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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보는 민족의 기원
21. AD 1-2 세기에 나타난 두 부족
a. 선비
1-2세기는 중원에는 漢(前,後)이 만리장성 이남을 점령하고 있었고 그 위로 흉노와 선비가 존재하였습니다. 이들 북흉노는 漢과 선비의 협공으로 세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ad. 87년 93년 선비가 흉노의 두 선우를 처단하면서 선비가 맹위를 떨치게 됩니다. 선비의 대표인 6족의 성씨를 보면
모용부 (前燕, 後燕, 西燕, 南燕) -- 모용부에서 후에 토욕혼도 갈라집니다.
걸복부(홀복부) (乞伏部) (西秦)
단부(段部)
탁발부(拓跋部) (代, 北魏)
우문부(宇文部) (北周)
독발부(禿髪部) (南涼)
후에 唐나라를 세운 李淵도 선비족계열의 北周의 귀족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선비족이었을 확율이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연의 아들 이세민에게 秦王의 칭호를 내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과 秦과의 연관성 또한 암시하고 있습니다. 成漢 - 前秦 - 後秦 을 세운 파조족의 浦씨(부씨)나 이를 이은 선비 걸복부의 西秦등의 국명을 생각할 때, 이들은 단지 그 지역에 있었던 국명을 따른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적, 혈통적 친연성을 생각해 국명을 지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걸복부는 선비족이라 하며, 파조족은 티벳의 저족/강족이라 하기도 하는데, 당시 그들이 처음 발원하며, 살았던 지역이 선비족 지역이었으며, 저족지역이었을 뿐, 그들의 뿌리는 秦과 관계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걸복부는 서진을 건국하고 감숙의 金城 으로 도읍을 정하게 됩니다.
선비는 동호를 기반으로 한다고 하나, 남쪽의 오환과 그 밖의 투르크, 퉁그스 계통의 연맹체였다고 합니다. 1세기 때는 후한과 함께 북흉노와 전쟁을 벌여 그들을 몽골지방으로 쫓아내게 되고, 2세기에 단석괴가 등장하면서 세를 불리며 강력해졌다고 합니다. 이때 세를 불리기 위해 합쳐지게 된 투르크, 퉁그스 계열이라는 이들이 바로 천산을 통해 감숙까지 밀려들어오면서 곳곳의 토착세력과 합류하게 된 천축/월지세력이 아닐까 합니다. 중천축국의 걸리질씨(찰리씨) / 박트리아계통을 상징하는 듯한 걸복부, 파르티아계통을 상징하는 듯한 파조족 등 이들이 당시에 티벳지역에 살면서 티벳족과 섞여 있다 해서 저족이라 부르거나 선비와 섞여있다 해서 단순히 선비라 부르기에는 너무 그들의 정체성을 단순화시켜버리는 시가이며, 실제로는 좀더 복잡한 내부사정이 있다고 봅니다. 모용씨는 본인들과 관계가 깊은 燕을 지속적으로 국명으로 사용합니다. 이들 선비족의 모용씨는 신라의 모진 (법흥왕)과 관계지어 법흥왕이 같은 모씨이며 선비족 출신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분도 계시지만, 慕 라는 글지의 옛 발음은 mhā입니다.
역시 "(음)워" 와 비슷한 발음으로써 모용은 "워연"이란 발음과 유사합니다. 후에 그들의 국명이 되는 유연과 비슷한 발음입니다. 그들의 성씨가 모씨라기 보다는 "워연"이란 성씨자체가 그들의 성씨이고 "모/워"자만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고 봅니다. "워연"이란 발음에 그들이 원하는 뜻글자를 선택하여 "연"을 사랑한다는 성씨가 아닐까 합니다. 같은 형태의 음차성씨가 법흥왕의 모진/워진, 이며 청나라의 아이진 입니다. 법흥왕은 秦을 사모한다는 뜻글자를 선택한 것이고 청나라 황성은 新을 사랑한다는 뜻글자를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둘다 같은 발음인 "워진", 즉 애신 씨가 되는 것입니다.
법흥왕은 그들의 조상, 秦을 사모한다고 성씨를 지은 것이고, 청나라는 그들의 조상 新羅를 사모한다고 지은 것입니다. 탁발씨 같은 경우 하남/하북 지역에 지속적으로 보였던 代족을 계승하는 代國을 세우고 후에 北魏를 세웁니다. (魏나라 조조/하후씨의 처가라는 인연도 있지만, 이들이 원래 같은 뿌리였기에 그들의 통혼도 가능했지않나 합니다.) "탁"이란 발음 자체가 代의 옛발음 Ł(h)ǝ̄uks 과 같은 발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걸복(걸리질)씨가 秦을 세운다던지, 오르도스지역에서 다시 晉/秦/魏 등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이들지역에 있던 代족을 선비족의 탁발부가 승계한다던지 하는 것은 그냥 국명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들이 혈통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代의 옛 발음 자체가 Ł(h)ǝ̄uks 으로써 오르도스/언덕/아사달 문명의 축을 만드는 代족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鬼/魏 족 + 代족)
b. 파저족.
1-3세기의 중원은 後漢 - 삼국 (위,촉,오) - 晋 으로 이어지는 시기입니다. 북방으로는 북흉노가 무너지고 선비가 발원하는 시기가 되겠습니다. 인도북부의 1세기에는 월지/천축/쿠샨이 펀잡지방 등에 위치하고 소월지가 감숙지방까지 퍼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前秦, 後進, 西秦을 세웠던 파조족도 지속적으로 秦이란 국명을 썼던 것으로 보아 이들 세력과 연관 가능성이 있기에 설명해봅니다. 우선, 前秦의 전신인 成漢국은 저족계열 파저족(巴氐族)출신 이웅이 건국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웅의 아버지 이특은 파저족 출신 무장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298년 감숙성에 기근으로 천수강 유역에 많은 유민이 발생하였고 이들의 수장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漢中(옛 漢의 중심지)으로 이동하는 것을 西晉이 저지하기위해 蜀으로 유도하였다합니다. 이특은 후에 독자적인 세력임을 연호를 발표하여 독립 세력임을 선언하고 이웅 (재위304-334) 은 국명을 大成(옛발음 = thāts-deŋ)이라 이름 짓고 연호를 建興이라 하였으며 후에 이수가 漢이라 명하였다합니다. 그래서 成漢이라 불리기도 하고 前蜀, 成蜀, 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298년 감수성 기근이란 기후에 관련되어 이동한 이유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들은 AD 280 년에 건국하는 굽타왕국 등에 의해 감숙으로 밀려난 천축국 유민이 아닌가 합니다. ( 이들은 감숙에 6국의 유민촌을 이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大成국을 만들고 후에 漢이라고 하며 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기록입니다. 成漢은 AD347 東晉에 의해 멸망합니다.
大秦(前秦)을 세운 부견 감숙성에 살던 저족으로 알려져 있지만, 後趙의 용병으로 참여하면서 하북지역으로 강제이주 당했다가 AD 350년 장안에서 건국한 부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한과 전진 모두 3세기-4세기에 감숙 저족 지역에 기반을 둔 부족이지만, 그 지역에 발원했다고 토착저족이라 섣부르게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당시 정황은 인도북부에서 밀려온 천축국 유민들이 감숙의 소월지와 합해지는 양상을 보이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천축국 유민들이 선비족과 저족에 섞여 살다가 후에 본인들의 뿌리, 秦/晉나라 유민들과 함께 옛 선조의 나라 명을 사용하여 건국을 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부견의 원래 성씨가 浦씨이지만, 부견의 출신 부족인 乞伏은 중천축국의 걸리질(찰리씨)와 박트리아계를 연상하게 합니다. 부견의 前秦은 당시 중원과 전혀 교류가 없던 신라와 유독 친하게 지냈던 나라로써 부견과 신라 사신과의 대화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부견과 접촉할 당시 신라는 내물 마립간 시기로 (진서에 이르길, 부견이 "그대가 말하는 해동의 일이 전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물으니 "중원에서 시대가 달라지면서 名號가 달라짐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 라고 대답했다합니다.)
이것을 두고 신라의 국력이 옛날에 비해 그만큼 신장하고 제도 정비가 잘 되었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문장을 잘 보면, 부견의 前秦은 이미 옛날부터 신라의 상황을 잘 안다는 뉘앙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원과 거의 왕래가 없는 신라를 안다는 것은 두 세력이 전부터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즉, 이들이 초기 신라세력과 동질 세력이었는데 마립간 세력이 들어오면서 보낸 사신이 전한 소식으로 미루어보아 말과 풍속이 다소 틀려졌음에 이를 궁금히 여기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즉, 이러한 포/걸 세력도 소월지 혹은 천축/월지 세력으로써 이들도 중원의 나라들, 혹은 선비 등의 일원으로 감숙에서 요동지방으로 이동했을 가망성을 생각해봅니다. 前秦의 세력들은 이미 하북에 그들의 정착지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초기세력과 前秦세력이 더 동질세력이며, 마립간세력의 경우 아마도 초원 실크로드의 천산 부근에 더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 지역의 쿠루간등의 적석목곽분의 영향을 더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참고로 소월지의 경우, 기련산 이남지역으로 옮겨가 靑海城의 강인들과 생활하다가 다시 감숙성등으로 이동하여 17개의 부락과 난랜 병사 9000명을 보유하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금성에 주둔하던 병사 중에 소월지 병사가 많았다고 하는데 바로 이들이 成韓과 秦을 세우게 되는 파조족 전진족, 걸복부와 관계있는 이들이 아닌가 합니다.
22. 금성, 伊金霍洛基, 서신라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걸복부는 西秦을 세우고 금성에 도읍을 세우고 금성왕을 자쳐 합니다.(385년) 이는 이들 秦 세력이 金城 이란 명칭과 관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금성은 지금의 간수성 란저우(蘭州) 를 말하며 이곳은 漢나라 때는 금성현, 晉나라때 금성군이라 불리었습니다. 이들 秦의 대를 이은 세력들의 근거지가 바로 감숙, 오르도스로써 이곳에 마치 신라의 명칭을 보는 것처럼 금성이 존재하고, 남산이 존재하며 大丘도 존재합니다. 말씀드린 바대로 秦의 최초 조상 비자가 처음 살던 곳이 犬丘 (섬서성 흥평)라고도 하고 大丘라고도 하는데 이는 명칭에 犬자를 굳이 쓰지 않았을 거란 생각해보면, 후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大자를 犬자로 변형시켰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외에도 중국내 대구/견구 라 하면 몇가지가 나오는데..모두 이들 세력과 관계있는 곳이라고 봅니다, 감숙성의 대구는 秦이 땅을 하사받고 황제가 정해준 도읍지(秦邑) 이후로 본인들이 스스로 정한 첫 번째 도읍입니다.
犬丘: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 서 남쪽
犬丘 :하남성 영성현 서북쪽
犬丘 :산동성 조현 북쪽에 위치
이들 사카세력은 하∙은∙주/아사달 시절부터, 하남 섬서에 삭방 (朔方) 이란 이름으로 존재하였던 것 같다고 추측했었고, 三晉과 秦을 거쳐 천축국의 사카를 거쳐 신라에 이르기까지 대구 란 이름이 지속적으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한에서 월지국, 사카세력에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성씨를 보면 金, 眞, 昔, 朴, 蘇我, 魏 씨 등이 있을텐데, 특히 신라에서는 월지/알지세력과 석씨세력, 마립간세력, 법흥왕이후의 많은 왕들을 나중에 金씨로 혼용되어 불리기도 하여 이들의 관계에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만 결국 이들은 월지/천축국 한뿌리로써 후에 정권을 잡은 김씨 왕족이 월지 眞씨를 비롯하여, 석(사카)씨, 박(박트리아 사카)씨 모든 천축국 출신의 성씨를 김씨로 기록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의 愛新씨도 김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신라의 월지/사카세력과 김씨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예전의 글에서 애신/아이진 의 발음이 altyn, altun ( 알타이어로 金) 과 관계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신라의 애신씨의 경우 월지/사카와 좀 더 구체적인 관계성이 있는 듯 합니다. 문무왕비에 支와 宗의 만남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왕이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하며 이름에도 宗자가 들어가는 법흥왕의 경우 이름이 慕秦, 혹은 金原宗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서로 닮은 구석이 없는 두 이름이 모두 법흥왕의 이름이라 하니 해석할 길이 없어 보이지만, 신라인들의 독특한 이름들을 음차하기 위해 "이두"라는 시스템까지 만들었던 그들이라 생각해보면 두 이름사이에는 분명 관계가 있다는 전제를 하고 해석해봅니다. 전 글에서 말씀 드린데로, 역시 慕의 옛 발음은 mhā 로써 "뫄"라고 발음 할 수도 있지만, "(음)와"라고도 발음이 가능하다는 추측입니다. (예를 들어드린대로 선비족 慕容이 그들의 국명 유연에 보듯, "워용"이라고 발음했을 가능성이 큼) 즉, "워진/慕秦"은 秦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그들의 성씨발음을 음차한 것으로 봅니다. 이들의 워진씨를 가지고 김원종에서 보듯 "원+종" 과 비슷한 발음의 이름을 정하고 성을 김씨로 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宗이란 글자발음이 秦을 뜻했던 거라면, 문무왕비에서의 支는 워/慕라는 발음과 관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 慕 -> 支 , 秦 -> 宗 ?)
왜 이들의 발음이 워진이 된거고 이들을 金씨라고 읽는 걸까요. (만주족의 예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신라의 박석김씨는 천축국시절부터, 월지국과 사카국의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월지의 魏/貴씨와 사카(seres/秦)의 昔/朴/金의 세력의 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月)支와 秦 이 혼합되며 신라가 탄생하였습니다. 이런의미에서 魏 + 秦, 즉 위진씨가 탄생하였고, 이들 천축세력을 통칭하여 金씨라고 일컬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 전에 해석했던 알틴과 애진과의 관계를 보면, <魏/爲/아르/오르>... 모두 크다 라는 뜻이고, <틴/진>은 金이란 뜻이 합해져 아르진/알틴을 김씨라 했을 듯 하다고 해석해 드린 적이 있는데, 개념은 좀 바뀌었습니다만, "알"에서 비롯된 魏씨와 <朴/昔/金>을 싸잡아 秦/宗 이라 표현하고 이들 위진/애진 씨를 金씨로 통합했다는 개념은 일면 상통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신라초기에 석탈해가 월지(알지)세력과 함께 들어왔다는 기록처럼 애초부터 벌써 사카와 월지/알지와의 만남이 있어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사실은 오르도스 부근에 伊金霍洛基 (Ejin Horoki) 란 지명이 나오는데 몽골/알타이식 발음인 듯합니다만 "애진 호라키" 라고 읽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霍는 "빠를 곽"이라고 읽기도 하지만 "고을이름 사" 라고 읽기도 합니다. 즉, "이진사라키/애진사라키" 라는 발음이 가능한 지명입니다. 바로 이곳에 천축에서 흘러들어온 월지세력과, 사카세력의 연합세력이 천축시절의 이름인 seres/sereki 라는 명칭을 덧붙여 에진사라키 라는 지명을 만들어 낸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또 이들이 전 글에서 말했던 成漢이나 前秦의 세력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지역의 몽골발음을 후에 따라한 중국에서는 현재 Huoroki 라고 읽나봅니다만 일본에서도 신라를 항상 siraki 로 발음해왔고 기록에도 秦支 라는 표현이 가끔 나오므로 신빙성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다. 감숙, 오르도스는 이들 월지/사카세력에겐 매우 역사적 의미가 깊은 장소입니다. 기원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지역으로써 AD 2-4세기에 이곳으로 모여들었던 천축유민세력은 소월지와 합치면서 나름 강력한 세력을 구축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소월지세력은 금성에 17개의 부락과 9000의 날랜 병사를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천축+ 소월지세력은 이처럼 이곳에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후에 大秦계열( 前秦,後秦,東秦,西秦)등을 세우는 발판을 만드는것으로 보이며 후에 신라 편에서 설명하겠지만, 이들이 바로 법흥왕세력과 동질세력이 아닌가 합니다. 중원을 경험한 이들세력이 후에 신라에 합류하며 최초로 왕을 표방하며 秦을 조상으로 여김을 당당히 밝히는 워진/애진 김씨의 법흥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이곳에 세워지는 大秦은 351년에 부건에 의해 건국되며 후에 걸복씨의 西秦 431년까지 계속되다가 결국 이들은 北魏에 병합되게 됩니다. 신라의 216년도까지의 천문기록을 보면 양자강 상류부근에 위치한것으로 나오다가 787년 이후엔 한반도로 나온다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입니다. 혹자는 중국의 기록을 차용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중원 세력 상당수가 신라와 동질세력이었고 천축국이 천문으로 유명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전진세력 또한 천문을 관측해왔던 높은 기술력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하여튼, 이 사실은 신라에서 천문을 기록하는 세력이 216년까지는 양자강 상류에서 기록을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787년 이후에 기록을 재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건의 전진의 前身인 파저족의 成漢 국은 처음에 成국이라고 불리다가 漢이 되었고 이들을 蜀 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이들이 단지 蜀漢에 가깝다하여 촉이나 한으로 불리운 것이 아니라 이들 알타이/사카 연합체인 漢세력과 관계가 있었기에 이렇게 불리웠다고 생각합니다. 成은 옛 발음으로 deŋ이라고 불리우며 (천축의 龍城국에서 봤듯 언덕 龍자의 뜻과 함께 연덴 이라고 추측했었습니다.) 漢이 건국되었던 섬서, 하북의 오르도스/언덕과 관계성은 이미 말씀드렸었습니다. 문무왕비에 支와 宗에대한 언급 외에 星漢왕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成漢국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 바로 성한국 시절에 에진시라키 라는 명칭을 만들며 애신 씨에 대한 자각을 했던게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문무왕의 15대 선조가 성한왕이라고 나오는데, 成漢국의 건국연도가 304년이고 문무왕이 태어난 626년도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15*20 = 300년, 즉, 얼추 300년대가 성한왕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간적 힌트도 문무왕릉비에 나오는데, 바로 秦伯의 터전이라는 대목도 나옵니다. 진백은 바로 秦나라 흥성의 터전을 쌓은 진목공을 뜻하는 것으로 그저 秦과 신라의 관계성을 암시한다고 해석해왔습니다만, 바로 이들 성한/진 나라들이 진목공이 건국한 터전의 나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한국의 건국자는 李씨인데 伊金霍洛基에서 보듯, 魏씨의 후예로 李 혹은 伊 라는 발음을 음차음으로 썼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경주 李씨를 보면 신라 육촌 중의 하나로써 신라 기본 성씨라고도 나오죠. 李시의 시조가 신라 6촌중 양산촌의 촌장 은평왕 "알평" 이라고 나옵니다. 즉, 아르/오르에서 魏가 나온 것처럼 역시 李씨도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부건의 원래 성씨는 浦씨로써 이들 또한 신라/가야와 관련 있는 성씨라면, 후에 浦上 8국과도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도 해봅니다.) 대진의 부견세력은 감숙에 살다가 하북으로 후조에 의해 용병으로써 옮겨졌다가 장안에서 351년에 나라를 건국합니다. (이미 한반도 정세는 하북시절부터 잘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西秦을 건국한 부견의 부하였던 걸복씨의 경우 감숙에 살았었지만, 선비족의 일원이 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진은 431년에 북위에 흡수되게 됩니다. 즉, 초기 감숙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다가 3세기부터 趙나라의 영향권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후 전진/동진/서진의 기간동안의 천문기록은 가지고 있지 못했던 그들의 일부세력이 법흥왕 514년부터 다시 천문기록을 재개 하는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즉, (삭방 -진시황의 秦-천축/간다라-(전진)-신라)로 이어지는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경로가 사실이라면, 서신라로 표현이 옳바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들의 세력이 금성이 위치하던 감숙, 오르도스, 양자강 상류 등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23. 삼한의 정체성
이들 천축/월지세력이 티벳고원을 뺑 둘러 천산을 통해 돈황을 거쳐 바로 발해만 요동, 요서, 산동 등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 위치에서 또는 천축국에서 나타났던 나라들이나 부족들을 보면 이름에 일정한 관계성을 볼수가 있습니다. 일단 발음으로만 보자면, 마르가르(마한, 말갈), 다르가르(돌궐, 진한), 고가르 (고구려), 감숙에는 후에 위가르 (위구르)가 나타납니다. 마르가르와 다르가르는 우리에게 익숙한 마한과 진한의 발음입니다. 위구르는 신라편이나 倭편에서 설명이 더 될 것입니다만, 마립간 세력과 동일 세력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가르는 역시 고구려 편에서 설명이 나옵니다만, 고구려의 핵심세력은 부여족이 아니라 魏/사카 세력이 아닌가 합니다.
이들 부족들은 하북, 요동/요서, 만주지역에서 발원한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것은 바로 삼한이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이미 설명드렸던 馬의 발음이 mra에 가깝고, 魏도 ngwei 에 가까운 것을 보면 서로 같은 개념을 다른 발음을 표현했을 거라 말씀드렸었습니다. ( 음-라, 음-와, 응-위) 특히 이들 삼한이 이곳에 형성된 시기가 後漢이 힘을 잃어가는 1세기-2세기 사이라고 보는데, 이곳에 있었다는 漢4군은 위만조선을 점령하고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조선의 옛 땅에 낙랑이 있었고 그곳이 바로 유주지역에서 요령의 갈석산부근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의 영역은 하북에서 요령이었고 이들을 점령하고 만든 군현이라 한다면, 당연히 조선지역에 군현이 세워져야 정상이므로 요령지역이 바로 조선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서의 기록상 하북에서 요령을 옛 조선인 낙랑의 땅이라 말하고 있는데, 다만, 그 지역에서 유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한반도 평양에 주로 낙랑의 유물이 나온다하여, 기록을 무시한 채 한반도 평양을 한사군의 위치로 산정해온 게 이제까지 한국사였습니다. 한사군은 요령의 조선 땅에 세워진 것이 맞으리라 생각하며, 거기서 밀려 한반도로 넘어온 조선유민들, 특히 낙랑세력이 평양에 낙랑을 지속시킨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시기에 낙랑을 비롯한 조선의 유민이 대거 한반도로 들어오고, 결정적으로 삼한도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조선인들의 주요무대가 요령/하북에서 한반도로 본격적으로 옮겨졌음을 의미합니다.
마한의 월지국은 익히 아시다시피 천축5국/대월지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들이 인도북부에서 이동하여 잠시 타클라 마칸에 머물다가, 다시 요령으로 들어와 주변 세력을 병합해가면서 일부는 말갈의 세력으로 자리 잡으며, 월지국을 비롯한 나머지 세력들은 마한으로써 한반도로 들어옵니다. 다르가르/돌궐은 삼한의 세력 중에서도 辰세력을 의미합니다. 辰은 알려지다시피, 기자조선의 준왕이 韓의 땅에 나라를 세우며 韓왕을 자처하는데, 후에 이들을 辰國이라 고친다고 합니다. 이는 초반에 기자조선 중심의 韓왕을 자처하다가 나머지 魏/韓/조선 세력을 어우르는 辰 (해/달을 모두 포함하는 별이란 뜻) 이라 칭한 것이라 해석하였습니다. (참고로 朝의 옛 발음은 dhraw 입니다. "다르"에 가깝습니다.) 역시 삼국사기엔 진한이 조선유민으로 이루어져있다고 기록됩니다. 또한 이들이 편두를 하는 부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원의 편두의 문화를 따라가 보면, 바로 산동성 근처의 대문구 문명(기원전 4100-2600)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이 바로 새토템, 해숭배, 편두/발치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소호금천과 관계있는 유물이라 보고 있고 상나라 등 동이계열이 이에 영향을 받았다 보고 있습니다. 청나라의 만주원류고를 보면 만주지역에서도 가끔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알타이의 아사달국에 기자세력이 들어가 조선을 세우게 됩니다. 이들 조선국은 편두의 습성을 가졌을 것으로 봅니다. 이 풍습이 이어져 천축/월지국의 쿠샨인들도 편두를 하고 있습니다. 쿠샨이 바로 貴/鬼方씨에서 비롯되었다 하는데 이들이 바로 상/은나라의 후손이기에 편두 풍습이 있었다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또 기자 또한 편두 세력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기자조선에서 이어져 韓왕이였던 조선준왕을 거쳐, 천축국을 거쳐 진한으로 내려온 세력들은 지배층에 편두의 습성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쿠샨계통의 편두는 조선계열이라기 보단, 상나라에서 나온 鬼方에서 바로 내려온 전통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이들 진한세력에 秦인들이 많이 포함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만, 이 이유는 秦나라 시절 바로 옆 나라인 三晉의 韓에 秦유민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으로 봅니다. 기록으로 보아도, 辰韓에 노역을 피한 秦인들이 대거 몰려가 살았다고 나오는데, 중요한점은 秦과 辰韓은 동일 시대의 나라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秦이 망하고 辰韓이 세워진 것이며, 그러기에 당시 秦인이 몰려가 살았다는 곳은 辰韓의 전신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만약 辰韓이 처음부터 요령에 있었던 거라 가정한다면 노역을 시키는 일반 백성일 뿐인데 굳이 秦語를 쓰는 서역의 秦본토인을 요령까지 데리고 갔을리가 만무했을 거라 봅니다. 쉽게 그 지역 토착민을 썼겠죠. 秦人이 몰려가 살 수 있는 곳은 秦의 본토와 가까운 곳이어야 일반 백성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韓의 지역이 여러 의미에서 논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마한과 진한의 정의는 내려졌습니다만, 변한이란 무엇일까요. 변한은 弁자에서 보듯, 꼬깔모자를 상징하고 있고, 이국적인 용모의 기록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꼬깔모자라하면, 쿠샨인들이거나, 스키타이계통, 박트리아계통을 의미합니다. 즉, 박트리아를 점령하여 혼혈이 많이 진행되고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카인들이거나, 역시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쿠샨인들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시아의 모습과 풍속을 좀 더 유지하고 있는 마르가르와 다르가르와 틀리게 아직 덜 토착화가 된 상태인거라 봅니다. 특히 신라의 박혁거서간은 박트리아를 의미하며, 석탈해가 이를 점령한 사카족이라고 보면, 신라는 변한에서 왔다는 말이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 봅니다. 또 백제편에서 설명하겠지만, 백제가 결국 월지국의 영향권아래 있게 되므로 월지국/사카에서 출발한 신라가 백제에서 왕이 나왔다 라는 말도 설명이 되는 대목입니다.
지금은 가야세력이 변한과 동일하게 해석되고 있으나 아마도 가야세력들은 마한 진한 변한 중에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강력해지면서 그 외의 변한과 삼한의 세력들이 가야세력권이 된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들이 처음엔 유유상종으로 부족국가를 형성하다보니, 마르가르, 다르가르, 바르가르 이 형성이 되었는데, 천축국에서 출발할 때 이들은 "가르" 라는 호칭을 끝에 붙이기 시작합니다. 아시다시피 <가르>는 韓 을 의미하는데, 夏의 후예국간에 가르/겨레 라는 공동체의식에서 나온 호칭일수도 있습니다만 아마도 韓땅을 조선준왕이 점령하여 三晉을 통칭해 韓이라고 불렀던 것이 더 타당한 韓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신라 편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8세기에 감숙에서 나타나는 위가르(위구르)는 魏씨/貴씨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해봅니다. 기록상으로는 위구르는 돈황 등의 지역에서 744년까지 동돌궐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여 1세기 동안 번영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즉, 인도굽타왕조(2세기)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인도북부점령으로 천축국 세력이 천산부근의 타림분지, 혹은 감숙 등에 남아있는 소월지와 합해졌던 과정을 살펴보았었습니다. 이들 소월지는 7세기까지 감숙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그 직후에 위구르가 같은 지역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로 이들이 같은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 지역에 위구르족으로 남아있지만, 7세기까지 존재하던 이들 감숙,천산의 월지세력은 成漢, 大秦등의 나라를 직접세우거나, 중원의 나라들에게 투르크계 용병으로 불리며 여러 전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특히 조조의 魏나라에 투르크 용병은 韓민족과 매우 특별한 관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수서, 열전 신라편을 보면...
"<魏>將 丘儉 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爲<新羅>焉"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정벌하고, 패하자 "옥저"로 달아났다. 그 후에 다시 옛땅에 돌아왔는데 남아있는 자들이 "신라"가 되었다.“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魏나라 관구검은 투르크계 용병을 전투에 많이 활용했음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후에 신라편에서 설명하겠지만, 3세기에 신라로 진입한 이들 魏/貴씨세력은 4세기에 마립간세력을 이루며, 신라를 장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궐 비문에 보면, 돌궐 앞에 코/콕 자를 넣어 콕-돌궐 이라 스스로 호칭했다합니다. 콕 은 높다/크라라는 뜻인데, 역시 우리의 "크다"라는 말과 통하는데, 鬼/箕 (기자)등도 크(다)와 관계있는 "ㅋ"발음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보통 사카족 계열에서 보이는 발음인데, 사카족의 기자조선 후손인 돌궐/진한이 커-다르가르 라고 표현하는 데는 이상함이 없습니다. 우리 역사의 미스테리중에 하나인 쿠-다라 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열도에서는 쿠-다라를 잃었다고 매우 비탄스러워 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듯, 현재 百濟를 쿠다라 라고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쿠다라와 백제간의 발음상 유사성이 없어 보이는데, "큰 나라" 라는등의 해석이 있어왔지만 확실하게 해석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제 글에서의 해석으로는 당시 마지막 남부여 왕조를 빼놓고는 백제는 월지/마한의 세력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추측입니다. 가야지역 또한 월지/마한이 접수했었던 상황이었기에 ( 삼국편에서 설명합니다.) 이들을 월지/마한 세력을 통칭해 辰이라 칭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즉, 쿠다라는 大辰 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辰이란 국명을 처음 정한 세력은 기자조선으로써 三晉을 정복하고 韓왕을 자처했다가 후에 기자조선/아사달/월지 통합 세력으로써 국명으로 辰 이라 정했던 것 같습니다. 월지국 주도의 마한/임라/월지를 辰이라 표현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韓이란 국명은 조선준왕세력이며 辰은 월지/魏세력으로 주도권이 넘어갔을때의 국명이 아닐까 합니다. 임라, 야마토 란 명칭도 모두 馬(韓), mra 란 발음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합니다. 梁書 (양서)에 보면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라고 나옵니다.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은 서로 만리 떨어져있었다(있다.) 이것은 seres/saka 라고 불리우던 천축의 秦支, 혹은 그후에 생긴 오르도스의 Ejin saraki(에진 사라키)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참고로 위구르 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조상을 박트리아, 훈족, 흉노족 등에서 찾습니다. 그들은 秦나라등도 본인들의 조상이라 믿고 인도북부의 간다라 문명도 본인의 조상들이라 믿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들이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이 살던 땅 "에덴"도 자신들의 역사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이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인류 최초의 기원이 되는 위구르왕국의 이름이 "Udun" 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어원은 오르도스/언덕에서 조선의 신독/천독/연독으로 내려와 인도의 신독/천축으로 이어졌 왔고 위구르 역시 연독을 기억하고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龍城국의 발음도 "연뎅"에 가깝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에덴이란 명칭도 오르도스/언덕/알타이와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 타클라 마칸 과 마한
타림분지의 누란이란 나라는 BC126년 흉노의 찬유가 한나라에 보내는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 나라입니다. BC 109년 한무제에게 누란은 정복당하고 이어서 흉노도 누란을 공격하면서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누란은 줄타기 외교를 하게 됩니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으로 유명한 이 누란의 실크자수를 보면 삼족오와 기린(천마도와 비슷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이들이 태양숭배, 새숭배와 관련 있는 사카족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란의 유물로 발견되는 중국계 유물들도 예를 들면 멸망한지 오래된 秦나라 시절의 거울 (진식경)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秦나라의 사카세력과 그 관련성을 강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진식경의 山자 문양이 한민족과의 친연성을 느끼게 해줍니다.)
http://blog.naver.com/eujin2010/30091675517
한나라는 BC 77년 친 흉노파인 누란왕 안귀를 암살하고 선선국이라 칭하면서 한나라군이 누란에 주둔하면서 속국화 시킵니다. 이후로 정세가 안정된 누란은 흉노와 한나라를 오가면서 나름대로 번영을 이루게 됩니다. 2세기 초반이후 후한의 영향력이 약해지며 서역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고 하는데, 이제까지 기록이 부족하던 누란에 갑자기 기록이 풍부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기록물들은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일종의 간다라계통 문자로써, 이러한 문서의 양식은 쿠샨 왕조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이 시기 선선이 쿠샨계의 이주자에 의해 정복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2세기이후 인도 북부에서 밀려온 쿠샨족이 감숙의 소월지나 천산, 타림분지에까지 진출하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특히 쿠샨의 貴씨가 이곳, 천산부근을 통해 신라로 들어갈수 있는 가능성을 누란의 기록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한편 한문으로 된 문서도 다수 발견되어 중원과 지속적인 접촉을 암시해줍니다. (혹은 이들이 중원과도 원래 관계가 있던 세력이였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중원의 삼국시대를 진나라가 통일하고 다시 오호십육국시대가 되면서 355년 전량의 공격으로 선선국은 구자국(쿠차)와 함께 전량에 입궐하게 됩니다. 전량은 다시 전진에 멸망당하면서 선선왕 휴밀타는 다시 전진에 입궐하게 됩니다. 후에 우여곡절을 거치고 북위의 공격으로 445년에 점령당하면서 그 이름 이 끊어지게 됩니다.
한편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의 소만 장군에 의해 260년에 1000명의 군사로 한나라의 군현이 누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330년에 이곳에서 철수하여 50km 떨어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나옵니다. 이것의 이유로써 수로의 변화를 들고있는데, 바로 타림분지에 물이 끊어지면서 생긴 일이라 합니다. 누란은 타클라마칸 서쪽 끝 감숙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타림분지가 300년 이전까지는 사막이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타클라마칸 주변부가 수로의 변화가 생겨 살기 힘들어진 거라면, 더 내부에 살던 이들은 AD 300년 훨씬 전에 이곳의 사막화로 이동했음을 의미합니다.
http://en.wikipedia.org/wiki/Loulan_Kingdom
또 2세기경에 누란이 사용했다는 쿠샨의 문자 체계 (경덕왕=중국말로 통일)형식인 카로슈티 (Kharosthi : 간다라말 계통)의 사용은 쿠샨왕족을 비롯하여, 소그디아나등지에서 쓰이던 문자로써 실크로드 길에 따라 드물게 발견됩니다. 여기서 신라편에서 언급되겠지만 마립간세력이 바로 이들 쿠샨/貴씨 세력이며 2세기에 이곳 천산/타림분지를 거쳐서 한반도로 들어가게 된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누란이 있는 천산부근은 바로 마립간 시절의 적석목곽분과 같은 형태의 쿠르간 무덤이 유일하게 산재된 지역입니다. 이들 쿠샨족은 누란을 비롯하여 타쉬쿠르, 파지릭등을 거쳐서(쿠르간무덤등) 요령의 삼한에 합류하였거나 삼국형성 후에도 합류하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카로슈티는 간다라 말을 다시 쓰는 형태라고 하는데, 이들의 모양과 발음이 가림다/가림토 문자와 매우 닮아있음은 말씀드렸었습니다.
http://blog.naver.com/eujin2010/30091675443
마한의 소국은 54여개 국으로 알려져 있고 그 강역은 사방 4천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당시의 타클라 마칸/타림분지 또한 수많은 소국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나라들을 다 비교하긴 힘들다 해도 그중에는 서로 매우 유사하고 의미있는 국명들도 존재합니다. (누란 같은 경우 많이 알려진 나라지만, 인구는 10000-20000의 소국이었습니다. 이곳에 만들어진 漢나라의 군현의 군사수도 10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해면 소규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소국이 타클라마칸 주변으로 많이 존재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古浦국등은 浦梨국을 연상시키며 이들의 성이름도 石城 (마한의 石國)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타쉬쿠르 (쿠르간무덤이 있는) 의 경우도, 무덤의 유사성 이외에도 대구와 연결되는 발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에 우즈벡 지역에 등장하는 石國(타쉬켄트)도 마한의 소국에 등장하는 국명입니다. 또 바빌로니아-아시리아 쐐기문자에 등장하는 사카의 이름이 "아쉬쿠자" 였음을 생각해보면 "大丘" "사카""쿠자"는 서로 연관성이 있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또 타림분지의 크기는 사방으로 약 1000 km 남짓해 보입니다. 사방 사천리에 가까운 거리입니다. 이래저래 많은 부분이 닮아있는 것이 타클라 마칸과 마한입니다. 즉, 가정을 해본다면, 1세기 초반에 타클라마칸/천산에 자리 잡았던 마한지역을 한나라와 흉노가 괴롭힐 즈음 마한 세력은 실크로드를 타로 대륙동북, 요령지방의 조선유민/한사군지역으로 이동하여 삼한을 형성하였고, 감숙 등에 남아있던 소월지 세력 등이 천축국 유민과 함께 중원을 통해 삼한/삼국에 합치기도 하였으며, 후에 2세기에 굽타, 파르티아 등에게 밀린 쿠샨족이 다시 이동해, 타클라 마칸의 누란이나 파지릭, 타쉬쿠르 등을 점령했다가 이곳의 사막화 등으로 이동하면서 魏나라등의 용병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三晉과 秦 에서 출발하여 박트리아, 월지, 사카 등으로 나뉘어 바로 이곳 천산과 타림분지를 돌아 중앙아시아와 인도북부를 장악했던 이들은 다시 왔던 길을 200년 만에 똑같이 통과하여 요령지방에 자리잡게 되고 일부는 유럽으로 서진하면서 진출하게 됩니다. 타클라마칸은 버려진 마칸이란 뜻입니다. 이들이 천축국에서 다시 韓이란 명칭을 쓰게된 것은 이들의 출신이 조선준왕이 세웠던 韓의 울타리 안이라는 인식을 서로 했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25. 쿠르간과 적석목곽분의 비밀
a. 쿠르간 세력의 이동경로
쿠르간 (kurugan) 무덤은 비교적 한국에 잘알려진 무덤형태입니다. 신라의 4세기 - 5세기 적석목곽분과 매우 닮아있어서 미스테리하게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쿠르간에 대한 설명은 밑에서 하고 먼저 이들 쿠르간을 만든 세력들의 이동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마한의 위치에 대하여 이미 전 글에서 밝혀드렸듯이 타클라마칸이 바로 마한의 위치가 아니였나 합니다. 이들 마한이 성립한 시기는 기원전후로써 漢나라의 영토 확장으로 이들은 동북아로 이동합니다. 그후에 2세기경부터 굽타와 사산조페르시아에게 밀린 쿠샨왕조가 감숙과 타림분지로 올라옵니다. 이것은 타클라마칸과 마한편에서 보여드렸던 누란의 쿠샨 점령 기록들을 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 쿠샨족은 누란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근처 사카계통의 파지릭등의 지역에도 세력이 미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들이 이곳을 점령하기는 했겠지만, 그들이 지나가면서 남겼던 세력들과 200년 만에 다시 합해진 것이므로 문화적, 풍습적으로 서로 적응이 힘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쿠르간 지역에 남겼던 BC 3세기 정도의 무덤들중에는 바로 그시기에 그곳에 머물렀던 일부 사카족들 (후에 천축국)이 그곳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塞족이라 불리던 사카족과 연독족, 오손족이 살던 곳이 바로 이지역이며 애초에 秦과 晉의 사카족들이 초반에 월지국에 밀려 인도북부로 내려가기전 이곳에서 살았을 때 (bc3세기) 쿠르간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쿠르칸은 천산지역에는 최근 것이라야 BC 3 세기 정도이고 그 후에 신라에서나 나타나는 대형 적석 목곽분이라는 것이 4세기 동북아 끝에서 발견이 되니 약 500여년의 시간차이가 납니다. 이것을 塞족이 천산부근에서 쿠르간 무덤의 주인들이었고, 이들이 후에 천축국을 거쳐 다시 쿠르간 지역으로 들어와 신라로 진입하게 되면서 그들 선조의 무덤 형태를 사용했던 게 아닐까..생각해봅니다. (신라 경주의 알 수 없게 산재한 고분형태를 생각해볼때 몇몇 조상의 묘를 이장했던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b. 쿠르간과 사카/스키타이
이해를 돕기위해 일단, 쿠르간 무덤을 설명하자면 스키타이와 사카에 대한 설명을 빼놓을수가 없고 스키타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헤르도토스의 기록을 살펴봐야합니다. 헤르도토스는 스키타이에 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남겨놓은 스키타이는 흑해의 스텝지역에 거주하던 스키타이를 중심으로 그들의 생활상, 특성을 기록하였던 것인데 이들의 특성이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오르도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통의 특성을 보여주는 까닭에 그 넓은 지역을 모두 스키타이 문화라 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역이 워낙 넓다보니 그냥 스키타이문화로 통칭하기엔 광범위하고 더 세분화하여 구분이 가능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와 관계가 깊어 보이는 중앙아시아의 사카, 알타이산맥의 타지릭, 오르도스 사카, 서몽골의 울란간 등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헤르도토스는 스키타이를 규정하면서 이들의 선조를 그리스신화와 연결하기도 하면서 지중해에 가까운 인종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빌로니아-아시리아 쐐기문자에도 등장하는데 이들을 아쉬쿠자, 혹은 이쉬쿠자 라고 기록되었다하는데 ( 오-사카와도 통하는 발음이 아닌가 합니다)
헤르도토스는 스키타이와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과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이동이 쉬운 유목민 스키타이를 이길 방법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 스키타이의 대표적 유물로써 쿠르간 무덤이 있는데, 이미 기원전 4천 년 전부터 흑해연안에서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발달하고 중앙아시아를 넘어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나타난다 합니다. 초기 스키타이인의 쿠르간은 BC 7세기부터 BC 3 세기에 이르기까지 발견되었는데 수혈식에 가깝고 초기 목곽분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신라의 적석 목곽분과 닮았다고 말해지는 쿠르간은 북해연안의 것이 아니라 주로 중앙아시아와 알타이 지역의 것입니다. 북해의 무덤은 수혈식묘로 초기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묘 주변에 호를 판것이 마치 영산강 지역의 주구묘에 차라리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의 무덤에는 무기류, 마구류, 동물양식 장식 등이 출토되는데 이들은 그리스식의 투구 등, 그 지역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꼬깔모자와 비슷한 모자를 사용했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물의 특징은 오르도스지역까지 넓게 퍼져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하나 이들의 특이한 유물중 하나는 경식, 숫돌, 청동솥 등이 있는데 특히 이 청동솥은 신라 토우나 실제 유물로도 한반도에서 인할 수 있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한편 헤르도토스의 기록이나 페르시아의 명문에는 사카 라는 명칭도 구분되어 기록되는데 이것도 스키타이와 마찬가지로 사카인과 닮은 유목민의 총칭으로 사카라는 명칭이 범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사카인들은 이란의 아헤메니드 왕조와 전쟁을 벌인 기록도 남아있는데, 이들이 기록에 남긴 3가지 사카족에는 뾰족한 모자를 쓴 사카족의 존재도 기록으로 남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북해에서 이란에 이르는 사카족들은 후에 페르시아에 속해 전쟁을 치루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데로 중국의 기록에도 BC 2세기 즈음에 사카족으로 생각되는 塞족이 천산북족에 살았다고 기록되는데 월지가 흉노에 밀려서 이들 塞족이 사는 곳으로 와 이들을 밀어내고 塞족은 인도북부 카쉬미르 지역으로 밀려갔다고 나옵니다. ( 후한의 기록이며 이들이 나중에 이곳 사카족이 되었다고 기록되는 것이지요) 후에 월지는 오손에게 다시 밀려 남하하게 됩니다.
이밖에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이나 아랄해 유역 등에 여러 사카족들의 유물들을 남기는데 이중에서 세미레치에 사카의 유물로 알려진 알마아타지역의 이식-쿠르칸과 일리강변의 베스샤트이르-쿠르칸 등이 있는데 특히 이식 쿠르칸은 대형 적석목관분 묘로써 이중 하나가 황금인간 (온몸이 황금으로 둘러쌓여있던..) 으로 유명한 쿠르칸입니다.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파지릭 문화의 쿠르간도 대형 적석 목곽분이 발견되며, 이들중 하나가 얼음공주 등으로 유명한 쿠르칸입니다. 얼음 공주묘라 하면, 그 지방의 기후조건으로 인해 묘내에 자연결빙이 생겨 유물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했기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이들은 파지릭 3단계 쿠르칸형태 중 2단계에 해당하는 BC 5-3 세기 때의 무덤양식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식 쿠르간과 같은 형태라고 보입니다. 이들은 BC 3세기에 돌연 사라지는데 이때가 오손에게 밀린 월지가 사카를 공격하던 시기로 보입니다. 파지릭을 남긴이들이 월지라는 설과 유럽의 민화,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의 실제 종족이었다는 설도 있고 사카인들이 남긴 문화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들 쿠르간의 무덤군이 발견되는 곳 근처에,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타스쿠르라는 곳이 있습니다.
중국어로는 타스쿠얼간 (塔什库尔干)이라고 중국에서는 발음하는데, 실크로드 길목의 중심국으로 지금은 작은 마을이나 당시에는 현장법사를 비롯한 모든 고승들과 실크로드 세력이 이곳을 통과했던 곳입니다. 타지크인이 사는 곳으로 유명한 이곳은 이곳에 浦梨국의 石頭成 으로 유명합니다. 漢나라때는 푸리/포리국으로, 당나라 때는 파르티아 보호령이었습니다. 즉, 마한과 마립간이 지나간 이 자리에 포리국이 존재하였다는 말인데...이것은 얼핏 가라국을 공격했던 포상 8국을 연상시킵니다. 또 포리국의 석이 石이란 발음이었다는 것도 이들 사카족과 연관성을 떠올립니다. 이들 浦上 은 포상이 아니라 포위라고 발음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上가라를 위가라로 읽듯이 말입니다. 즉, 포상은 포위..... 포리와 비슷한 발음일수도 있다는 추측입니다.
적석목곽분은 신라에서 4세기에 홀연히 나타나서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사라지는 무덤형태입니다. 그전에는 "수혈식 토광묘"라 하여 말 그대로 땅을 파고 그대로 묻는 형태의 무덤이죠. 이것이 갑자기 적석 목곽분이라는 대형고분으로 변하는데 전의 무덤형태가 서서히 변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다른 세력이 들어온 것처럼 무덤이 형태가 급격히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동시대 백제나 고구려 (혹은 일본의 구주지역)와 같이 수혈식/횡혈식 석실/옹관고분 등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무덤의 주변에 호를 팠다는 주구묘 (최근에는 이것이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일본과 한반도 중남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과는 일면 닮은 부분도 있으나 역시 차이가 많이 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방후원분이나 적석목곽분의 초기 무덤형태가 둘다 주구묘와 비슷하다는 점은 특이합니다. 비슷한 뿌리를 가진 이들중 한쪽은 물고기숭배사상으로 호를 더 깊게 파며 물고기 모양의 묘를 제작하게 되고 한쪽은 호가 사라지고 적석위에 봉분을 높게 쌓는 형태로 발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적석목곽분이 나타나는 지역과 연도는 매우 한정되어있습니다. 매우 그리고 그 유사성은 부인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 닮아있습니다. 하지만 시대차이와 거리가 너무 멀어 서로 연결고리를 찾아내지 못하던 것이 현실입니다. 이들 오르도스/사카/韓족이 대륙을 휘젓고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한반도가 아닐까요
26. 고구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삼한의 후예로 한국인을 형성하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선조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전 글에서 삼한의 형성과 이동과정을 살펴보았고 제곡고신의 후예라고 불리우면서, 부여, 혹은 마한의 후예라고 불리우는 고구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는 bc37년에 주몽에 의해 졸본에서 건국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는 동명성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주몽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朱夢의 옛 발음을 보면 to + mhǝŋh 으로 東明 과 비슷한 발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혹은 두만강, 흉노의 두만 선우와도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흉노의 원조격인 두만선우는 바로 오르도스 지방에서 BC 200 년대에 생존했던 인물입니다. ) 주몽의 설화는 약간 미스테리한데, 부여의 금와왕이 하백의 딸 유화를 거두었는데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나옵니다. 그전에 이미 해모수와 사통을 하여 집에서 쫒겨나온 것으로 되어있는데, 햇빛과 해모수는 같은 의미로 쓰인듯 합니다. 어쨋든, 부여의 땅에서 자라나게 된 해모수의 아들, 주몽이란 부분은, 사실은 주몽이 외부에서 부여로 유입된 인물이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선조라고 여기는 제곡고신은 사실 황제헌원의 아들인 소호금천의 손자로 헌원/소호금천과의 고구려가 관계가 있다는 점 또한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高 자는 높다는 의미의 "고"입니다. 일반적으로 높다라는 의미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고대의 높다, 크다, 넓다를 동일시 한 개념으로 봐선 "고"는 높다란 뜻 외에도, 크다 라는 어원과 연결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전 글에서도 알아봤듯이 크다 라는 표현과 발음이 부족마다 틀리게 썻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오르/月/魏 도 크다 라는 뜻이고, (현재도 위(上)/오르다 등의 표현으로 남아있습니다.), 代/단/타르/땅 도 크다 라는 뜻에서 비롯됩니다. 또 사카족의 경우 전 글에서 말씁 드렸다시피, 丘/기/귀/키 등의 예에서 보듯, 크다라는 의미로 "ㅋ"의 발음이 사용됩니다.
고구려에서는 높다 라는 의미로 고/코라는 표현발음을 사용하는데 이는 사카족의 발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돌궐이 스스로 지칭할 때 콕-다르가르 하는데 高의 경우도 이와 맞닿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주몽은 오르도스, 섬서, 하남지역의 朔족 출신이지만, 부여지역으로 이주하여 부여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북사와 수서에 보면,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워 동이강국으로 성장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구태를 소서노의 남편 우태와 동일한 인물로 보기도 하나, 仇台 (쿠-타이)는 역시 사카족의 丘자와 통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즉, 구태의 동이국이 백제가 아니고 고구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동명은 오르도스/하남/섬서에서 나라를 이미 건국했었고, 이들의 후손인 구태가 부여기반의 고구려를 세운 게 아닐까 라는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또, 고구려에는 爲씨 성의 귀족이 핵심 세력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爲/魏 씨는 사카와 함께 晉을 구성했던 주요 부족성씨 입니다. 사카족과 더불어 고구려에 존재했던 爲씨의 존재는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가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에 대한 비밀스런 기록을 남깁니다. 22권 고구려 본기에 보면 <고구려의 비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900년이 조금 못된다. 이제 지금 80 명의 대장이 죽었다. 그래서 멸망하였다. 고씨는 스스로 漢나라에서 유래한다 했다>....라고
알려진 건국년도보다 200년 전이라면 三晉에 준왕이 韓을 세웠으나 곧, 爲씨들이 이들을 밀어내고 세워진 나라가 漢입니다. 즉, 이곳에서 조선이 이곳晉의 땅에 韓을 세우고 곧, 爲족/朔족이 漢을 세우는 시기가 고구려의 건국 시기라는 뜻입니다. 동명성왕의 존재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고 대방의 옛땅에 정착하여 구태 고구려가 생겨난 것이 아닐까요... 이 부분은 신라의 문무왕비에 보면 駕朱夢 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신라의 선조를 말하는 문무왕비에 주몽이 등장하는 것에 이상하다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신라 역사의 매우 초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동명이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이 晉의 땅인, 하남/섬서이며, 바로 사카족과 魏씨와 관련이 있는 부족이 아닌가 합니다. 駕 란 글자도 高자와 치환되어 사용된 것 같은데, 크다 라는 高처럼, 우월하다는 뜻의 駕를 사용했으며 역시 "ㅋ"의 발음으로 크다 라는 표현을 한듯합니다. 같은 곳에서 잉태한 삼한/신라와 더불어 고구려나 주몽에 대해서도 신라는 친밀감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고주몽에서 구태로 이어지는 사카족은 섬서/하남에서 바로 부여지역으로 이동하여 터를 잡았고 삼한은 전신인 월지국으로써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북부까지 이동했던 것이고 기원후가 되서야 이들이 요령에 자리를 잡게 되는 듯합니다. 여기서 마한/말갈의 일파가 고구려/부여족에 합류하면서 고구려 부속 말갈족이 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지배층이 월지/사카족이므로 큰 저항 없이 서로 합쳐지게 되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부여계통은 고구려의 지배계층이나 高씨나 爲씨가 기반으로 삼은 세력이기에 최고위층은 바로 이들 월지/사카 계열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이유로 외부에서는 고구려를 무크리/말갈이라 부르며 최치원은 고구려는 마한이라는 기록을 남겼던 게 아닐까요? 고구려 왕족들은 스스로를 부여족이라기보다는 말갈족과 더 혈연적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마한/무크리라고 표현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봅니다.
고구려는 삼족오, 즉 태양과 새를 숭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은 중원이든 만주든 한반도든 열도든 산동의 대문구/소호금천의 영향을 받은 부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새와 태양숭배의 연장선이라 봅니다. 백제도 중반까지는 월지계통이 지배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백제편에서 설명), 부여세력의 경우 삼족오나 까마귀를 숭배한다기보다는 새로서는 봉황 등이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烏를 "오"라고 발음하기도 하며, "카/까"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크다는 개념을 "ㅋ"로 발음하는 사카족의 경우 카/까 라고 발음하며, 크다는 개념을 "ㅇ"로 발음하는 월지족의 경우 "오"라고 발음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태양과 큰새/검은새의 토템자체가 대문구에서 내려오는 사카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 삼족오가 처음 나타난 것도 일본건국신화에 나오는 아마테라스가 보낸 삼족오가 나오는데, 후에 설명이 나오겠으나, 이들은 사카/월지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삼족오의 흐름은 바로 商나라와 기자조선 등에서 내려오는 사카/월지족의 후손이라 하겠습니다. 신라와 고구려가 초반에 보이는 친연성이라든지, 둘다 삼족오/새를 숭상하는 공통점을 보이는 것도 이들이 사카족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신라인과 고구려인이 깃털이 달린 관모 등을 즐겨 썼던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봅니다.
27. 백제
백제의 경우 동명성왕의 양자로 들어간 둘째부인 소서노의 자식들,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과 하남위례성에 각각 나라를 세웠다가(BC 18년), 비류세력이 온조에게 합해지며 백제가 커지는 계기가 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백제는 마한을 1세기경에 합병한다고 기록에 나오나 저의 해석으로는 마한은 임라/야마토로 부활하여 백제를 다시 마한의 영향력아래 두게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임라와 마한과 야마토를 같은 세력으로 보는 이유중에 하나는 기록의 연결성과 타이밍도 잘 맞지만, 그들의 발음자체도 서로 연결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馬 = mra/mwa 입니다. 馬韓이 백제에게 일시적으로 망한후 한반도 남부와 열도에서 부활하면서 만든 국명이 임라이며 이것은 馬의 발음을 음차하여 기록하였던 게 아닌가 합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는 원래 요서/산동지방에 영향력을 가지고 영토 또한 소유하고 있었고, 후에 백제가 마한의 영향력으로 들어온 뒤 이들이 요서/산동영토를 승계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열도의 倭/신라를 제압하면서 절강성에 영향력이 남아있던 倭의 지역 또한 마한/백제의 영토가 되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당시 북위와의 전투는 바로 이시기 마한/백제와의 전투가 아니었나합니다. 참고로 임라/마한이 백제/열도신라/열도 왜를 제압하였던 시기가 4세기 후반으로 보이는데 바로 478년이 왜왕이 남조(송)에서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마한’ 여섯 나라의 都督이자 ‘왜왕’으로 봉해졌다는 그 시기입니다. (북위-백제 전쟁은 488 - 498 년 동안입니다. 열도 신라에 대해선 신라/왜 편에서 자세한 설명 드립니다) 요령시절의 백제와, 왜를 정복했던 마한/임라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a. 양직공도(梁職貢圖)』
『송서(宋書)』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 리에 있었다. 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침략하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해서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삼국의 요령시절)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經略有遼東 百濟經略遼西 百濟所治謂晋平郡 晋平縣
b. 『양서(梁書)』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지방을 차지하였고 백제는 요서와 진평 두 지방을 점거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基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矣 自置百濟郡
.....등등 남사, 통 전등에도 요령시절의 백제의 위치를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c. 三國史記/卷46 에는
崔致遠 열전 중 최고운의 당황제에 대한 간접상소(당 태사시중에게 전달)
마한은 고려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고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병이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월을 치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 등지를 흔들어 중국의 큰 짐이 되었으며 수 황제의 멸망도 요동의 정벌에 의한 것이다.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d.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 (488-498)
남제서의 기록을 보면 북위와 백제와의 10년 전쟁의 결과 백제의 승리로 끝나고 이들의 영토가 양자강 주변에 까지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倭의 본거지였으며, 마한이 북위와의 전투도 승리하고, 열도의 왜와 신라도 점령하면서 이곳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魏라는 나라나 성씨와 관계가 깊어보이는 사마씨는 백제에서도 등장합니다. 爲씨와 司馬씨가 같은 뿌리라고 晉書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씨와 사마씨는 긴밀한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왕릉으로 유일하게 발굴된 무령왕릉을 보면, 무령왕 (462-523)의 본명은 사마융입니다. 무령왕이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란 호칭도 받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 부분을 놓고 사마는 섬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개로왕의 동생이 곤지로 알려져있고 곤지와 함께 열도로 피신하던 개로왕의 부인이 섬에서 무령왕을 낳았기에 시마(일본어로 섬) 혹은 사마왕이라고 불리 운다는 해석입니다. 매우 설득력있는 설명입니다만, 다른 각도의 설명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사마왕이란 명칭말고도 무령왕에겐 사마융 이라는 본명이 있습니다. 司馬 라는 성씨는 史記 의 저자 사마천을 비롯하여晉나라와 魏나라에 끊임없이 나오는 성씨입니다. 같은 성씨를 두고 사마융은 부여계요, 사마염은 魏나라계라 나누어 말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 두 세력이 연관이 있다는 것인데, 즉, 사마씨는 바로 晉(魏)에서 비롯된 성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는 섬이라는 뜻보다는, 마한/월지가 원래 魏씨지역에서 비롯되었기에 마한/임라/월지의 사마씨가 핵심세력이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같은 晉/魏 에서 비롯되었지만, 신라는 북위와 친밀해보이고, 백제는 남조와 친해 보이는 이유는 선비세력이라 알려진 북위는 사실 월지/천축을 경험한 魏 세력이 주축이 되었던 것이고 남조는 중원에 남아있던 魏/漢세력이 주축이 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이들의 원 뿌리는 모두 춘추전국시절의 晉/秦 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백제가 마한에게 다시 점령당하는 시기를 살펴보자면, 우선 마한이 임라/야마토라는 이름으로 (mra/mwa ="임라/야마/마)" 열도에 나타낼 때부터 추적해야합니다. 부여백제에게 마한이 망한후에 아마도 이들의 잔존세력이 가야지역으로 들어가 이들과 병합하여 임라가라를 먼저 형성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이시기에 포상 8국이 금가야를 공격했던 시점이라 (ad 209년) 둘간에 관계가 있지않을까 라는 가능성도 생각을 해봅니다. 浦上이란 옛 발음자체도 pho-zang 에 가까워서 푸장/후잔 에 가까운 발음입니다. 백제에 밀려난 월지인들 중 貴霜족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혹은 신라로 진입하게 되는 마립간세력일수도 있으나 이것은 신라편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즉, 이시기 즈음에 가야연맹이 임라와 연합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들에 관한 남은 기록을 보면... 209년 내해 이사금 14년에 해상교역권 문제로 가락국(駕洛國)을 공격했다가 석우로가 지휘하는 신라지원군의 공격으로 패퇴하였다. 농경지 확보와 내륙 진출을 목적으로 안라국도 공격했다.
212년 내해 이사금 17년 포상팔국 전체가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215년 내해 이사금 20년에 골포국 주도의 3개국 연합함대가 지금의 울산일대인 갈벌(竭火)을 공격했다. 포상국의 난은 진압되었다고 하는데, 어찌됐건 이들의 나라들이 한 세력으로 합해졌음을 대가야의 골포국 등의 기록 등으로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이후로 가야지역의 세력이 미약해진 듯이 기록하였으나, 실제로는 중국측 기록을 참고하고 이에 일치하는 유물 (광개토대왕비)의 기록과 일본기록의 행간의 뜻을 파악해볼 때, 가야 지역은 매우 큰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바로 이 지역, 이시기가 임라가라/마한의 탄생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마한/임라는 야마토(임라, 얌라) 라는 이름으로 열도 정복활동을 시작하는데, 바로 히미코 세력이 선봉에 섰던게 아닌가 합니다. 히미코는 조조의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239년 친위왜왕의 작위를 받습니다. 248, 266에 다시 魏에 사신을 보냅니다. 이들 사신의 기록을 보면 266년엔 내부 전쟁이 있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 열도 내에서 신라와 倭殘,등과 정복 전쟁)
396년부터 왜오왕(讚·珍·濟·興·武)이 남조(동진/송/양)에 보낸 사신들이 백제/진한/마한/신라/왜/임나의 왕임을 자처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송나라로부터 (478)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마한" 육국의 왕으로 봉해집니다. (안동대장군이란 호칭을 얻습니다). 후에 양나라로부터 진동대장군이란 호칭도 얻습니다.(502) 바로 이맘때가 임라(왜오왕)가 백제와 열도 신라를 정복하고, 倭 를 정복하여 열도를 평정한 순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들이 왜 오왕으로 불리우는 까닭은 임라/야마토 등의 원래 국명이 있으나, 외부적으로 열도는 倭의 지역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곳을 통치하는 세력을 왜왕이라 부르는 게 아닌가 합니다. 백제도 마한의 영향력 아래 있어도 백제라는 국명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각 담로마다 고유의 국명이나 명칭은 그대로 사용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마치 기자조선에 위만이 와도 조선의 국명을 그대로 쓰는 것이나, 조선준왕이 韓의 땅에 와서 韓왕을 자처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후에 임라가 쇠약해지면서 백제는 부여계의 성왕이 복귀하면서 538년에 국명을 남부여로 바꿉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광개토대왕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제의 기록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을 참조하여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는 아무래도 신라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한것이고 일본서기는 당시 천황이였던 부여계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양쪽 다 마한의 영향력을 축소시켜서 기록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다만, 광개토왕비나 중원측 기록, 삼국사기나 서기의 행간에 남아있는 기록들을 참조로 하여 당시 임라의 강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임라라는 것은 倭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한과 가야의 역사를 뜻하는 것이며, 이들은 임라가 백제와 신라의 내부세력 자체였기에 한국인이 감정 상할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혹시 임라에 대한 저의 글의 방향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겠으나 만약 후자라면, 이제껏 알았던 선입견과 일본에 대한 원망 때문에 임라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 우리들의 맘 이였습니다만, 바로 조선의 후손이요 삼한의 구성원이 열도를 지배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일본의 역사자체가 한국사임을 인정해야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축소된 임라마한의 기록은 백제와 어떤 관계로 나와 있을까요. 백제 지배층의 심상치 않은 기류는 근초고왕(?_375) 때부터 보입니다. 이때가 바로 백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왕인을 열도에 보내게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근초고 왕은 마한을 정복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황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근초고왕은 소위 "담로"라는 제도를 시작하여 각 지역을 총괄하는 마치 봉건제도 같은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담로 (擔魯)를 음차어로 백제어 "읍성"을 뜻한다고들 하는데, 이미 이 비슷한 단어가 고구려에서도 쓰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물(多勿) 입니다. 옛 땅/ 옛 영토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고구려는 전 글에서 사카/爲족이 지배층일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즉, 월지/마한의 고구려 지배층은 bc 200년대의 오르도스/ 하남/ 섬서 지방의 고토를 기억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즉, 다물은 대마 (大馬 ="ta " mra)의 영토를 말합니다. 백제의 경우도 마한이 백제를 영향력아래 두고 나서 그들이 정복해가는 또 다른 영토에 大馬 (ta mra)라는 명칭을
만들어 나갔던 게 아닐까 합니다. 신라가 범 월지국출신의 박트리아계 (박), 사카(석) 을 모두 사카의 발음인 김씨로 통일했듯이(신라편에서 설명) 백제에서는 마한/월지의 출신들은 眞씨/사마 씨 등으로 불리어 온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세기 일본천황인 텐무는 천황 8계급의 세습칭호를 정했는데(684년), 야마토시대를 열었던 응신천황계열을 眞人(마히토) 이라 해서 최고위치로 정합니다. 신찬성씨록에도 황족중에서도 가장 높은 성씨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眞人은 眞의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이들이 원래 모두 眞씨라기 보다는 범월지세력을 眞이라 칭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월지국은 辰/晉/秦/金 /眞 과 관계가 깊음을 생각해보면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또한 眞을 "마"라는 발음으로 읽는다는 데서 馬韓과의 연관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야마토 = 임라 = 마한 = 월지 의 시각으로 보면 이들 응신천황부터 아스카시대 전까지는, 완전히 임라/마한이 지배층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텐무는 아마도 삼한통일 후 열도를 장악한 신라계열 천황으로 추정되지만 마찬가지로 범 월지계열((사카족 포함)을 眞인으로 정리하고 그들을 마히또라는 특별계급으로 분류하는듯합니다. 응신천황과 근초고왕은 매우 관계가 깊다는 기록들도 나오고, 일본학자들은 응신이 眞씨일거라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합니다.
텐무는 일본서기 편찬을 지시한 천황으로 또 일본이란 이름을 정한 천황으로도 유명한데, 텐무는 신라계로써 사카/김의 숭배토템인 해를 일본의 상징으로 삼게 됩니다. 포상8국을 마한과 가야합병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했었는데 이들이 합병을 통해 세를 키우게 되고 백제를 영향력 아래 두고 나서는 열도로 진출합니다. 히미꼬의 야마토 건국신화는 연오랑 세오녀의 열도신라 건국신화와는 또다른 일본의 건국신화로 남아있는데, 금가야 건국신화와 매우 닮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이 시기 백제 지배층의 변화에 대한 중요한 암시가 나타나는데, 근초고왕 이후로 백제왕은 眞씨 만을 황후로 맞습니다. 마치 몽골이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은 것과 같은 시스템입니다. 이시기부터 백제를 월지/마한의 세력의 영향력 아래 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칠지도에서 백제의 왕세자가 기이하게 태어나 聖音을 내었다는 부분과 일맥상통합니다.) 한반도에서 중원 본토와 이어져있는 백제는 임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반독립 세력으로써 선진 문물을 더 빨리 받아드리는 형태를 보입니다. 무덤형태도 남조의 영향을 받는등, 이들의 문물을 일본에 지속적인 제공을 합니다. 백제와 임라는 혈통으로 이어져있기에 사실 누가 종주국인지 구분이 애매할 수도 있을거라 봅니다. 열도는 당시 삼국의 경쟁터가 되었지만 초기 정복시절의 열도는 왜인의 세력이 그리 크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초반에 신라의 사카인들이 열도에 제일 먼저 눈을 떠서 땅을 정복해 나갈 때는 크게 어렵지 않았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토착민인 아이누인등은 오랜 세월 고립되어 살아오면서 쉽게 정복되어졌고 열도에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아니였을가 생각해봅니다. ( 야마토세력이 커지면서 나타난 응신의 대형 전방후원분등..)
이들은 월지시절 전방후원분의 전신인 주구형 묘제 (마한) 를 한반도에서 씁니다. 주구묘의 형태는 전방후원분의 초기모양정도로써 주변에 호를 파서 물을 담는 호가 둘러 쌓여진 묘제를 말합니다. 범 월지세력 안에도 여러 부족이 있기에 그 특징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지만, 전방후원분을 만들었던 세력은 바로 韓/夏의 후예로써 (복희와 여와) 물고기 숭배 전통이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주구묘와 같은 초기 묘제의 형태는 신라의 적석목곽분과도 일면 비슷한데, 초기의 봉분을 만드는 형태의 묘제가 천산산맥 등으로 진출한 스키타이(숙신)족은 쿠르간의 영태로 발전시켜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는 신라는 적석목곽분으로 발전하였고, 물고기 숭배의 전통을 가진 가라/韓계열의 월지세력은 전방후원분형태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주구묘/전방후원분과 물고기를 연결시키는 주요 이유는 주변에 물을 담는 호의 의미자체가 물고기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며, 묘제의 모습자체도 물고기를 닮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거대 전방후원분이 열도에 집중적으로 보이게 되며, 4-6세기에 발달하다가 6-7세기에 사그라 듭니다. 이시기가 바로 야마토 통일을 이룬 응신 때부터 전방후원분이 발달하다가 아스카 시대를 여는 긴메이 천황때 사라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아스카는 바로 임라지역의 금가야 가 신라에 병합되던 시기와 맞물리는데(532), 즉 한반도의 금가야세력(사카족)이 신라에 합병되면서 그 유민이 열도로 넘어가 임라/야마토를 장악하게 되며, 이들이 바로 센카/킨메이 천황 세력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사카가 사카세력의 큰 언덕(大坂)이란 뜻임을 알려드렸습니다.(사카는 일본어로 언덕입니다.) 열도로 간 이들 금가야세력이 월지세력을 밀어낸 시대가 바로 아스카 문화시대입니다. 이때가 바로 일본에서는 소가 (사카)씨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던 상황입니다. 6세기 초반 이들 금가야 세력에게 밀려버린 열도의 임라세력이 열도를 탈출하여 아직도 우호세력으로 남아있는 남부여로 이동합니다. 바로 이 임라/월지세력이 한반도 남부 (영산강)에 나타나는 전방후원분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도에서 이들 월지세력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의 일이므로 시기적으로 정확하게 맞습니다. 후에 한반도에서 백제의 멸망을 지각한 남부여 세력이 다시 열도로 몰려들면서 세력을 장악하면서 (소가씨를 멸절시킴) 백강전투를 주도했던 덴지천황등, 부여계가 열도로 들어섭니다. 이때의 문화를 하쿠호 (白鳳) 문화라 하며 白자를 사용하고 鳳(봉황)을 내세우는등, 사카(삼족오)세력이 아니라 남부여의 세력임을 감지 할 수 있습니다. 후에 삼한통일을 달성한 신라의 영향으로 텐무/몬무 등의 신라계 천황으로 잠시 바뀌는데, (몬무와 문무왕의 친연성관계는 신라편 혹은 왜/야마토편에서 밝혔습니다만, 동일인물일 가능성까지 보이는 친밀한 관계로 보인다합니다.) 백제의 멸망으로 밀려온 백제 부여계 등이 세력을 잡으며 나라시대를 엽니다. 후에 지필이 완성되는 일본서기 (AD 720년)은 부여계의 입장에서 각색 편집된 역사서로 남게 됩니다.
지금의 기술로도 짧은 거리의 섬조차 아직도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세상의 끝이라 생각되는 열도에 영원히 고립된다는 공포는 지금 상상이상으로 컷을거라 봅니다. 그런 고대인들이 내륙에 어떻게든 세력의 발판을 가지고 또 앞서나가는 제철 기술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노력했을 것은 당연하다 라고 봅니다. 이와 더불어 칠지도에 대한 설명을 해보자면....
칠지도는 바로 근초고왕이 재위할 시기의 유물로써, 백제의 왕이 마한계로 바뀌는 순간에 만들어진 칼입니다. 즉, 백제가 마한/임라/야마토세력으로 바뀌는 순간인데, 바로 眞씨계열 황후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칠지도의 내용은...
泰(和?)四年 五月 十六日 丙午正陽 造百練鋼七支刀 豈避百兵 宜供供侯王 □□□□作
(태화사년 오월 십일일 병오정양. 조백연철칠지도. 개피백병.의공공후왕.□□□□작.)
「태화사년 오월 십일일 병오정양」에 백번(百番)이나 쇠붙이를 단야(鍛冶)하여 이 칠지도를 만들었다. 어찌 「백병」을 피하겠느냐. 마땅히 「후왕」을 받들고 받들라.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僞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이래미유차도.백제왕세자기생성음. 고위왜왕지조.전시후세)
선사 이래로 이와 같은 칼은 아직 없었다. 백제왕세자는 신령스럽게 태어났다. 그러한 왜왕의 뜻에 의해 칼을 만들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 즉. 백제의 왕과 마한 眞씨 계열을 결합시킴으로써 친 임라/마한 왕을 탄생시키는것을 의미합니다. (백제왕세자 기생성음)
백제왕과 진씨에 의한 왕세자가 신령스럽게 태어났다는 부분이 바로 마한계열의 새로운 왕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칠지도의 의미도 당시 칠국의 왕을 요구한 왜5왕의 기록과도 맞아들어가는 부분입니다. 이들은 광개토대오아비에 나오는 신묘년(391)기록에도 나오듯. 마한/임라는 백제를 부마국으로 삼아 세력권아래 두고 열도 신라를 정복하여 왜왕의 타이틀을 빼앗고, 한반도 신라의 왕자를 인질로 삼는 등 (아신왕 397년 왕자 전지를 인질로 삼음) 영향력을 떨치나, 광개토대왕의 남벌로 한반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광개토왕과 전투를 벌였던 백제의 진사왕등은 고구려에 항복하므로써 친고구려 정책을 펼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바로 이때의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진사왕이 왜(임라)에 무례하게 굴어 제거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큰 역활을 한 것이 소가(蘇我)씨인데, 백제에 이들이 지배층으로 있었다고 해서 백제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임라의 금가야 계로써, 이후 일본열도의 아스카시대를 여는 소가/사카씨와 같은 성씨로 보입니다. 이들 소아/소가씨는 신창성씨록에서도 기록되어있듯, 석천숙녜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석천숙녜가 바로 진사왕제거에 역활을 했던 인물이고 이들의 성씨가 석씨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경우는 백제가 마한을 병합할 때부터 백제내부에는 마한의 세력이 권력층에 남아있었고, 혼인의 인해 마한과 백제의 관계가 더 친밀해 지면서 광개토왕의 남벌이후에도 임라/마한과의 끈끈한 관계가 지속됩니다. 후에 열도에서 이들 마한/임라는 금가야 유민들에게 권력을 빼앗게 되면서, 그 잔여세력이 한반도로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5세기말에서 6세기) 이 칼을 받은이는 아마도 임라왕으로 부터 칼을 하사받은 백제의 왕세자인듯한데, 후에 백제의 멸망으로 부여/백제세력의 이동과 함께, 열도로 이 칠지도가 옮겨진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반도의 백제/마한/부여 세력이 망하면서 이들을 쿠다라 라고 칭하는데, 전 글에서도 설명 드렸듯, 사실 百濟의 발음과 구다라는 전혀 비슷하지 않습니다. 즉, 이것은 월지를 의미하는 辰 을 뜻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辰이 "다르"라고 발음되는 것 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즉 쿠 다라, 대 월지 를 뜻하는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최근에 발견된 백제의 유뮬중 중국보다도 훨씬 오래된 면직물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6세기경) 실크로드를 넘나들어 천축국을 지나온 월지국세력에게 면직물의 제조나 구입은 중원보다 훨씬 빨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예전 글에서 三郞과 사무라이를 비교한 글을 쓴적이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야마토라는 명칭이 사마타이/사마태라는 명칭으로도 기록되는데, 이는 사마씨와 위씨, 진씨가 같은 성씨인 것과 마찬가지로 , mra 등의 발음이 임라, (이)므라 혹은 (사)므라로 발음되었던것이 아닌가 합니다. (즉, 사무라이는 월지인은 말하는 것에서 유래된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칠지도등에서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칠지도를 받친다. 에서 倭 라는 문구 때문에 한국인의 감정이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옛 부터 倭라는 국가 자체가 남방인들을 정복한 치우의 후손이라는 繪夷/苗 족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소수의 정복자와 다수의 피지배인이 존재하는 구조로 보입니다. 당시 열도가 倭인의 땅으로 알려져 있기에 이곳을 정복해나가던 세력의 공식 타이틀이 倭왕이 될 수는 있으나 이들의 실제 정체성은 마한/월지인이고 이들은 倭人 이 아니였음을 상기해야하겠습니다.
28. 신라
오르도스/기자조선/숙신/韓 에서 시작한 한국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획을 긋는 신라는 역사적으로도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소국으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고구려의 멸망을 아쉬움과 더불어서 당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무너뜨린 신라에 대하여 원망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아쉬운 면이 분명 존재하나,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의 9韓을 보더라도, 당시의 한반도와 만주, 또한 중원의 지배층들이 모두 한민족과 동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을 보면, 삼국만이 한민족이었다는 선입견을 바꿔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신라라는 나라에 대해 한국이 정통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 등, 어느 나라도 의문을 가질수 없는 나라이며, 바로 이 신라가 숙신/기자조선/오르도스의 정통성을 가졌고 그 동질의 나머지 나라를 통합하는 과정이었기에, 오히려 우리가 5000년 역사의 비밀을 밝힌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절대 트집을 잡을수 없는 이론적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신라의 탄생과정을 쭉 정리해보자면, 우선 晉/秦시절부터 따져야하겠습니다. 晉은 곧 三晉으로 나뉘고 이들이 秦에게 점령당했다가 秦이 멸망하면서 기자조선의 韓을 거쳐 辰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곧 이들은 爲 씨의 漢나라에게 밀려나오면서 월지국과 塞(朔)족으로 나뉘게 됩니다.
사카족은 夏나라시절 大丘에 살던 비자의 무리들과 하남/섬서의 朔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한반도와 만주에는 사카족과 다르족의 연합세력인 숙신/스키타이 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자세력은 중원의 서쪽에 봉토를 받고 秦을 세우게 되는데, 이들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원을 처음으로 통일하게 됩니다. 秦이 망한 후, 기자조선이 三晉의 하나인 韓 (이들이 곧 辰韓의 모체가 되는데, 즉, 이곳에 이미 秦나라 시절부터 秦人이 대거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을 점령하게 됩니다. 후에 魏씨의 월지국이 이동할때, 韓의 사카족은 이미 천산부근으로 이동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산지역의 塞/연독의 땅을 월지와 오손이 차례로 점령했다던 漢書의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카로 알려진 塞족과 연독이 함께 천산에 살고 있었다는 기록인데, 연독이란 이름은 알려지다시피 조선연독/천독 밖에는 없습니다. 또 당시에 조선연독세력과 秦의 사카가 함께 살고 있을수 있는 나라나 지역은 조선준왕의 韓밖에 없습니다. 즉, 오손은 烏孫 이라 쓰는데, 이들이 까마귀 烏자를 쓰는 것부터 사카와 심상치 않은 관계를 보입니다. 사실 塞족의 땅이였다는곳과 오손이 있었다는 땅은 바로 천산부근인데, 이곳에 바로 카쉬(카르)라는 실크로드 중요한 지점이 존재합니다. 즉. 烏孫이 있던 곳의 이름이 카쉬라는 이야기인데, 혹시 오손이란 발음은 글자만보고 중원에서 잘못 발음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들의 원래 이름이 "烏커孫쉬"족, 사카와 관련 있는 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들 사카/연독이 월지에게 밀려 결국 사카는 인도북부에 자리 잡고 秦의 시절부터 불리어오던 Seres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알려지며 실크로드의 중심 역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BC 2 세기에서 BC 1 세기의 인도북부에는 월지족과 사카족, 신독 (연독)국의 이름이 보이는데, 韓의 구성원 자체가 韓/夏인, 조선연독인, 秦의 사카족이었으므로, 그 지역에 그들과 관계있는 국명들이 나타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역시 중앙아시아의 여러 곳을 거쳐 이곳에 정착해있던 박트리아는 원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을 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가 독립해서 세운 박트리아 왕국으로 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大夏로 불리우는 것은 韓/夏세력이 이들을 점령하게 되면서 大夏라고 불리는 계기가 되는듯합니다. (아니라면, 이들이 실제로 夏의 유민일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기원전 166년 그리스계 박트리아는 인도 북서부를 점령합니다.
기원전 161년 흉노에 밀린 월지가 인도 북부로 이동하게 됩니다.
기원전 145년 박트리아가 월지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것을 大夏가 멸망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韓/월지가 점령함으로써 이때부터 오히려 대하/토카라로 알려진 게 아닐까라는 추측입니다.)
기원전 90년 드디어 사카/신독세력이 간다라 지방을 점령하며,
기원전 57년 남인도,아리카메두와 무역을 꽃피움,
기원후 26년 파르티아왕 곤도파레스가 이 지역을 다스림
기원후 50년 간다라 불교 문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박트리아/간다라(박혁거세)가 남인도, 아리카메두와 무역이 성하였고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사카족에 의해 간다라문화가 태동하고 (석탈해, 국명을 계림으로 바꿈) 파르티아가 장악 (파사이사금)의 과정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것이 과연 우연이기만 한 걸까요..
신라의 초기이름이 시라/시로/사라 등의 이름이 내려오는데 seres 와 관계 있어 보인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습니다만, 서라벌 이라는 명칭도 보입니다. 시라 + 벌 의 형태인데 역시 벌/판/변 등의 평평하고 큰 땅을 의미하는듯합니다. 박트리아/변한 계열에서 크다는 의미로 ㅂ/ㅍ의 발음이 보인다 말씀드렸는데, 서라벌 역시 초기의 변한계열의 발음이 보입니다. 나중에 왜/야마토편에서 나오겠지만, 오-사카 와 대판 大阪 의 발음이 동시에 쓰인 이유는 이들 사카세력과 변한(박씨)세력의 발음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카족이 반고의 後漢書에서는 塞족과 같은 부족이냐를 두고, 역사가들이 혼동을 일으켰던 이유로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들 塞족의 존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색족은 불교의 중요성이 커지는 후세인들이 일부러 끼워넣은 픽션이 아니냐 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바로 이 대목에서 이들의 비밀을 밝혀 낼 수 있습니다. 사기 서역전은 前漢시대 사마천이 장건의 서역을 여행하며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적은 것입니다. 장건은 BC 129-BC126 년에 월지국에 머물며 기록을 했던 것이고 사카족이 좀 더 그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간다라 지방을 점령하면서 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그때가 BC 90년 무렵으로 장건이 월지를 떠난 후에 생긴 일입니다. 후한은 AD 25년에 일어납니다. 또한 반고는 외가가 김일제 계열의 金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타 다른 중원인보다 사카/塞족에대한 자세한 정보나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 글에서는 바로 신라의 박혁 거서간이 박트리아의 토착세력을 상징하고 그 뒤로 들어가는 석탈해가 사카족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당시 간다라는 우르드계 언어를 사옹하고 있었는데, 당시 왕을 케사르 (시이저)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즉 거서간은 케사르와 닮은 발음을 사용하고, 서쪽에 사는 칸 이라는 뜻으로 居西干을 사용한 게 아닐까 합니다.
이들 박트리아 ,사카족은 당시의 상황과 지역 특성상 혼혈의 모습으로 존재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신라는 弁韓에서 나왔다는 기록과도 들어맞습니다. 박트리아, 사카족들이 쓰는 꼬깔모자 (꼬깔모자 弁)를 이들을 나타내는 명칭인 弁이라는 글자를 통해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박트리아/사카족은 변한의 모습이었던듯 합니다. 또한 사카족과 더불어 신라의 주요 구성원이 되는 월지족도 그들의 원래 선조(晉/魏)가 mra (오르/魏/馬/苗/月)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들이 苗족의 후예라는 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석탈해가 데리고 왔다는 알지는 당시 석탈해(사카)와 함께 박트리아에 진입한 월지세력을 뜻한다고 해석해봅니다. 다시 말해 간다라 /박트리아 지역은 사카(석)와 월지가 함께 들어간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석탈해가 龍城國 혹은 다파니국(多波尼)에서 배를 타고 왔다가 김수로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고 신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전 글에서 설명드렸 듯 龍은 언덕이란 뜻이 있으며 용성의 옛발음 자체가 연덴/연뎅 에 가깝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多波尼 의 글자를 해석하면 페르시아인이 많다는 뜻인듯 합니다. 월지의 박트리아 점령과 후에 간다라지방의 사카점령으로 인해서 인도 북서부에는 간다라국과 바로 밑에 인도-스키타이라고 서방에서 부르는 나라가 보이게 됩니다. 인도 북부/북동부는 신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호류지의 천축국 지도를 참조하여 해석해보면, 간다라지방을 점령한 사카국을 건타라국建汰羅國 이라 기록하고 있고, 월지가 점령한 박트리아 지역을 <波자斯國> 이라 칭하는듯하고 있습니다. 즉, 석탈해가 파자사국을 떠나 초반에 진입시도 했던 곳이 신독(조선/韓/秦)의 김수로 지역이고 이것을 성공하지 못하고 간다라지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석탈해의 파자사국이 지금 인도-스키타이라고 표현하는 나라이고, 페르시안계가 많다는 뜻의 多波尼란 글자를 사용하여 뜻을 나타냈으며, 그 발음은 사카/대구/대판 이란 발음이 아니였나 합니다. 말씀드린 데로 대판이란 발음은 페르시아/변한에서 보듯, 서양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변한계 발음으로 봅니다. 龍城국이란 이름 또한 언덕이란 뜻을 의미합니다. 이 지역은 곧, 파르티아 (ad30년)가 점령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라의 파사이사금을 뜻하는 게 아닐까라는 추측입니다. seres/sereka 라고 불리던 이들 사카세력은 간다라를 점령하며 계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간다라의 글을 가림(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간다라와 계림의 발음 간 흡사성이 존재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당시 그리스계통의 토착민이 있었기에 그리스땅을 의미하는 발음이 아닐까란 생각도 해봅니다.)
신라의 유물들이 로마의 유물과 매우 흡사한 점이 많아 이들 간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가 있었을거란 막연한 추측만 하고있는 것이 현재 역사학계의 추측입니다. 물론 신라와 로마간의 교류도 있었겠으나, 이들이 간다라지역을 진입했던 사카족이 맞다면, 그리스의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닿아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로마와 헬레니즘을 경험한 신라의 유물들이 비슷해 보인다는 시각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역을 통합하여 월지5국이 지배하면서 결국 이들중 귀상/쿠샨족이 인도 중북부 전체를 통일합니다.(ad60년) 블러그의 사진의 비교에서 보듯, 월지의 쿠샨족과 신라의 판갑은 매우 유사하게 보입니다. 또한 박트리아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세력에 의해 세워진 나라인데, 이들 마케도니아식 애틱형 투구 ( 뺨가리게가 접혀지는)가 신라에서 보여지는 투구와 거의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미케네 역시 그리스세력으로써 이마를 둘러싸는 판과 그 위의 판이 분리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미케네 투구는 이전의 그리스형태의 투구와 같이 코린도식 (뺨과 코가리개가 고정된 모양)이며 이것이 진화하여 마케도니아에 의해 널리 퍼진 애틱형 투구가 신라의 투구와 매우 닮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형태는 일본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형태의 투구로써 신라가 박트리아와 간다라에서 그리스/마케도니아 문화와 혼합되면서 이같은 갑주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마케도니아의 투구형태를 이어받은 로만 투구도 역시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신라의 투구 꼭대기 부근도 아마 이들 애틱 투구들처럼 장식이 달려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기 신라에서 보이는 판갑처럼, 그리스, 로마의 갑옷도 판갑임은 많이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이당시 쿠샨흡후에게 밀린 나머지 세력들의 일부가 바로 이시기에 이곳을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이들 중 일부는 타클라 마칸/천산지역에서 마한세력으로, 혹은 감숙에 남아있는 소월지와 합류하게 됩니다. 이시기에 2 세기경 오손도 해체되는데, 이들 오손유민과 연독/신독/韓세력이 Hun/헌/한 이란 이름으로 서진하며 유럽을 강타했을거란 추측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렇듯, 기원전후에 쿠샨에게 밀려갔던 韓/辰세력은 타클라마칸을 거쳐 요령으로 이미 들어와 자리 잡은 馬韓에 합류해 辰韓 의 이름을 가집니다. 辰국과 韓국은 그들의 정체성이나 국명이였던 관계로 ( 기자조선세력 출신 ) 이들과 섞여있던 秦인과 함께 辰韓을 형성합니다. 굽타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밀려오면서 밀려난 쿠샨족은 타클라 마칸/천산지역에 잠시 머무릅니다.(2-3세기경) 이들은 당시 조조의 魏나라와 함께 용병으로써 전투수행을 자주하는데, 이는 魏나라 자체가 이들 쿠샨족과 뿌리가 같기에 약 400년이 흘렀지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1세기 당시가 삼한은 요령에 머물다가 한반도로 진입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삼한에 들어온 부여세력인 백제는 요서와 산동에 세력을 후에도 지속적으로 갖고 있게 되며, 고구려는 마한의 잔여세력 말갈/마한과 함께 ,만주 등에 넓은 세력을 잡게 됩니다. 이 당시 신라의 위치를 말해주는 기록이 있는데, 수서와 북서에 "신라는 낙랑의 옛 땅에 있다" 라는 구절입니다. 당시 수나라나 북서가 파악하는 낙랑은 하북 갈석산 부근의 낙랑 (혹은 평양)을 말합니다. 또한 구당서 신라 전에도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왕이 사는 곳을 금성이라 하는데 둘레가 7-8리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곳을 통하여 이동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해줍니다. 바로 이맘때 魏의 관구검이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는 사건이 생깁니다.
a. 관구검의 한반도 진입
중원의 魏와 고구려는 원래 사이가 좋았는데 (같은 월지/사카세력) 위가 요동의 공손씨를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와 연합전선을 핍니다. 이때 역시 요동진출을 염두에 두던 고구려가 함께 공격하여 공손씨를 무너뜨리는데, 위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요동을 전부 점령합니다. 이에 고구려와 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때가 246년입니다. 이때 고구려가 관구검의 병사 10000명을 죽이는 등, 전과를 올리다가 전략에 휘말려 패하고 마는데, 이 과정에서 옥저에 머무르던 관구검의 병사 일부가 신라로 들어가게 되는데 수서, 열전 신라편에 보면...
"<魏>將 丘儉 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爲<新羅>焉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정벌하고, 패하자 "옥저"로 달아났다. 그 후에 다시 옛땅에 돌아왔는데 남아있는 자들이 "신라"가 되었다.“
말씀드렸다시피 魏나라 관구검은 서역의 투르크계 용병들을 전투에 많이 활용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바로 魏에 용병으로 있던 감숙/천산의 쿠샨(貴霜)족이 이 전투를 통해 신라로 들어가게 된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이들은 관구검의 전추가 있었던 246년 즈음에 신라에 들어와서 원래 있던 석씨 박씨의 월지/사카인들을 밀어내고 세력을 잡습니다. 기존 세력은 천축에서 요동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수혈 토광묘 세력이고, (쿠샨인들의 묘제와 실제로 비슷) 관구검과 함께 들어온 이들은 천산근처의 쿠르간지역에 섞여 살다가 들어온 적석목곽분 세력인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bc 2세기경, 塞/연독의 이름으로 잠시 정착했었던 오손지역입니다.) 이들이 쿠샨족, 즉, 貴(霜)족이 바로 麻立干시대를 열게 되는데, "마"란 발음과 "와"란 발음이 혼용되는 이유는 설명드린대로 이들의 실제발음이 mra/mwa 등에 가까울때가 많아서 "(음)와" 또는" 뫄 "등으로 혼용되기 때문인 듯 합니다. 麻立이란 발음이 mwa/ma + rup 에 가까워서 워러 /뭐러 같은 발음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干자 까지 합해서 워르간/워럽간 이란 발음에 가깝게 생각이 됩니다. 즉, 위가라, 혹은 위칸에 가까운 발음이 됩니다. (馬 와 月 이 비슷한 발음으로 혼용되는것과 같은 경우)
삼국사기에 보면 마립간의 다른 이름으로 궐(獗)이라 부른다고 나옵니다. 12세기의 삼국사기 편찬자도 4세기의 마립간과 獗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뚝이나 머리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獗의 옛 발음은 g(h)wat 입니다. 이것은 궈/거 에 가까운 발음입니다. 貴의 옛 발음은 kwǝś,.."커" 에 가깝습니다. 즉, 마립간 세력이 貴씨임을 獗이란 글자를 남겨둠으로써 암시하고 있습니다. 역시 前秦왕 부견과 신라 사신 위두와의 대화내용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기록을 보면 382년 신라국 왕 누한樓寒 이 사자 위두를 바견하였다고 나옵니다. 신라왕을 지금 우리의 발음으로 누한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바로 이시기가 내물 마립간시절입니다. 마립간을 누한이라고 칭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기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발음을 음차해서 적었을 기록이었다면 마립간과 누한사이에 발음상 공통점이 분명 있어야한다는 점입니다. 樓寒의 옛발음은 rwa-gan 입니다. 뤄간/워간에 가까운 발음입니다. 이 발음이 바로 前秦人이 들었던 麻立干의 발음입니다. 윗글에서 확인한바와 바찬가지로, 마립간의 발음은 (음)뤄-럽-간, 혹은 워르간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즉, 마립간은 魏干이라 불리기도 하며, 貴씨이며, 魏韓, 즉 위가라,위구르 세력과 같은 세력임을 강력하게 추측해낼 수 있습니다. 이들이 흔히 말해지는 우가야 세력입니다. 마립간의 뜻은 이들이 貴족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감숙/돈황/천산에 남아있던 천축국/월지국 잔존세력이 6-7세기까지 존재하다가 당에게 멸망당하는데, 그 이후 이곳에 위구르 라는 부족이 생겨납니다. 즉 이들과 동질세력인 신라의 貴씨족 /쿠샨족이 "위(가라)"라는 명칭과 관계가 깊지 않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魏씨가 鬼씨에서 왔다는 기록도 있고 爲씨는 규 (?)에서 나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들 魏나라/鬼方 있던 代족의 지역에서 월지 5흡부가 나왔다는 北魏書의 기록도 있습니다. 섬서/하남에 鬼方이 모여살던 貴州라는 곳도 있었음을 말씀드렸었습니다. 즉, 貴씨란 귀상/쿠샨에서 비롯된 성씨로 마립간의 명칭으로 신라 지배층으로 진입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다른 곳도 아닌 신라로 들어간 것은 이들 신라인들이 천축국인이라는 같은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천산/타클라마칸의 누란의 경우에서 보셨듯, 그곳은 AD 2 세기 즈음에는 쿠샨족이 새로히 지배층으로 들어왔고 이지역의 쿠르간 (적석목곽분)과 신라의 적석목곽분의 연결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 줘야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들 쿠샨/貴씨 족들이 관구검의 용병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사실 얼마나 다행스럽게 남아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즉, 감숙/천산에 남아있던 貴족/큐샨인들은 말가르와 같이 스스로를 위가라 魏韓 라고 부르고 있었고 7세기경 독립국을 만들었던 것 같고 이들은 신라의 마립간과 같은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들의 비교를 통해 천산의 쿠샨과 아프랍시아의 쿠샨, 신라의 마립간 세력들간의 공통점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프랍시아 벽화는 7세기경의 벽화로 한참 돌궐이 발흥하던 시기라서 그들을 돌궐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유연/누란의 쿠샨족에서 보듯, 쿠샨과 돌궐은 매우 가깝게 지내온 비슷한 모습과 풍습의 부족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前秦과 신라사신과의 기록을 남긴 秦書에는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미발美髮을 하고 머리 길이가 장여丈余 나 된다...하략> 즉, 신라인들이 머리를 길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프랍시아의 쿠샨귀족과 같은 머리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관구검을 통한 마립간이 신라로 들어왔던 연도인 246년을 살펴보겠습니다.
246년이면 신라는 조비 이사금 17년 시절으로써 당시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10월에 동남쪽에 흰 기운이 있었는데 마치 펼쳐진 명주 한필과 같았다. 11월에 京都 에 지진이 일어났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들 혼혈에 가까운 중앙아시아 월지인들의 경우 백마 등등의 흰색으로 암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도 흰 기운이 생기고 지진이 일어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京都는 경주를 말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또한 조비 이사금에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조비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한편으로 이르기를 제귀諸貴라고 했다] 성은 석씨이다.......중략.........전 왕이 장차 죽으면서 유언을 하기를 사위 조비助賁로 왕위를 이으라고 하였다. 왕은 신장이 컸으며 거둥과 풍채가 아름다웠다. 매사 일에 임할 때는 분명하고 결단성이 있어 나라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하였다.>
여기서 보면, 諸貴 라는 표현을 씁니다. 모든 貴를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즉, 신라로 진입한 쿠샨의 貴(霜)씨를 포용함을 암시하는게 아닐까 합니다. 왜/야마토에서 설명드리겠지만, 세오녀가 貴妃가 된다던지, 倭를 정복하고 나서 倭國의 이름이 貴國 으로 명칭이 바뀌어 불린다던지... 하는 점들은 마립간세력이 바로 貴씨들이 아닌가 라는 강한 추측을 하게 합니다. 일본의 비공식 옛 문서들을 보면 위가라가 일본을 오랫동안 통치해왔다는 문서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것은 야마도/왜 편에서 자세히 다뤘으나, 바로 열도 왜를 정복한 초기 신라세력이후에 貴국을 세웠던 마립간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들을 바로 위가라 라고 칭하며, 감숙에서는 쿠샨의 위구르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야마토이전 시절, 진무천황으로 시작하는 미스테리의 일본 초기 천황들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이들이 천산지역에서 지냈던 경험으로 적석목곽분 (쿠르간무덤)을 만들게 됩니다. (당시 쿠르간인들 = 적석목곽분 세력 = 마립간 = 貴씨)
열도를 정복한 초기 신라세력을 공격했던 貴國이 바로 이들 마립간 세력이라는 추측인데...한반도에서 마립간이 나타나는 시기 즈음에 일본에선 백마고분으로 알려진, 신라인의 오사카정벌 전설이 내려옵니다. 이지역이 대대로 오사카 (大坂)으로 알려지는 것도 바로 이들 신라인들에 의해서라고 보입니다. 즉, 박석김의 초기 신라세력이 이미 왜국을 정벌하고 사카족의 전통대로 大丘/사카란 지명을 만듭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카의 의미가 희미해져가면서 이미 큰땅/ 언덕 이란 단어인 사카에 크다는 "오"자를 붙이는데, 이것은 사카족의 크다 라는 표현이 아니라 월지/魏 족의 표현인 오르/위 라는 표현의 연장선입니다. 그러므로 사카에 "오"를 붙여 오-사카 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일본인들은 大阪 이라고 쓰고 오사카라고 읽습니다. 대판 이란 발음은 당나라시절의 중원의 발음이기도 하지만, 夏/韓에서 비롯되는 서양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파/바 의 발음입니다. (변한,페르시아,벤골) 즉, 대판은 변한세력의 발음이기도 합니다. 한글의 원조라고 알려진 가림토/가림다 글자는 바로 이들 貴씨들이 간다라 시절 쿠샨왕조때 사용하던 카로슈티글자와 매우 닮아있다는 말씀도 이미 드렸습니다. 일본에 남아있다는 神代문자도 가림다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열도 초기에 신라인의 貴國에 의해 남은 유물이며. 神武천황이라 부르듯, 이시대의 글자가 神代글자로 남아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아마도 마립간시절까지도 이런 형태가 남아 있다가 본격적으로 중원과 교통하기로 맘먹은 신라 경순왕이 글자를 통일시키고 神代문자를 정리하고 漢文으로 통일하며 이들의 복잡한 원발음 (찰리, 사다함, 산드라 등등)은 漢文을 이용한 소리문자, 이두를 만들어 사용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 후로 세번째 신라의 세력이 되는 법흥왕 慕秦 김원종입니다. 이미 전글에서 설명을 드렸지만, 법흥왕의 이름이 모진이라 이들이 선비족 모용부족과 관련이 있다는 등의 의견이 많은데, 燕 이 있던 지역에서 慕容 이라 쓰는 것은 연을 사모한다는 뜻을 골라 원래 있던 발음을 음차한 경우라 생각됩니다. 慕자 역시 mha 라는 발음에 가깝기 때문에 "마"라고 읽기도 하지만 (음)와 라고 읽을 수도 있다는 거죠. 모용역시 워연 이라고 읽을 수 있는데,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유연/Yuan Yuan 등과 닮아있는 발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모진도 (음)워진 이라 읽을 수 있는데, 魏金 / 위진 ( 월지 + 사카) 를 뜻하는 세력을 총칭하는 것으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훗날 보이는 신라 아이신/애신 의 원조가 바로 이것이라 하겠습니다. 워진(원종)이라 발음하고 김씨로 통칭 합니다. 이들이 秦을 사모한다는 뜻을 쓴 만큼, 秦과 관련 있는 세력일 듯한데, 바로 감숙의 前秦 세력이 이들 법흥왕 세력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도 월지-천축편에 자세히 설명) 前秦의 전신인 成漢과 신라의 관계, 이들지역에 있던 금성, 에진시라키 라는 지명등에대해서도 천축-월지편에서 자세히 하였습니다. 이들이 漢을 표방하는 것도, 蜀을 표방하는 것도, 秦을 표방하는 것도 모두, 秦/辰 /韓의 후예임을 말해줍니다. 즉, 휴도 김일제 세력의 휴도세력이 월지의 휴밀/도밀을 형성하고 新이 망하면서 다시 김일제 후손들이 이들에 합류하면서 감숙지역에 前秦등을 세우게 되는데 이들 前秦세력 또한 북위등에 종속되면서 용병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진 북위와 백제와의 전쟁에서 신라와 접촉하게 되면서 신라로 들어가게 된것이 아닐까 합니다. 당시의 前秦/西秦세력은 감숙에 금성을 도읍으로 정했던 바가 있는데, 이들이 북위에 종속되면서 하북지역으로 강제이주가 되었기에 이미 이들과 한반도와는 거리가 매우 좁혀졌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륙에 나타나는 신라의 천문기록의 경우도 바로 이들 김일제 세력 혹은 쿠샨족의 천문기록이 아닌가 합니다. 이들이 중원에서 기록한 천문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활용한 것이고, 새로이 시작한 한반도의 천문기록은 마립간 시대가 끝나고 나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신라는 유독 중원국들과 접촉이 없는 나라로써 알려져 있고 다만, 전진 북위등과 몇 차례 접촉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AD 280 년 서진에 사절 파견
281 년 서진에 사절 파견
377 년 전진에 사절 파견
382 년 전진에 사절 파견
508년 북위에 사절 파견
521 년 북위에 사절 파견
564 년 북제에 사절 파견
568 년 북제에 사절 파견
이렇듯 접촉했던 나라나 그 빈도가 매우 적은데, 이런 관계로 보아 이들 접촉했던 나라들은 신라와 특별히 혈연적 역사적 관련이 있는 나라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들 서진-전진-북위-북제 들 간에도 혈연적 역사적 계승이 보이기 때문에 더욱 심증이 가는 대목입니다. 신라가 전진에 사신을 보냈을 때의 기록이 당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신라는 내물 마립간 (4세기 후반)시기로 (진서에 이르길, 부견이 "그대가 말하는 해동의 일이 전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물으니 사신 위두는 "중원에서 시대가 달라지면서 名號가 달라짐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 라고 대답했다합니다.) 이것을 두고 신라의 국력이 그만큼 신장하고 제도 정비가 잘 되었다 라는 것을 암시했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문장을 잘보면, 신라가 전과 달라졌다는 의미는 신라의 예전의 모습을 잘 안다는 뜻으로 부견은 물어보고 있습니다. 중원과 거의 왕래가 없는 신라를 안다는 것은 동일 세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들이 초기 신라세력과는 풍습이 더 동일한 세력이었는데 마립간 세력이 들어오면서 풍속이 다소 틀려졌음에 이를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즉, 이미 신라의 존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들 세력은 후에 북위에게 점령당하고 나서 용병의 역활을 하다가, 신라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들은 漢의 왕조도 경험하고(김일제의 휴도세력), 前秦/成漢의 중원식 왕조시스템을 경험한 세력이라, 마립간에서 왕으로 호칭도 바꾸고 관제도 정비하게 됩니다. 간다라/계림의 석탈해족은 불교를 잘 알았으리라 생각하나, 그뒤로 천산지역에 거주하던 貴씨 마립간이 들어오면서 불교의 색채는 옅어지지만, 다시 불교전파로 유명한 前秦세력의 법흥왕이 들어오면서 다시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신라에 각인시킵니다. 부견과의 대화에서 봤듯, 석탈해 세력과 이들 전진세력은 모두 간다라/천축 세력들이고, 마립간세력들은 貴霜족이지만, 천산의 북방민족생활을 거치면서 열심히 숭상하지 않는 세력이 되었던듯 합니다. 박트리아 스키타이족은 간다라에 비해 불교 숭상 정도가 매우 약했으므로, 신라의 貴氏는 이 지역 (서천축)출신이 아니였을까 추측도 해봅니다.
삼국의 형성 초기 자체가 마한, 진한, 변한, 왜 등과 뗄레야 뗄수없는 관계의 역사임에도 삼국사기에는 마한, 진한, 변한과 신라와의 관계가 자세히 나와있지 않습니다. 특히 진한과 신라의 관계도 불분명하게 나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도 역사에 대해 의도를 가지고 어느 정도 조정/편집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의 형성과정의 우여곡절과 지배층의 변화를 은유, 축약, 비 등을 통해 나타내는 것은 물론 당시의 년도도 역시, 역사를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아주 정확히 들어 맞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신라 초기의 역사 박혁거세라든지, 석탈해등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세력 간의 이동과 변화를 나타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의 해석입니다. 열도 신라에 대해서는 倭편에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