만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입니다.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선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추사와 막역한 사이이던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33세 때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받은 후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한 삼절(三絶)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그에게 소치라는 호를 지어 주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극찬할 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김정희가 죽자 고향으로 내려와 운림산방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운림산방은 허련의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등에게 계승되었습니다. 또 남화의 대를 이은 먼 핏줄 의재 허백련 등을 배출하기도 해 한국 남종화의 성지로 부릅니다. 운림산방의 화실에는 허씨 3대 명가의 복제 그림이 전시돼 있고, 기념관에는 소치의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연기와 안개가 구름숲(雲林)을 이루었다는 이곳은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1908∼1987)이 1982년 복원했습니다. '운림'은 소치가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던 원나라 화가 예찬의 호이기도 합니다. 산방 앞의 연못과 뒤편의 생가를 둘러싼 동백나무,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목련, 매화나무, 모과나무, 팽나무, 꽃사과나무, 목서 등 다양한 수목이 수려합니다. 운림지(雲林池) 연못 한가운데 돌로 쌓은 작은 섬에는 소치가 직접 심었다는 배롱나무(백일홍)가 있고, 물 위에는 수련이 떠 있습니다.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다'라는 꽃말을 가진 배롱나무는 추사를, 차로 마시는 수련은 다성(茶聖) 초의를 기리는 의미라고 합니다.
용장산성(龍藏山城)
몽고군에 항복한 고려 정부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기지가 있던 곳입니다. 삼별초는 고려 최씨 정권의 사병과 같은 부대로 무신정권 기간 권력 유지의 핵심 기반이었습니다. 강화도로 천도해 30년 동안 몽고에 맞섰던 고려는 몽고에 대하여 강경 입장을 가지고 있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결국 항복을 하고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돌아가는데, 삼별초는 끝까지 남아 몽고군에 대항하기를 주장합니다. 해산 명령을 받은 삼별초는 이에 저항하며 용장산성으로 근거지를 옮깁니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추대한 삼별초는 이곳에서 성을 새로 짓고 진도 인근의 해상권을 장악하며 고려 정부와 몽고군에 대항합니다. 하지만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아홉 달이 지나지 않아 여몽연합군에 패해 제주도로 옮겨 가니 용장산성에 머문 시간은 잠시입니다. 지금은 행궁 터와 석축만 남아 있습니다. 삼별초 이전부터 있었던 용장사에는 고려 석불좌상만 남아 있습니다. 홍보관에는 삼별초와 용장산성에 관한 모형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세방낙조 해안일주도로
세방낙조의 특징은 징검다리처럼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에 있습니다. 섬과 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해가 다섯 가지 색깔로 하늘을 물들여 ‘오색 낙조’로도 불립니다. 양덕도(발가락섬), 주지도(손가락섬), 장도, 소장도, 당구도, 혈도(구멍섬), 가사도 등이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바닷가 길이 밀도 높은 일몰을 선물하는데, 세방낙조전망대는 바다가 코앞이라 일몰 명소로 인기를 끕니다. 중앙기상대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선정했습니다. 해질 무렵 섬과 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일몰의 장관은 주위의 파란 하늘을 단풍보다 더 붉은 빛으로 물들입니다.
전라도를 에워싼 다도해의 낙조는 남도 소리 가락을 품은 듯 진합니다. 구성진 낙조의 진수는 진도 지산면 가치리에서 가학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곳의 세방해안일주도로는 다도해의 아름다운 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다도해 드라이브 코스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습니다. 혈도는 구멍 뚫린 섬이라 하여 공도라고 불리기도 하며 구멍을 통하여 다도해 전경을 바라보면 신비하고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광대도는 바다 가운데에 괴석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앉아있는 모양이 마치 적을 응시하고 있는 사자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사자섬이라고도 부르며 숲과 기암으로 어우러진 풍경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